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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으로 본 서양문명(1) | 그리스(上)]

풍월 사선암 2015. 3. 25. 23:51

[동양학으로 본 서양문명(1) | 그리스()]

인간과 신이 공존하는 신화의 세계도 한국의 문명과 통했다

 

그리스 코린트~미케네 유적지에서 조용헌 박사와 함께 동서양 문명의 유사성 확인

 

역사는 보이는 사실에 대한 기록이고, 신화는 눈에 보이지 것에 대한 서술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신화가 사실로 확인된 것이 역사라고 나타낼 수 있다. 역사는 팩트(fact)지만 신화는 상상력과 창의성이다. 역사의 팩트는 단순하지만 신화의 상상력과 창의성은 무궁무진하다. 신화에 팩트까지 더하면 그럴듯하기까지 해진다. 이른바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팩션(Faction·fact+fiction,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새로운 장르)이다.

 

신과 인간이 한데 뒤엉켜 다투고,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이 뛰노는 형상을 역사와 신화는 각각 어떻게 설명할까? 인간과 신이 둘이 아니고, 사후(死後)와 현재를 오가는, 즉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며 전생과 현세가 공존하는 역사와 신화가 구분되지 않는 세계는 우리가 흔히 배우는 역사로는 해설이 불가능하다.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사후의 세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신화로는 무한한 설명이 가능하다. 

 

델피신전은 그리스신화에 올림푸스산만큼 자주 등장하는 파르나소스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앞산과 뒷산의 위치가 한국의 풍수에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절묘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역사와 신화에 대한 해설을 동양학으로 한 번 해보자. 동양학은 말 그대로 동양에 관한 연구를 하는 학문이다. 동양의 전반적인 사물에 관한 연구가 아니고 동양의 언어·문학·역사·종교·철학·학문·기예·풍속·관습·미술·음악 등 전반적인 문화에 관해서 연구를 한다. 동양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동양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핵심역할을 했던 샤머니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샤머니즘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샤먼이 중심이 된 주술적 행위나 종교 활동을 말한다. 샤먼은 무격(巫覡사제(司祭예언자에 해당한다. 신령의 대변자 또는 사령의 인도자 등으로 동서양에서 역할을 해왔다. 샤머니즘은 한국에서의 무속(巫俗)신앙을 의미한다.

 

동양에서 샤머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풍수나 사주, 한의학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풍수나 사주, 한의학을 통달한 샤먼들은 이를 고대사회 이래로 백성을 통치하는 주요 수단으로 삼았고, 하늘과 통하면서 사회를 안정시키는 기능을 해왔다.

 

그러면 서양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나 로마, 이집트, 터키 등을 동양학의 시각으로 보면 어떠할까? 아니 그리스 신화를 동양학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과연 동양학으로 본 고대 문명은 동서양 어떤 차이가 날까? 이에 서양문명의 발원지로 불리는 그리스를 한국의 대표적인 동양학자인 조용헌 박사가 직접 현지를 답사하며 풍수와 신화에 대해서 설명하는 기획을 시작한다.

 

그리스문명은 올림푸스산에서, 한국은 태백산에서

 

그리스문명의 발원지는 올림푸스산이다. 올림푸스산에서 모든 신이 나오고, 올림푸스산에는 무수히 많은 신들의 궁전이 있다. 무수히 많은 궁전 한가운데 큰 길이 하나 툭 트여 있다. 이 길은 밤중에도 인간의 눈에 보인다. 이 길의 이름이 바로 '비아 락테아(Via Lactea)', '젖의 길'이다. 비아 락테아는 영어로 '밀키웨이(Milky Way)'이며 우리말로 '은하수'가 된다. 은하수는 순우리말로 미르이며, 미르는 또한 신화적 동물인 용과 관련돼 있다. 신비스럽고 신화적인 부분에서 한국과 그리스, 아니 동서양의 유사점이 느껴진다.

