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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바둑 세운 기타니, 藝의 구도자이자 한국의 은사

풍월 사선암 2015. 2. 22. 11:38

일본 바둑 세운 기타니, 의 구도자이자 한국의 은사

 

반상(盤上)의 향기 포석 개척자

 

1950년대 말 일본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의 해변을 차녀 기타니 레이코와 함께 산책하고 있는 기타니 미노루 9. 자택이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기타니는 젊은 날엔 투망을, 노년엔 해변 산책을 하루의 일과로 삼았다. 레이코도 바둑에 입문해 뒷날 프로 6단에 이르렀다. [사진 일본기원]

 

침울했다. 아니다. 1941년 히라쓰카(平塚)에 있는 기타니 미노루(木谷實·1909~75) 7단의 집은 마치 초상집 같았다. 우칭위안(吳淸源·1914~2014) 7단에게 치수(置數) 고치기 10번기(番棋)에서 14패로 몰리자 기타니는 삭발하고 6국에 임했건만 결과는 패배였다.

 

조남철(1923~2006)의 회고다. 조남철은 1937~44년 기타니의 내제자(內弟子)로 지냈다. 37년 기타니는 혼인보(本因坊) 슈사이(秀哉·1874~1940) 명인의 인퇴기(引退碁·은퇴 기념 대국)를 이겨 1인자로 올라섰다. 하지만 곧 이은 10번기에서 패배해 순식간에 추락했다.

 

기타니는 일어섰다. 일을 했다. 75년 그가 작고했을 때 우리는 그를 한국 바둑계의 은사로 불렀다. ()의 구도자로 불렸던 그는 한국과 일본 바둑을 일으킨 거인이었다.

 

바둑의 새로운 100년을 열다

 

1861년 일본 에도(江戶) 막부가 무너졌다. 막부에 기댔던 4대 바둑 가문도 몰락했다. 혼란스러웠다. 호엔샤(方圓社), 혼인보 가문 등 5~6개의 조직이 난립했다.

 

기타니는 1909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발소를 운영했다. 이발소는 동네 놀이터. 바둑도 있고 장기도 있다. 그곳에서 바둑을 깨쳤다. “구경하는 동안 우물 정() ()가 한 집이면 죽는 이치를 터득한 게, 다섯 살 무렵일까요.”

 

19189세 때 구보마쓰 가쓰키요(久保松勝喜代·1894~1941) 4단에게 입문했다. 구보마쓰는 관서(關西) 바둑계의 왕자였지만 21년 기타니를 도쿄의 스즈키 다메지로(鈴木<70BA><90CE>·1883~1960) 6단에게 맡겼다. “넓은 세상을 보라.”

 

24년 기타니는 입단했고 바둑계도 일본기원으로 통합됐다.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신문에서 주최한 신예 토너먼트에서 10연승, 원사(院社)대항전에서 8연승하는 등 놀라운 성적을 냈다. 가이도마루(怪童丸·최고로 강한 전투력)라 불렸다. “훌륭한 기사들과 바둑을 둔다는 그것만이 기뻤다.”

 

33년 그는 신슈(信州) 지고쿠다니(地獄谷)의 처갓집인 여관 고라쿠칸(後樂館·‘후락은 백성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거움은 백성보다 뒤에 한다는 뜻)으로 우칭위안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계곡은 유황 냄새 아득하고 청정한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곳에서 두 기사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바로 신포석(新布石)’이었다. 세력과 속도를 강조했다. 반상은 혁신되었고 바둑계는 들끓었다. 책 신포석법은 5만 권이나 팔렸다. 신포석은 이후의 100년을 열었다. 기보는 33년 기타니()가 사상 처음으로 3연성을 둔 바둑이다. 백은 마에다 노부아키(前田陳爾·1907~75).

 

그는 37년 명인 인퇴기(引退棋) 도전자 결정전에서 우승했다. 결승은 스승 구보마쓰와 두었는데 부담은 없다 했다. “막상 바둑판 앞에 앉으면 무념무상이니까요.” 스승의 시중을 들었고, 전후(戰後)에는 스승 유족을 자택에 모시고 보호를 다했다.

