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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실한 산벚꽃에 淸新할사 보곡산골

풍월 사선암 2015. 4. 26. 07:44

뭉실한 산벚꽃에 淸新할사 보곡산골

 

구멍가게도 없는 避亂 마을에 16년째 맞은 조붓한 산골 축제

담백한 꽃보다 新綠 현란하고 산길도 인심도 모난 구석 없어

느리고도 편안한 아름다움이 꽃대궐에서 봄 내내 이어지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산벚꽃은 화사하지 않고 해사하다. 아찔하고 나른하도록 화려한 게 아니라 맑고 깨끗하게 곱다랗다. 벚꽃이 화장한 도시 미인이라면 산벚꽃은 세수한 산골 처녀다. 질리는 농염(濃艶) 대신 상큼한 청신(淸新)이다. 사람이 심은 벚꽃은 졌어도 자연이 키운 산벚꽃은 한창이다. 뭉게구름처럼 솜사탕처럼 산허리 가득 피어올랐다.

 

지난 주말 충남 금산 보곡산골에 갔다. 봄 내내 산꽃 피고 지는 군북면 보광리·상곡리·산안리를 합친 이름이다. 면사무소 앞 이끼 낀 삼백오십 살 느티나무가 연둣빛 새잎을 눈부시게 매달았다. 거기서 열두 굽이 비들목재로 접어든다. 벚나무 늘어선 5길에 끝물 꽃잎이 날린다.

 

찻길은 산안리 자진뱅이에서 끝난다. 사방 서대산·대성산·신음산·국사봉에 에워싸여 떡시루처럼 옴팍하게 들어앉았다. 하도 외져서 6·25 때 피란 온 천안 전씨네가 처음 정착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자전리(自全里) 또는 자전배미였다가 자진뱅이가 됐다. 이름에서 빠르고 잦게 넘어가는 자진가락을 떠올린다. 하지만 스무 가구 남짓한 동네는 느리고 조용하다. 구멍가게 하나 없다. '이동 수퍼' 트럭이 확성기로 게으르게 주워섬긴다. "청국장 우유 두유 멸치젓 새우젓 콜라 세제."

 

이 두메에서 '비단고을 산꽃축제'가 열린 지 16년째다. 마을 사람들이 어디보다 많이 잘 자란 산벚꽃을 자랑하려고 시작했다. 금산(錦山)에서 따온 축제명보다 '보곡산골'이 더 친숙한 마을 잔치다. 이틀 축제에 모여드는 이가 1만명 채 안 된다.

 

그나마 더 한갓지게 걷고 싶어 축제 전날 찾아갔다. 마을 주변 산 중턱을 길게는 9도는 길 셋이 나 있다. 4짜리 '산꽃나라 건강 걷기'를 택했다. 인삼밭 곁으로 난 산길 어귀에 표지석이 서 있다. 거기 새긴 글에 미소 짓는다. '보곡산골은 종합병원이요, 당신의 두 다리는 의사입니다.'

 

지절대는 개울을 오른쪽에 두고 걷는다. 산길이 조붓해도 순하다. 산등성이 꼭대기 숲은 아직 잿빛 겨울이다. 거기 칠분 능선까지 하얀 산벚꽃이 치고 올라갔다. 한곳에 무더기로 살지 않는 산벚이어서 빈자리를 신록(新綠)이 메꿨다. 아기 손처럼 여린 잎을 합창하듯 내밀었다.

 

 

작은 보로 가둔 계곡물은 청록빛이다. 물가에 선 진달래 분홍이 유난히 진하다. 거기서 개울과 작별하고 산비탈 올라 숲으로 들어간다. 곳곳에서 키가 20m 넘는 산벚을 만난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꽃은 잘다. 꽃자루 두어 개가 모여 우산살처럼 벌어진 끝에 지름 3~4꽃이 달렸다. 하양 일색이 아니고 푸른빛이나 분홍빛 도는 꽃도 있다. 식물학자들이 살펴보니 산벚 품종이 일곱 가지나 자생하더란다.

 

꽃과 연록 잎이 함께 내민 산벚도 많다. 그래서 더 싱그럽다. 꽃 구경에 어지럽기는커녕 머리가 개운해진다. 향기가 없어 취할 일도 없다. 외려 꽃보다 신록이 찬란하다. 사철 숲에서 새잎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햇살을 뒤에서 받아 반투명으로 빛나며 생명의 기운을 뿜어낸다.

 

세 산책로가 모두 만나는 전망대 '보이네요 정자'에 다다랐다. 애교 있는 편액과 함께 서까래에 '볼 관()' 자가 붙었다. 발 뻗고 앉아 맞은편 마을 뒷산을 바라본다. 하얀 산벚꽃과 연두 신록 아래 푸른 솔숲까지 눈에 걸리적거리는 빛깔이 한 점도 없다. 까탈진 것 하나 없는 수채화다.

 

바람이 파도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땀이 식을 즈음 일어섰다. 내려가는 길은 능선을 탄다. 길섶 마른 풀 속에 양지꽃, 제비꽃이 숨었다. 현호색, 산괴불주머니에 청노루귀 하고 눈을 맞춘다. 다시 바람이 불어 와 벚꽃 비를 내린다.

 

점심을 먹으려고 마을 안 계곡가 천막에 앉았다. 아주머니 네댓이 서툰 장사를 한다. 주문받아 부엌으로 외쳐 알리면 서로 몇 번씩 확인하느라 웃음이 터진다. 축제 때야 먹을거리 장터가 서지만 다른 날엔 요기할 곳이 없어 봄 한 철 마을 부녀회가 꾸리는 식당이다. 4000원 하는 국수와 5000원 두부 한 모 시켰다. 내오면서 "둘 다 금방 식는 음식이라 얼른 드셔야 할 텐데" 걱정한다. 가족에게 상 차려내는 주부 마음이다.

 

국수는 멸치 향 옅고 간 삼삼하다. 투박한 두부엔 묵은 김치 곁들인다. 데친 대나물과 머위나물도 올랐다. 소찬(素饌)이어서 더 정겹다. 천막 앞길을 동네 어르신 두 분이 지팡이 짚고 지나간다. 아주머니가 얼른 나가 인사하며 "뭐 좀 드시고 가시라"고 붙잡는다.

 

보곡산골은 5월까지 꽃 피는 순서, '춘서(春序)' 따라 꽃대궐을 이룬다. 3월 초 생강나무가 연노랑 꽃으로 봄기운을 틔운다. 4월은 진달래 산벚꽃 조팝꽃으로 환하다. 5월엔 병꽃 산딸꽃 싸리꽃이 뒤를 잇는다. 금산읍보다 기온이 4도 낮아 봄은 더 길게 간다. 금산문화원 사무국장 안용산 시인 말대로 '산바람과 산새가 심고 키운 꽃 잔치'.

 

산벚꽃은 이제 내리막길에 들었지만 주말까지는 볼만할 것 같다. 우르르 피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고 지는 덕분이다. 설사 진다 해도 당장 다음 주부터 산 너머 신안리 조팝꽃 군락이 흐드러질 것이다. 무엇보다 신록 속을 걷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파스텔톤 봄 풍경에 눈 편하고 마음 푸근했다. 산길도 모질지 않고 너그럽다. 사람들 마음씨까지 모난 데 없다. 마음 달뜨게 하는 꽃을 원한다면, 천천히 걷는 게 싫다면 다른 곳을 찾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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