 

올림푸스는 그 많은 신들로 인해 '천성(天城)'이라고도 불린다. 하늘의 성이라는 뜻이다. 올림푸스의 가장 큰 신인 제우스가 소집하면 모든 신들은 제우스신의 천궁에 모여야 한다. 올림푸스에 살고 있는 신들은 물론이고, 땅 위, 물 밑 신들까지 일제히 모였다. 애초의 그리스는 모든 것에 신이 있다고 믿었다.

 

우리 신화도 태백산에서 시작된다. 곰에서 환생한 인간이 환웅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단군이고, 그 단군이 1,000여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한다. 태백산은 지금도 성산으로 받들어져 많은 무속인들이 찾는다. 그 태백산이 지금의 태백산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여하튼 산에서 비롯된다.

 

고대 신화의 유사성, 아니 그리스와 한국의 출발신화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대 사회의 샤머니즘적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샤머니즘은 기본적으로 만신(萬神)사상이다. 모든 자연적 현상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 신화의 출발점이 샤머니즘이고, 신화에 나오는 인간과 구분이 없는 수많은 신들은 그리스적으로 환생했다고 볼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 태백산에서 인간으로 환생한 곰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 단군이 1,000여 년간 나라를 지배한 것은 한국적 신화에 해당한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이 있는 대리석 형상 많아

 

애당초 그리스인들은 한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자연현상의 원인이 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나무··풀을 지배하는 수많은 신들과 지방신들이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리스인의 신관(神觀)은 신인동태론(Anthropomorphism)에 근거해 있다. 이는 신과 인간은 외형과 속성에 있어서 전혀 차이가 없으나 다만 신은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과 다를 뿐이다. 신이 인간인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낳은 인간은 신이 되는 등 인간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관계가 맺어진다.

 

신화에 묘사된 신들은 난폭하거나 잔인하며 교활하거나 방탕하기도 한다. '이게 신인가' 할 정도로 신들이 추악한 모험과 불성실한 행동조차도 서슴지 않는다. 예를 들면 헤르메스는 도적의 신이고, 아프로디테는 농염한 교태를 부리고, 아레스는 잔인한 행동을 한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인간적인 신의 모습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그리스 신화를 바라보면 훨씬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로마군의 파괴와 지진으로 폐허가 된 코린트 도시가 잔해만 남아 과거의 영화를 말해 주고 있다.

 

그리스 첫 답사지는 아테네 국립 고고학박물관이다. 아마 그리스 유적을 시대별로 한 번 살펴보고 가라는 의미인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사진에서나 보던 대리석으로 된 그리스 유물들이 BC 7000년 전후 선사시대부터 청동기, 철기를 거쳐 고대에 이르기까지 휘황찬란하게 방문객을 맞이한다. 어느 것 하나 눈을 뗄 수 없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장면들이 전부 대리석으로 형상화돼 있다. 남자가 추파를 던지며 남녀가 뒤엉켜 노는 듯한 형상, 신들이 모여 축제를 벌이는 장면, 산 자 사이에 죽은 자가 앉아 울거나 같이 있고 싶어 하는 표정 등 우리와는 다른 듯하면서 전혀 낯설지 않은 장면들의 조각들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가이드는 "산 자 속에 죽은 자가 있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 산 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위로받기 위한 수단으로 죽은 자를 산 자 같이 등장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 박사도 "산 자의 허무감, 무상감, 슬픔감에 대한 표출을 대리석 조각에 그대로 남긴 것으로 보인다"고 확인했다. 이러한 인식이 그리스인들의 생활 속으로 그대로 스며들었다. 그리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지 않고 반드시 매장을 한다. 그것도 마을 바로 옆에 공동묘지를 둔다. 혐오시설이 아닌 놀이시설 같은 친근한 장소로 여기는 듯했다. 기독교가 정착하기 훨씬 전부터 그리스에서는 '부활'을 믿고 그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마을 옆 공동묘지에 묻힌 시신은 3년 뒤에 꺼내서 유골함에 넣어 영구보존하는 관습을 지니고 있다.

 

조 박사가 고대 그리스 병사의 대리석 조각상을 보며 의문을 제기한다.

 

"왜 병사가 왼발을 먼저 앞으로 내디디고 있습니까?"