인퇴기를 이겼다. 1인자의 지위를 확립했다.

 

1933년부터 기타니 도장에서 사용하던 그릇들. 기타니 부인은 식량난이 심할 때엔 밭을 일궈 제자들을 뒷바라지했다.

 

기타니 제자가 숲 이룬 한·일 바둑계

 

37년 그는 히라쓰카로 이사했다. 도쿄에서 기차로 1시간30. 해변이었다. 밤에는 염불로 정신을 모았고 낮에는 투망으로 취미와 건강을 다졌다. 39~41. 그는 우칭위안과 가마쿠라(鎌倉) 여러 절을 다니면서 치수 고치기 10번기를 두었다. 소위 가마쿠라 10번기다. 1국 종반에 그는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고투했지만 15패로 치수가 고쳐졌다. 우칭위안에게 1인자 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명인 인퇴기부터 기풍을 세력에서 실리로 바꿨다. 전패를 기록하면서도 실험했다. 기풍을 바꾼다는 것은 인간이 두 번 태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우칭위안이 뒷날 말했다. “그는 신념에 찬 외로운 개척자였다.”

 

45년 일본기원은 B-29 공습으로 폐허가 됐고 그의 집도 잿더미로 변했다. 48년 일본기원과 함께 그도 집을 신축했다. 그는 제자를 다시 받아들였다.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73·전 일본기원 이사장) 9단 같은 준재들이 모여들었다.

 

혈압 높은 그에게 바둑은 위험했다. 54년 그는 마당에서 제자들과 탁구를 치고 쉬다가 쓰러졌다. 1년 반을 휴양했다. 그래도 57년 제2기 최고위전에서 37세의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1920~2010)를 누르고 우승했다. 48세로 9단 승단도 했다. 58년 최고위를 방어하고 60년엔 NHK 속기전도 우승했다. 63년 제18기 혼인보 리그전에서 졸도했다. 의사가 말렸다. 그래도 두었고 64년 명인전 리그전에서 또 졸도했다. 마침내 거목은 꺾였다.

   

기보 1933년 기타니()가 사상 처음으로 3연성을 두었다. 3연성은 세력 지향으로 흑7도 일관된 착점.

 

그는 정성을 다했다. 아홉 점 하수와 두어도 시간을 다 썼다. 바둑은 너무 진지하면 타이밍을 놓친다. 최고의 기전 혼인보를 46, 53, 59년 세 번 도전했지만 모두 패했다.

 

그의 마지막 바둑은 6823세의 혼다 구니히사(本田邦久·70) 7단과의 프로 10걸전 대국이었다. 10걸전은 참가기사 20명 중 16명을 팬들의 투표로 뽑는다. 그는 1700여 표로 14위였다. 팬들의 부름에 노구를 이끌고 나온 그에게 팬들은 감동했다.

 

62년 그는 도쿄 요쓰야(四谷)에도 도장을 개설했다. 그만큼 제자를 아낀 인물이 없었다. 김인 9단이 60년 일본기원에서 파격적으로 3단을 인허받을 때에도 그의 설득이 컸다. 인재는 키우면 나무가 되고 곧 숲을 이룬다.

 

20세기 100년 동안의 일본 바둑 뼈대는 셋이었다. 하나는 일본기원 설립으로, 시장경제와 잘 맞았다. 300년의 구습도 털어냈다. 다른 하나는 신포석의 창조로, 반상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 우리가 두는 바둑의 기초다. 그러곤 인재였다. 그것은 기타니 도장이 도맡아 했다.

 

오타케 히데오, 가토 마사오(加藤正夫·1947~2004),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67),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64),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63), 조치훈(59) 1970~90년대 최대 타이틀인 기성(棋聖명인·혼인보를 한손에 잡았던 인물들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오타케와 가토는 일본기원 이사장을 지냈다. 고바야시는 기타니의 차녀 기타니 레이코(木谷禮子·1939~96)와 결혼했다.

 

조남철(1923~2006), 김인(72), 윤기현(73), 하찬석(1948~2010) 1950~70년대 한국을 대표했던 기사들도 모두 그의 제자였다.

