즐거운 생활/등산,여행

[동양학으로 본 서양문명(10)ㅣ터키 이스탄불]

풍월 사선암 2015. 3. 26. 09:00

[동양학으로 본 서양문명(10)터키 이스탄불] 이슬람과 기독교 한눈에 보며 차이 느껴

 

아시아~유럽 잇는 보스포루스대교도 볼거리조용헌 박사와 터키 일정 끝내

 

비잔티움(BC 7세기 그리스 식민도시)콘스탄티노플(3~4세기 로마의 속국)비잔티움(15세기 중반까지 동로마제국의 수도)오스만제국의 수도로 2,000년간의 유적을 고이 간직한 고대 도시, 이스탄불. ·서양 문명을 넘나들며 독특한 혼합문화를 만들어냈다. 다른 고대도시에서 볼 수 없는 문화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고, 그리스정교회와 이슬람이 겹쳐진다. 또 화려했던 비잔틴의 역사와 강력했던 오스만터키의 역사가 어우러진다.

 

(사진.왼쪽)이스탄불의 이슬람 문화로 대표되는 블루모스크가 보스포루스 바다에 비쳐 더욱 아름답게 빛이 난다. (사진.오른쪽)아시아(왼쪽)와 유럽 대륙을 잇는 보스포루스대교의 웅장한 모습. 다리 양쪽으로는 생활양식도 조금 다르다고 한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해협을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로 나뉘며, 기독교문화로 대표되는 성소피아성당과 이슬람문화로 대표되는 톱카피궁전과 블루모스크사원이 있다. 또 터키의 베르사유궁전으로 불리는 호화찬란한 돌마바흐체궁전, 실크로드의 시·종점이 되는 4,400여 개의 상점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미로를 이루고 있는 그랜드 바자르, 그리스 식민시절 건축된 거꾸로 돌려진 메두사의 머리를 볼 수 있는 예레바탄 지하저수지 등 고대에서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적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성 소피아성당에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그림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이러한 유적들은 동서양 문명, 또는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관전 포인트를 제공해 준다. 정교가 분리되지 않은, 신권과 정치권력을 동시에 가진 종교가 지배했던 중세까지는 정치·경제·문화·건축 등 모든 방면에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낸다. 이는 종교가 곧 권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미 우리 문화에 상당히 스며들었지만 이슬람은 다소 생소하다. 그 중요한 차이 중의 하나가 이슬람에서는 살아 있는 모든 동물을 우상화한다. 따라서 인간이 그리는 그림이나 벽화에 피사체로서 동물을 그릴 수 없다. 이스탄불에서는 그 차이를 그대로 볼 수 있다. 톱카피궁전이나 블루모스크사원 등 이슬람 건축물에 있는 그림이나 벽화의 피사체는 전부 식물이다. 그것도 균형과 대칭을 이루면서 안정을 꾀한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 그림양식의 대표적인 관전 포인트인 셈이다.

 

◀성 소피아성당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조그맣게 보인다.

 

카파도키아의 신비한 자연과 문화유적을 꼼꼼히 살펴본 뒤 드디어 이스탄불로 입성한다. 공항에서 내려 버스로 이동한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바다 위 거대한 대교 위로 차가 달리고 있다. 이 다리가 바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보스포루스대교(The Bridge of Bosporus Strait·일명 유라시아대교). 보스포루스해협은 지중해(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연결한다. 지금 그 위로 지나고 있다. 감개무량하다.

 

이곳에 처음 다리가 건설된 것은 1973년이다. 두 번째 다리는 1988년에 완공됐다. 이를 제2 보스포루스대교 혹은 파티하 술탄 메흐메드교라고도 한다. 1453년에 비잔틴을 정복했던 메흐메드 2세의 이름을 상징적으로 다리에 붙인 것이다. 3 대교는 2014년 착공해서 지금 한창 건설 중이다.

 

실크로드 시·종점에 있는 그랜드 바자르 시장

 

보스포루스해협(Borshorus Straits)의 폭이 가장 좁은 지역은 약 600m, 넓은 지역은 3km에 달한다고 한다. 한강보다 훨씬 폭이 넓다. 총 길이는 30km정도 된다. 평소에도 물살이 거칠고 빨라서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다고 한다.