 

가이드가 말을 머뭇거린다. 조 박사의 설명이 이어진다.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면 해가 떠오르는 동쪽이 왼쪽입니다. 왼쪽은 양입니다. 양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귀신은 음입니다. 그리스는 양기가 넘쳐나는 곳이라는 느낌을 곳곳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대리석과 석회석으로 된 악산(岳山)으로부터 영발(靈發)을 받고 바로 옆 지중해로부터 수기(水氣)를 받아, 불교로 치면 관음도량 성지 같은 곳입니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여수나 통영에 해당한다고나 할까요. 병사가 왼발을 먼저 내디디고 있는 것은 태양을 향하는 양기운을 의식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입니다."

 

하나의 동작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조 박사의 문명에 대한 원천적 의문을 하나씩 지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는 터가 전부 양명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낙천적이고 표정도 밝다"고 덧붙였다. 정말 사람들이 급하게 서두르는 법이 없다.

 

"한국의 샤먼 데려와도 반할 양기 넘치는 명당 많아"

 

한국의 동양학자가 서양문명의 기원인 그리스에 와서 족집게로 콕콕 집어서 문화를 설명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스는 전부 다 명당"이라는 표현을 수차례 반복했다. 조 박사도 상당히 감동 받은 것 같다. "한국의 샤먼들을 전부 그리스로 데려와서 답사시켜도, 이 사람들이 전부 푹 빠질 것 같은 분위기"라며 "마치 영발의 메카처럼 느껴진다"고 강조했다.

 

첫 감동을 뒤로한 채 수에즈·파나마운하와 함께 세계 3대 운하로 꼽히는 코린트운하(Gulf of Corinth)로 향했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 사이에 동서로 길게 운하를 만들어 배가 지나도록 만들었다. 길이가 6.3km에 달하고 너비가 25m에 이른다. 수심은 7m. 프랑스 자본으로 1882년부터 1893년까지 공사했다. 이 운하가 완공됨으로써 아테네의 외항 피레에프스와 이탈리아의 브린디시 사이의 항로를 320km 단축했다. 예로부터 이 운하를 만들 계획을 수차례 시도했으며, 로마 황제 네로도 6,000여 명의 유대인을 동원해 공사에 착수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 중에서 기둥 7개가 현재까지 비교적 보존이 잘 돼 있는 것이 코린트의 아폴론신전이다. 코린트가 어떤 도시인가. 코린트는 BC 6세기 중반까지 아테네 못지않게 상업과 무역도시로서 매우 번성했다.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리스 전 지역에서 세 번째로 꼽는 도시였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헬라스의 별'로 일컬을 정도였다. BC 146년쯤 로마에 의해 코린트는 철저히 파괴된다. 다시 재건하지만 529년쯤 지진과 1858년 지진으로 파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경 신약성서에 나오는 고린도전서가 코린트에 있었던 일들을 일부 전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한 주 무대가 이 도시인 것이다.

 

가이드는 고대 코린트 고고학박물관부터 안내한다. 코린트에서 어떤 유물들이 나왔고, 형태가 어떠했는지 장황하게 설명했다. 바로 옆에 코린트의 아폴론신전이 있다. 과거 영화를 대변하듯 웅장한 기둥이 신전에 세워져 있다. 가이드는 "기독교인들이 다신을 믿었던 그리스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신전에 있는 신들의 조각상에서 코를 깨버리거나 두상만 잘라내는 작업이었다"고 설명했다. 코를 깨거나 두상을 없애는 행위는 유일신인 기독교에서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저지르는 행위였다고 덧붙였다.

   

메테오라의 기이한 암벽 위에 세워진 수도원들은 '도대체 어떻게 지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코린트는 상업·무역도시로 번성한 만큼 매춘도 극성이었다고 전한다. 일반 여자들도 매춘을 했지만 여사제(女司祭)들도 매춘에 종사했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신전에 소속된 뛰어난 미모의 여사제들이 매춘을 했다니. 아마 아프로디테신전에 갖다 바칠 제물을 구입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여사제들이 공식적으로 매춘을 하지 않았는지 짐작할 뿐이다.