 

33년부터 제자를 받아들였다. 52녀를 두었지만 원래 아이들을 좋아했다. 평상시엔 20명 정도가 숙식했다. 3~4명의 여제자가 기타니의 부인 기타니 미하루(木谷美春·1910~91)의 식사 준비를 도왔다. 전중·전후 식량난 시대에 부인은 뜰에 호박과 감자를 심어가며 제자를 뒷바라지했다. 일주일 식사 메뉴를 정해 규칙적인 식사로 생활 리듬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하찬석 9단이 회고했다. “사모님이 세심하게 보살펴주고 문하생들도 친형제처럼 지내기에 분위기가 아주 좋다. 먹고 입는 것은 일체 도장에서 뒷바라지한다. 어쩌다 수입이라도 몇 푼 생기면 사모님께 드리고 용돈은 타서 쓴다. 술과 담배는 엄금되고 외출도 반드시 허락을 받는다.” 62년 김인 6단이 귀국할 때 기타니 여사는 저금통장을 안겨주었다.

 

스승은 제자와 단 세 판을 둔다. 입문과 입단, 타이틀을 딴다든가 독립할 때 각 한 판, 그것이 전통이다. 기타니는 묵묵히 제자들의 바둑을 몇 시간이고 지켜만 봤다. 바둑이 끝나면 아무런 말없이 자리를 떴다. 제자들의 자세가 바르게 될 수밖에 없었다.

 

선후배의 질서가 있었다. 이시다 9단은 타이틀을 따서 후배들에게 선물하는 게 나의 일이라고 말했다. 선배에게 뺏은 타이틀을 도장 후배들이 가져갈 때다. 일부러 져 주었겠느냐마는.

 

김인 귀국 때 통장 안겨준 사모님

 

다케미야 9단이 저단(低段) 시절 선배와의 대국에서 분쟁이 생겼다. 이 일이 알려지자 선생이 전화했다. “다케미야는 아직 젊으니 선배의 승리로 처리하라.” 다툼은 대부분 서로가 할 말이 있는 것이다.

 

문하생은 모두 60, 80년대 초엔 총 단위가 340~350단에 이르렀다. 90년대엔 500단을 넘었다. 조치훈이 626세 때 린하이펑(林海峰·73) 9단에게 5점으로 배웠던 것이 기타니 문하생 100단 돌파 기념회석상이었다.

 

824월 방한한 부인에게 기자가 물었다. “왜 그리 한국 제자에게 유독 정을 쏟았느냐.” 부인이 과거 양국의 어두운 역사를 생각하면 미안하면서도 가슴이 아프기 때문에 어느 제자들보다도 정성을 다하게 됐다며 눈물을 글썽여 참석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신라호텔 환영 리셉션에서 여사가 가져온 슬라이드를 상영했다. 조치훈의 어릴 적 성장과정을 담은 것이었다.

 

만년의 기타니는 차녀 레이코와 해변을 즐겨 거닐었다. 일본기원 공로상인 슈사이상(秀哉賞)이 기타니 내외에게 주어졌고 자수포장(紫綬<85F5>·예능 공로자에게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바둑계에서는 세고에와 스즈키 다음 세 번째였다.

 

75년 그가 영면했을 때 일본 바둑계는 일본기원장()으로 모셨다. 우칭위안이 추도했다. “선생은 나에게 있어 위대한 목표였다. 선생은 비상하게 바른 분이었으며 예()로 일관된 생애는 존경스러운 것이었다. 또한 그는 신념에 찬 외로운 개척자였으며 많은 천재들의 사부였다.”

해변이 가까운 선생 댁은 울창한 나무로 뒤덮인 일본식 단층 목조건물이었다. 공부방으로 쓰인 여러 개의 다다미방이 있었지만 74년엔 선생의 건강 때문에 문하생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시간이 흘렀다. 유족은 유물을 히라쓰카 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 하지만 목조건물과 울창한 정원은 남아 있어 찾아간 방문객에게 깊은 감회와 무상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중앙일보] 2015.02.22 /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