 

보스포루스대교를 지나는 차량들이 평소에 너무 많아 차량정체는 심각한 수준이다. 불과 3km 남짓 되는 대교를 무려 10분가량 걸려 겨우 빠져 나와 왕실 가족이 살던 돌마바흐체궁전(Dolmabahce Palace)으로 향했다. 오스만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살았으며, 화려한 베르사유궁전을 본 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외쪽)이스탄불 최초 유럽 스타일로 건축한 돌마바흐체궁전의 웅장한 입구. 화려함의 진수를 보여 주지만 바다를 매립한 곳에 만들어, 적의 침입에는 노출돼 있다. (오른쪽)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과 황제는 돈주머니, 왕비는 두루마리를 기부하고 있는 모습이 성 소피아성당 벽화에 담겨 있다.

 

바다를 메워서 간척한 곳에 세워, 바로 바다로 통한다. 동양학자 조용헌 박사가 슬쩍 보고는 이 건물은 지형적 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고대 건축물과는 완전 다른 형태의 건물이라고 단정 짓는다. 19세기에 건립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바다 옆에 있어 외적의 침입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전략상으로도 볼품없는 건축물인 것이다. 돌마는 터키어로 꽉 찼다는 의미로, 해변이었던 자리를 메우고 정원을 조성했다고 해서 가득 찬 정원이란 의미의 돌마바흐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성 소피아 성당 내부에 있는 동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이 열렸던 장소. 이정표가 이를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화려함으로만 따지면 최고에 속한다. 술탄 압둘 메시드 2세는 1842년에서 1853년에 걸쳐 황금 35톤을 들여 이스탄불 최초로 유럽 스타일의 궁전을 건축했다. 내부는 샹들리에 36, 크리스털 촛대 58, 명화 60여 점, 시계 156, 화병 280여 개 등으로 장식돼 있다. 또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선물 받은 750개의 전구로 장식된 샹들리에가 황제의 방 천장에 매달려 있다. 한 번 쓱 둘러봐도 화려함의 진수를 보여 주는 건축물이 분명하다.

 

돌마바흐체궁전의 모든 시계는 95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터키 건국의 아버지인 케말 아타튀르크 초대 대통령의 사망(1938)을 애도하기 위해 그가 죽은 시각인 95분에 멈춰 있는 것이다.

 

영화 벤허에 나오는 장면을 유추해 볼 수 있었던 실제 전차경기장의 기둥 축이었던 오벨리스크를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다.

 

이어 실크로드가 끝나는 지점에 거대한 시장,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가 있다. 1444~1461년 즈음에 조성됐다고 한다. 현재 4,500여 개에 달하는 상점이 있지만 상점수보다 훨씬 많은 상품과 복잡한 통로로 유명하다. 20여 개의 출입구와 65곳에 달하는 통로가 상점과 상점을 연결한다. 유목민과 이슬람교도들에게 생활필수품인 양탄자, 성화, 도자기, 담배파이프, 고서적 등 거래되는 물건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중 특히 많은 것은 금이다. 반지에서부터 금괴까지 취급하는 상점이 수 백여 곳에 이른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세계 각지에서 온 방문객들이다.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깃든 장소일 뿐만 아니라 어떤 유적지와도 견줄 수 없는 생생한 삶의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이다.

 

이스탄불 최초의 유럽 스타일 궁전인 돌마바흐체

 

영화 벤허에 나오는 전차경기장을 둘러싼 기둥인 오벨리스크(Obelisk)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오벨리스크는 원래 이집트에서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이지만 이곳의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파라오 3세를 기리기 위해 건축했다. 4각의 뾰족탑의 높이가 무려 40m에 이른다. U자형의 전차경기장이 있었지만 오스만제국이 들어서면서 없애 버렸다.