 

코린트의 아폴론신전 기둥은 우리나라 절에 있는 배흘림기둥과 모양이 비슷하다. 가운데가 제일 뚱뚱하게 균형감과 안정감을 주는 느낌이다. 신전 바로 옆에 우물이 있다. 조 박사는 "어디든지 신성한 곳 바로 옆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다. 물이 없는 곳에는 신전과 같은 신성한 제단은 절대 없다"고 설명했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 땅은 풍수적으로 재물이 모이는 명당이다. 본토와 반도를 이어주는 지협(地峽) 지점일 뿐 아니라 사람이 모이는 장소"라며 "도시가 번창할 수밖에 없는 위치"라고 강조했다.

 

"저 위에 산을 보십시오. 지기(地氣)가 강하게 올라오는 전형적 바위산(아크로코린트)입니다. 신전 옆에도 우물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던 광장에도 물이 있습니다(그 우물은 지금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지기와 수기(水氣)가 조화를 이룬 터에 신전이 있고 거주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불교 사찰 터와 비슷합니다."

 

아크로코린트 요새는 전형적인 한국의 산성

 

아폴론신전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크로코린트 언덕엔 아직도 요새 같은 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바위산 정상에 세워놓은 산성이자 신전 터였다. 전형적인 한국의 산성 모습이었다. 아크로코린트는 코린트 도시 일대에 지기를 공급해 주는 영산(靈山) 역할을 한다. 이곳에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살았다고 한다. 미의 여신이 있어 미모의 여사제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코린트의 아크로폴리스는 지진으로 파괴됐지만 과거의 영화를 엿볼 수 있도록 복원했다. 정말, 이런 건축물이 수천 년 전에 있었는가 할 정도로 완벽하다. 거주지, 감옥, 원형극장, 광장, 공동 우물, 공동 화장실 등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은 공동체다.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은 전부 구비돼 있다. 이 완벽한 도시가 로마에 의해 파괴되고, 지진에 붕괴됐으니 아쉬울 뿐이다. 코린트의 잔잔한 감동을 남긴 채 다음 목적지 미케네(Mycenae)로 향한다.

 

미케네에 들어서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두 개의 봉우리가 천혜의 요새처럼 미케네성을 완벽하게 에워싸고 있다. 왼쪽은 프로피티스 일리아스(Prophitis LLias 또는 아스피스)이고 오른쪽은 사라(Sara)산이다. 중간 계곡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짜기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활용한 요새 같은 석성은 적들이 도저히 침범할 수 없어 보인다. 아크로폴리스 성벽 둘레가 1km나 될 정도다. 성문은 서양에서 신성한 동물로 여기는 사자 두 마리가 마주보며 지키고 있다. 성 안에는 귀족들이 거주하며 목욕시설까지 구비한 완벽한 시설을 자랑했다.

 

이러한 시설이 BC 17~16세기에 건립됐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600~3700년 전이다. 비밀 수로를 만들어 외부에서 물을 끌어다 깊은 우물까지 만들어 저장했다. 외부에서는 찾을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시설이다. 수심이 18m나 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감동이고,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건물뿐이 아니다.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조 박사는 운을 뗀다.

 

"이런 지형을 군신동조열이라고 합니다. 신하의 예를 최대한 받들어 왕을 모시는 그런 명당입니다. 아크로폴리스 외부 북서쪽에 있는 '아트레우스의 보물(Treasury of Atreus)'이라 불리는 무덤은 트로이원정의 총지휘관으로 출전한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 것으로 전합니다. 이 무덤은 마치 아버지가 자손들이 있는 미케네성을 입구에서 지키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신라의 문무대왕이 바다에 묻혀 왜적이 침입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한국의 풍수 이상으로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배치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아가멤논의 무덤은 한국의 석굴암과 비슷

 

'아트레우스의 보물''아가멤논의 무덤(Tomb of Agamemnon)'이라고도 부른다. 무덤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의 왕릉보다 훨씬 더 크고 견고하다. 처음 발굴했을 때 이미 완전히 도굴돼 남은 유물들은 없었다고 한다. 우리의 불국사 석굴암 내부보다 면적은 더 크고 구조는 비슷하다. 아가멤논이 그의 아버지의 영혼을 위해 제대로 축성했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기원전 16세기에 만들어진 그 유명한 황금마스크가 바로 '아가멤논의 마스크(Mask of agamemnon)'. 이 황금마스크 하나만으로도 3,600~3,700년 전의 문화가 얼마나 화려했는지 단적으로 보여 준다. 정말 감동의 연속이다. 우리 문화와 똑같지는 않지만 가는 유적지마다 눈에 익은 듯한 모습이다.

