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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이 가진 심리적 강점과 효과

풍월 사선암 2015. 2. 20. 17:53

바둑만 두던 장그래가 어떻게?

 

바둑이 가진 심리적 강점과 효과

 

드라마 <미생> 예고편 중에서. 장그래는 입단을 꿈꾸다 좌절하고만 이른바 '한국기원 연구생 이무기'. 고졸 출신에다 바둑밖에 한 것이 없는 처지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무역회사 신입사원으로 거듭나는 인물이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미생(未生)’은 바둑을 모르던 사람에게도 관심을 많이 받았다. 드라마의 영향은 바둑용어인 미생의 뜻을 알게 했고, 바둑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사례를 종종 보았다. 내가 만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 물론 바둑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내가 연구생 경험이 있고 바둑을 둘 줄 안다는 이유로 미생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들, 특히 바둑인의 특성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한다.

 

드라마 미생은 연구생 출신인 주인공 장그래가 무역회사에 인턴으로 입사해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 입사할 무렵만해도 복사 하나 제대로 처리할 줄 몰랐던 주인공이다. 그런데 어떻게 수재들도 살아남기 힘들다고 하는 기업의 치열한 경쟁에서 버틸 수 있었을까. 이 과정을 지켜보는 극적 재미가 한층 극에 빠져들게 한 요소였는데, 분명한 건, 연구생 경험이 고비마다 큰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 주변사람들의 궁금증도 이 대목이다. 바둑만 공부한 사람이 정말 그럴 수 있느냐, 한갓 드라마의 설정으로 치부하려는 이도 있었다.

 

물론 사람의 능력에 따라, 가령 개인의 의지력이나 두뇌의 우수성 등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내가 아는 바둑인들의 사례를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답이다. 장그래가 혹독한 연구생 수업을 거치면서 (비록 입단은 하지 못했어도, 해서 바둑의 기예, 기술적인 면은 그다지 쓸모없어졌을지 모르나 기술력이 경기력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이 과정에서 쌓은 또다른 공부가 여러 상황에 대처하며 견딜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장그래는 바둑 테크닉만 익힌 게 아니다

 

필자가 박사학위 논문을 토대로 작성한 <바둑선수 심리적 강점의 개념 모형 구조화>(김병준 공동집필, 한국스포츠심리학회지, 2013, 4호에 게재)란 연구에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연구는 우수한 바둑선수의 심리적 강점에 대해 알아보고자 분석한 것인데,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학문적인 용어와 개념을 서술한 글이라 다소 딱딱하지만 요점만 추려본다.

 

첫째, 바둑 경기력과 밀접하게 관련된 심리적 강점은 의지력, 집중력, 자신감, 평정심의 4개 영역으로 나타났다.

 

둘째, 심리적 강점 중에서 의지력은 프로 입단을 준비하는 과정, 이 과정에서 끈기와 인내심 훈련을 통해 길러졌고, 집중력은 공부과정과 다양한 대국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다. 자신감은 성공경험이나 준비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형성되었으며, 대국 전 관리와 경기상황을 조절하는 노력을 통해 평정심이 만들어진다고 인식하였다.

 

셋째, 심리적 강점은 다음과 같은 점에 영향을 주었다.

평소 바둑 중심의 삶, 효율적인 생활을 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대국 전에는 방해요인을 차단하고 적절한 심리상태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대국 중에는 감정을 조절하고 현재 상황에서 최선을 찾도록 했다. 대국 후에는 상황분석이나 건설적인 대처를 하게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됐다.

 

넷째, 근거이론에 따른 심리적 강점의 개념 모형을 살펴보면, 우수 바둑선수의 심리적 강점은 목표설정이라는 인과적 조건, 고유특성과 동기의 형성이라는 맥락적 조건을 갖는다. 사회적 지지라는 중재적 조건의 영향으로 강화된 심리적 강점은 자기관리와도 상호작용하게 되며, 경기 수행의 자동화, 생활 기술로의 일반화로 이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드라마 '미생'(원작 윤태호, 극본 정윤정, 연출 김원석)의 촬영 현장에 카메오로 출연한 조훈현 9단과 유창혁 9단이 주인공 장그래의 소년시절 대역과 연기하는 장면.

 

바둑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분야보다도 좋은 편이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도 누군가 바둑을 취미 혹은 직업으로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과 대화를 해보기도 전에 머리가 좋고 남들과는 다른 고차원의 사고를 할 것이라고 여긴다. 최근 바둑의 효과()에 대한 다양한 학술연구가 이뤄지고 있지만 이전부터 사람들이 바둑의 효과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다.