 

성 소피아성당(Hagia Sophia Museum)도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비잔틴 콘스탄티누스 2세 때인 360년 그리스정교 건물로 건립됐으며, 오늘날 비잔틴미술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흔히 부르는 아야 소피아(Aya Sofia)’는 그리스어 발음을 차용해 부른 것이다. 아야 소피아는 성스러운 예지또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뜻으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성당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블루모스크의 웅장한 모습

 

원래 이곳은 그리스정교의 중심이었지만 오스만에게 정복 당해 오스만의 사원으로 사용하면서 이슬람사원이 됐다. 오스만터키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금요일 집단 예배용으로 맞춰 이슬람사원인 모스크로 개조하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슬람 양식의 벽화와 예수, 성모 마리아 벽화가 혼재해 있다. 모자이크화는 콘스탄티노플의 성상 파괴 이후 9세기 중반부터 그려진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 예수가 비잔틴 황제와 왕으로부터 인사를 받는 모습 등 기독교 관련 벽화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과거 동로마제국 황제가 대관식을 할 때 사용했던 장소도 그대로다. 1,000여 년 전 역사의 발자취가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조 박사는 모든 권력이 종교로부터 나온 시절의 역사적 흔적이라고 평가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고 있어, 정식 명칭은 아야 소피아박물관이다.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에 바실리카 시스턴(Basilica Cistern)’이라는 거대한 지하 저수지가 나온다. 원뜻은 땅에 가라앉은 궁전이다. 터키어로는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yi)’ 지하궁전은 현존하는 동로마제국의 저수지 가운데 최대라고 한다. 원래 황실 수도 공급을 위해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공사를 시작해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인 532년 완공됐다고 한다. 오스만제국 때 폐쇄된 것으로 1987년 수 백 년 동안 쌓인 진흙과 폐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벌이면서 복원됐다.

 

오늘날 이곳은 대성당처럼 336개의 둥근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천장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빛을 발산하는 지하실 형태로 되어 있다. 길이 140m, 70m, 깊이는 8m라고 한다. 아직도 물이 담겨 있어 방문객들에게는 대단한 볼거리다. 고인 물에는 잉어들이 이리저리 유영한다. 물고기는 1994년 이곳을 정비하면서 풀어놓았다고 한다.

 

지하 저장고 끝부분에 있는 메두사의 두상도 볼거리다. 하나는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있고, 다른 하나는 가로로 누운 상태였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두상들이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나를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 지하저수지를 한 바퀴 돌 때는 마치 이탈리아의 수상도시 베네치아에 온 듯하다. 물론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한 축이며, 세계유산에 등록돼 있다 

 

지하저수지인 바실리카 시스턴에 있는 메두사의 두상. 하나는 완전 거꾸로 놓여 있고, 다른 하나(오른쪽)는 옆으로 눕혀 있다.

 

이젠 오스만제국의 걸작품으로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Sultan Ahmed Mosque)라 불리는 최대 건축물로 향한다. 터키를 대표하는 사원이며, 사원의 내벽을 장식하는 타일의 기조가 청색이기 때문에 블루모스크(Blue Mosque)라 부른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9년 짓기 시작해서 1616년 완공했다. 우뚝 솟아 있는 첨탑 6개는 술탄의 권력을 상징하며, 이슬람교도가 지키는 15회의 기도를 뜻하기도 한다.

 

◀로마 시절인 532년 건축한 바실리카 시스턴이라는 거대한 지하저수지에는 마치 궁전 마냥 수많은 기둥이 있으며, 그 사이로 8m 깊이의 물이 흐르고 있다.

 

성 소피아성당은 비잔틴 미술의 최고봉

 

일정상 마지막 유적인 톱카피궁전(Topkapi Palace Museun)으로 입성이다. 술탄이 나랏일을 보고 생활했던 궁전이다.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 메흐메드 2세에 의해 1465년 지어져, 388년 동안 오스만제국의 정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톱카피박물관에 전시된 전시품들은 터키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왕관과 금관, 에메랄드와 사파이어로 장식된 칼과 장신구 등 전시품이 수없이 많다.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보고 나면 다리가 아플 지경이다. 이러한 화려한 전시품들은 이스탄불을 메카에 버금가는 이슬람교 성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마침내 모든 일정이 끝났다. 동서양 문명을 한자리에서 보면서 눈이 지나친 호사를 했다. 동양과 서양문명의 본질적 차이가 뭘까? 어렴풋이 뭔가가 머릿속에 다가오는 듯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명쾌하지 않다. 명쾌하게 다가오는 날, 훨씬 더 많은 역사적 사실과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가 될지 동서 문명의 차이를 조금 더 명쾌하고 명확하게 파헤치면서 설명할 수 있을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