  

아트레우스의 보물 또는 아가멤논의 무덤으로 불리는 유적지 입구에 많은 방문객들이 관람하고 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곧이어 방문한 요즘 시설로 치면 국립요양원 같은 유적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담한 숲속에 정신적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다. 정중앙에 원형극장이 있다. 정신요양원과 원형극장, 무슨 상관이 있을까? 숲 속에서 안정을 취하면서 말을 통해 쌓인 앙금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하는 현대식 치료법이 수천 년 전에 그리스에서는 이미 성행했다는 말이다. 이곳에도 예외 없이 신전(Temple of the god)과 원형신전 토로스(Tholos)가 있다. BC 300년대 건립된 것으로 지금은 잔재만 남아 있다. 출입통제 상태다.

 

조 박사가 말을 이었다.

 

"서양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말 잘하는 훈련을 통해 토론문화가 정착할 수 있었다고 보입니다. 반면 동양에서는 글 잘 쓰는 사람이 대접을 받았습니다. 선비들이 과묵한 이유죠. 이 국립요양원 자리도 명당입니다. 마치 압력밥솥같이 응집된 기를 받을 수 있는 절묘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도 여기서 한 며칠 묵었다 가면 좋을 듯합니다. 아마 이곳에서 물의 위치는 저 앞쪽에 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가보니 앞쪽엔 샘이 있었다. 정말 절묘하다. '이렇게 똑 같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며 소름이 돋는 기분이다.

 

원형극장의 앞쪽은 북향이다. 조 박사의 설명이 바로 이어진다.

 

"아마 공연은 주로 여름에 했을 터이고, 여름은 북향이 시원합니다. 숲 속의 시원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쌓인 앙금을 극장에서 말을 하며 풀면 어느 정신병자도 다 고칠 수 있었을 겁니다."

 

공연 시작과 끝은 신이 등장신에 순종적 의미

 

원형극장은 초장기엔 6,200여 명이 관람할 수 있었고, 그 이후 규모를 더 키워 12,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다고 한다. 지금 봐도 1만여 명은 앉을 수 있는 대형 극장이다. 모든 공연의 시작과 끝에는 신이 등장한다. 신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의미였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이것은 마치 신이 운명과 같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 순간 자연에 순종하고 하늘의 뜻에 맡기며 살아온 한국인의 DNA가 머리에 스치며 지나가는 건 왜일까? 그리스 유적지를 확인할수록 뒷머리가 솟는 느낌이다. 이렇게 똑같을 수 있나 싶다.

 

원형극장의 핵심시설은 나선형의 공연장에 있었다. 1만여 명이 둥글게 모여 공연을 지켜볼 때 공연하는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수많은 사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자연 에코시설이 돼 있었다. 실제로 공연장에서 작은 목소리는 제일 끝자리에 앉아 있어도 들릴 정도로 울려 퍼졌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조 박사의 설명은 또 이어진다.

 

"나선형으로 된 모형은 우주의 중심으로 나를 이끌어 병을 치유케 한다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부의 핵심건축은 나선형, 극장도 나선형은 다중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나선형 건축은 내향적 심리치유를 의미하고, 나선형 극장과 같은 시설은 외향적 치료를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 이 일대 건축물 입안자는 분명 이런 구상을 하고 건축했을 겁니다."

 

한국의 대표적 동양학자답게 가는 곳마다 족집게같이 콕콕 집어 설명했다. 참가자들은 모두 귀를 기울여 들었다.