 

바둑은 수학, 창의성, 문제해결력 등 다양한 세부 영역을 담고 있다. 한 판의 바둑을 두기 위해서는 바둑을 포함한 많은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하고, 상황을 제대로 인식해야 하며, 내가 아는 것을 상황에 맞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대국하는 상대 또는 대국내용에 따라 생각의 방향이나 강약을 조절하는 능력도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둑을 배우는 과정은 인생에서 알아야 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학구열이 유별한 강남의 어머니들 중에 어린 자녀에게 바둑을 권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바둑 덕에 자녀의 학교성적이 우수해졌다고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물론 바둑의 영향으로 학교성적이 좋아졌다는 의견과 애초 학교성적이 우수한 학생이기에 바둑을 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의견을 지지하건 바둑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내포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린시절 함께 도장에서 바둑을 배웠던 친구들은 프로기사로 활동하거나 장그래처럼 바둑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경우로 나뉜다. 후자의 경우, 어린시절 바둑을 배우다가 중학생 또는 고등학생이 되는 길목에서 바둑을 접고 학업으로 전향한 경우가 대다수인데, 낙오자란 선입견을 앞세워 이들이 무척 힘든 세월을 보낼 것으로 지레짐작하실지 모르나, 의외로 현재 자신의 진로에 만족하는 이가 많다. 어린시절 바둑공부에 매진한 기간을 무용했다 여기기보다는 학업을 위한 준비기간이었다 인식한다. 바둑을 두며 배운 바가, 나름 다진 바가 결코 소용없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바둑에서(모든 스포츠도 그러하겠지만 마인드스포츠인 바둑은 특히), 심리상태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대국 중의 심리상태는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 생활방식 또는 대국 전 어떠한 방식과 절차로 준비하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된다. 연구생(도장 생활)의 경험은 이들의 심리적인 부분에 다양한 영향을 끼친다. 연구생 리그전의 결과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성적을 내기 위한 노력이나 자기 절제 등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프로기사의 경우에는 수많은 승부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노력과 자기 통제가 필요하다. 상위 랭킹의 프로기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결과를 보면 이들은 심리적인 부분에 남다른 특징이 드러났다. 이러한 특징은 이들이 바둑을 배우기 시작하게 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고, 또 바둑을 배우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타이틀을 보유한 경험이 있는 기사들의 어린시절 모습을 보면 회복력, 대담함, 무던함 등의 낙천적 특성과 인내심과 끈기, 그리고 승부욕 등 승부에 필요한 고유 특성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특성은 각자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고 또 주변사람들의 평가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바둑에 다양한 기풍(棋風, 바둑을 두는 본인 고유의 방식)이 있듯이 정상급 기사들의 성격도 모두 다르다. 그렇지만 이들은 바둑을 두는 데 도움이 되는, 하나 이상의 심리적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 스스로 기억하거나 주변사람들의 얘기를 통해 들은 내용을 종합하면, 그들이 나름의 고집과 끈기를 가졌다는 걸 보여주는 내용이 많다. 어린 나이에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는 끝까지 밀고 나가는 집념, 또는 좌절이나 실패를 맞닥뜨렸을 때(크고작은 경험을 막론하고) 비교적 잘 회복하는 탄력적인 마음가짐 등이 있었다. 이는 오랜 기간 다양한 승부를 하는 데 장점으로 크게 작용한다.

 

정상급 기사들은 의지력, 집중력, 자신감, 평정심의 측면에서 강점을 보인다. 이러한 심리적 강점은 바둑을 배우는 출발점에서뿐 아니라 바둑을 배우는 과정 속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바둑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다양한 경험 속에서 강화되기도 한다. 대다수의 사람은 프로기사의 바둑을 관전하면서 대국 장면 또는 승부결과에 관심이 있어 미처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한 판의 대국이 두어지는 과정은 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부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바둑판에 첫수를 착점하기 이전에 거쳐온 많은 과정(평소 공부의 양, 대국에 임하는 마음가짐, 생활방식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이 한 판의 대국이요 기보다.

 

그렇기 때문에 바둑을 배운 시간은 바둑의 기술적 측면이 발전한 것에 추가적으로 달라지는 무언가가 더 존재한다. 무언가바둑의 효과와 상통한다.

 

혹 프로기사 오주성 2단을 기억하시는지? 오주성 2단은 200214세의 나이에 입단해 주목을 받았으나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한 채 어느날 대국장이나 기사실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5년 뒤 서울대 물리학과에 합격해 화제가 되었다. 정치학 박사인 문용직 5단이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현재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교수로 교편을 잡고 있는 남치형 초단이 일찍이 학문으로 전향한 바 있다. 이들이 거둔 성과에 주목하자는 게 아니다. 바둑만 파던 이들이 짧은 기간에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었던 저력, 바탕에 바둑이 발휘한 영향을 주목해 보자는 것이다.

 

바둑의 효과는 바둑을 배운 기간이나 대상에 따라 광범위한데 그 중에 내가 가장 관심 있는 두 가지만 꼽자면, 1)어린 나이에 바둑을 배워본 경험과 2)프로기사 수준으로 오랜 기간 바둑을 배운 경우이다.

 

먼저 어린 나이에 바둑을 배웠을 때, 이때 쌓은 경험이 다른 분야로 방향을 돌렸을 때 선행학습과 같은 효과를 주는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생이 되기 이전이나 이 시기에 바둑을 배운 학생이 수의 연산이나 공간 지각 능력, 학업 집중도 등이 뛰어나 높은 학업성취도를 보였다는 의견이 많고, 그 외에 여러 분야에서 바둑의 긍정적인 영향에 대한 사례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정적인 경기인 바둑과 달리 동적인 특징이 강한 분야에서도 바둑을 배운 경험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필자는 <축구 참여자가 인식한 바둑의 전이효과 탐색>(김병준 공동연구)이란 논문을 대한운동학회 운동학 학술지(2014년 제3)에 발표한 바 있는데, 축구를 하기 이전 바둑을 배워본 경험이 분석력, 이해력, 정신력의 측면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연구의 목적은 바둑의 전이효과에 대한 축구 참여자들의 인식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바둑실력을 가진 축구 참여자 5명을 대상자로 선별하여 바둑의 전이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축구 참여자가 인식한 바둑의 정적 전이 요소는 분석력, 이해력, 정신력에 대한 부분이고, 경기 전--후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은 차이가 있었다.

경기 전에는 전술에 대한 이해, 심상, 노력하는 정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았고, 경기 후에는 패배에 대한 인정, 경기를 분석하는 능력 등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경기 중에는 생각하는 플레이, 안목, 집중력, 승부욕, 끈기, 승부 감각, 합리적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했다. 바둑의 특징이 영역을 막론하고 사고(思考)하는 힘을 만들어준다. 다만 이들은 바둑의 부적 전이로 체력을 꼽았다. 축구지도자 입장에서는 선수들에게 바둑을 취미로 배우게 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얘기이고, 이는 다른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장기간 전문적으로 바둑을 연마한 선수들의 경우, 바둑의 전술과 전략적 측면 말고도 심리적인 훈련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훈련은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변수에 대한 마음가짐, 즉 대처로 나타난다. 가령 정상급 기사들의 경우, 어떤 문제나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순간적인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바둑을 두는 과정 중의 많은 경험들, 예를 들면 대국 전 준비를 하는 방식, 대국 중 실수를 했거나 불리한 국면에서의 대처, 대국 후 복기(復棋) 등의 상황을 다양하게 겪으면서 자신들이 변화된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주변에서 그들에 대한 평가도 바둑을 배운 이후 침착함이나 끈기 등이 더 좋아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바둑에서 배운 다양한 차원에서의 지식은 바둑 이외의 일상생활에서도 적절한 선택을 하게 되는 전이효과를 가져다준다.

 

일정 수준의 바둑실력은 축구를 하는 데 심리, 전술적 영역을 중심으로 정적 전이가 되는 부분이 많았고, 체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은 정적 전이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들이 인식한 바둑의 전이효과가 실제로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추가로 연구해야할 과제이지만, 바둑은 껍질을 벗길수록 색다른 속살이 드러나는 양파처럼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긍정적 효과를 끼치는 장점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한국바둑은 세계최강국으로 올라섰지만 이것만으로 바둑의 발전과 보급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세계를 제패한 김연아 선수가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한때 붐을 일으킬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자녀에게 스케이팅화를 신기지는 않는다. 필요성을 느껴야 가르치고 배우게 된다. 엘리트 중심의 육성책은 한계를 지닌 전략이다. 불과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오프라인 중심의 세상이었고, 요순시대부터 물려받은 바둑을 그대로 활용해도 무난히 명맥을 이을 수 있는 시대였다. 하지만 이제는 온라인 세상이 펼쳐졌고, 한해 한해가 확연히 달라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바둑이 더욱 광범위하게 퍼지고,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바둑실력을 독려하는 행위만으로는 어림없게 되었다. 바둑이 교육적 효능을 비롯해 다양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거, 이거 얼마나 큰 축복이고 한편 다행스런 일인가.

 

사이버오로 [칼럼] 김세영 2015-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