 

절묘한 시설과 건축물이 과연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와 히포크라테스 같은 의학의 시조가 충분히 나올 만한 분위기였다.

 

그리스()에서는 코린트·미케네·에피다우로스 유적지만 둘러봐도 너무 많은 분량이 나온다. 정작 그리스의 핵심 유적지인 올림픽 성화 채화지인 올림피아, 세계의 배꼽이라 불리는 델피신전, 세계 10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메테오라, 세계문화유산 1호인 아테네신전 등은 소개하지도 못했다. 6월호에 더욱 재미있는 이야기와 함께 조 박사의 해박한 해설을 곁들여 안내하겠다.

 

에피다우로스에 있는, 요즘으로 치면 국립요양원 같은 건물인 원형극장. 요양하면서 심리치료를 병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스 유적지 일부를 돌아보면서 두 가지 사실을 크게 느꼈다. 첫째, BC 3000년경에 어떻게 이런 놀라운 건축물과 문화를 이룩했는지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둘째, 가는 유적지마다 낯설지 않은,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 고대사회는 정말 동서양의 문화가 차이가 없었구나 하는 느낌이다.

 

조 박사가 화려한 수사로 말을 받았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는 햇빛을 받아 더욱 명료해지고, 패자의 기록은 달빛을 받아 신화와 전설이 됩니다."

 

그 신화와 전설을 찾아 한국의 대표적인 동양학자가 그리스를 찾아 동서양 문화의 접점을 찾고 있다.

 

'그리스'는 언제부터, 어디서 유래했을까?

로마인들이 이탈리아 남부 그라이아인을 싸잡아 부른 데서 유래

 

그리스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왔을까? 현지에 가면 그리스라는 글자는 없고 대부분 헬라스(Hellas)라고 쓰여 있다. 도대체 그리스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더욱 궁금했다.

 

그리스라는 말의 어원은 그라이아(Graia). 이는 그리스인이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라 로마인이 붙여준 이름이다. BC 1000년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여러 지역으로 식민시를 건설했다. 그중 남부 이탈리아의 키메에 식민시를 건설한 사람들이 그리스 보이오티아에서 온 그라이아인들이었다. 최초로 그라이아인을 만난 로마인들은 다른 그리스인들을 싸잡아 그라이아인으로 불렀다. 이 과정에서 그레이시아(Greicia), 즉 그라이아인들의 나라라는 라틴어 표현이 나왔다. 남부 이탈리아에 그라이아인들이 퍼져 살던 지역을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icia, 대그리스)라고 부르게 됐다.

 

이처럼 그리스라는 말은 이탈리아 남부에 식민시를 건설한 그라이아인들을 부르던 로마인들의 용어였던 것이다. 오늘날 영어가 국제어라면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라틴어가 국제어였다. 결국 그리스라는 이름은 고대 국제어인 라틴어에서 현대의 국제어인 영어로 이어진 강력한 제국의 산물인 셈이다. 주도적인 문명은 모든 개념을 자신의 언어로 바꿔버린다. 고대사회에도 오늘날에도 그리스라는 말에는 제국주의의 힘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헬라스는 또 무슨 말인가? 그리스인들 스스로는 헬레네스(Hellenes, 단수는 Hellene)라고 불렀다. 그것은 헬렌(Hellen)의 후손이란 뜻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헬렌은 태고의 대홍수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들인 데우칼리온(Deucalion)과 피라(Pyrrha)의 맏아들이었다. 헬렌은 산의 님프인 오르세이스와 결혼해 세 아들 아이올로스, 크수토스, 도로스를 낳았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리스인의 세 종족인 아이올리스인, 이오니아인, 아카이아인의 시조가 됐다.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본토와 에게해의 섬들, 나아가 지중해 전 지역에 진출해 폴리스라는 작은 도시국가들을 세웠다. 이 그리스인들이 모여 사는 곳을 헬라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인들이 사는 땅이라는 의미다. 그들이 동방에 퍼트린 문화를 헬레니즘이라고 부른다.

 

월간산 | ·사진 박정원 부장대우 | 입력 2014.05.28 1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