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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훈 9단에 대한 단상

풍월 사선암 2015. 8. 20. 00:13

조치훈 9단에 대한 단상

안에서 살기 어려웠다...

 

전설의 귀환’. 한국현대바둑 70년을 맞아 조치훈 명인을 초청해 조훈현 국수와 기념대국을 선보이고 국후 현장인터뷰까지 전 과정을 바둑TV로 방영한 것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감동적이었다. TV를 직접 볼 수 없었던 사람들도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이 역사적인 이벤트를 접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 두 바둑 영웅의 1980년 말에 벌였던 두 번의 기념대국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조치훈의 말대로 35년이란 연륜이 쌓여서인가. 인격이 더욱 성숙해 졌다고 본다. “(나이가 들어서) 바둑이 약해지니까 사람이 더 훌륭해졌어요. 다음에는 훌륭한 조치훈. (이렇게 써 주세요)”라고 말해 웃음바다를 이뤘다. 한국에서 계속 살아 그 나이에 이른 사람이 스스로 훌륭하다고 표현하면 건방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어에 어눌해 더 좋은 뉘앙스의 말을 찾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보아서인지 전혀 거부감이 없이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라는 단어를 얼른 떠올리지 못해 머리 빗는 시늉을 먼저 하면서 그 단어를 찾아내는 것도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고, 타이틀전 상금이 매우 큰 일본에서 가장 많은 타이틀을 따서 부자가 된 그가 빗을 살 돈이 없어서 머리가 헝클어졌다는 위트 있는 대답을 하는 것도 배꼽을 잡게 했다.

 

필자는 또한 730일자 중앙일보에 정아람 기자가 쓴 글을 읽고 가슴이 찡했다. 40년 동안 함께 살아온 아내가 요즈음 암 투병 중이어서 집에서 간병하느라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 "인생은 너무 짧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 죽기 전에 꼭 한번 한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인간적인, 우리가 미처 접할 수 없었던 승부사의 또다른 단면을 보았을 때 가슴이 아렸다.

 

빗질하지 않은 조치훈의 헤어스타일은 아인슈타인을 상기시킨다.

 

소년 조치훈과 조남철 선생, 그리고 바둑에 관한 내 기억들

 

내가 신문에서 바둑소식을 읽고 가장 생생하게, 첫번째로 기억한 기사(棋士)가 바둑신동 조치훈이 일본에 바둑을 배우러 간다는 기사(記事)였다 꼬마 조치훈이 상변에 바둑돌을 놓으려고 하면 앉은 채로는 손이 닿지 않아서 엉거주춤 일어나서 돌을 놓는다는 얘기를 읽었을 때 이처럼 작은 꼬마가 바둑을 잘 둔다는 것이 참 신기하게 여겨졌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바둑을 두지 않았는데, 바둑이 생소했던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두 삼촌이 바둑을 좋아하셨고, 어렸을 적 우리집 사랑방에도 바둑판 한 벌이 있었다. 농사가 바쁘지 않은 때 할아버지께서 마실 가셔서 바둑을 두시면 진지 잡수실 때가 되었다고 전하는 심부름은 만 세살 무렵부터 내 몫이었다.

 

이처럼 바둑이 낯설지 않은데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바둑을 배우지 않은(못한?) 것은 이른 나이에 바둑을 배우면 공부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신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후에 바둑에 재미를 붙이자 바둑의 대부라는 조남철 선생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여서 나는 명동에 있는 송원기원을 찾아갔다. 그 시절에는 한국기원 회관이 따로 있지 않아서 송원기원 사무실이 한국기원 사무실 역할을 했었고, 입단대회도 송원기원에서 열렸었다.

 

2층에 다다미가 깔려있는 큰 방에 난로가 놓여 있었는데, 날씨가 춥지 않았고 난로에 불이 붙여져 있지 않았었으므로 아마 19634월쯤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략 50대로 보이는 두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었고 그 옆에서 두세 명이 관전하고 있었다. 바둑판 앞에는 백원짜리 지폐가 몇 장씩 있었다. 한참이 지나자 창문 옆에 앉아서 관전하던 사람이 조남철 사범 오신다라고 말하자 바둑 두던 사람들이 놓여있던 지폐를 얼른 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조남철 선생이 안녕들 하십니까?”하면서 방으로 들어서자 , 사범님,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말이 오갔다. 간단한 대화 후에 조남철 선생은 사무실로 들어가셨고 바둑 두던 사람들은 대국을 계속했다. 조남철 선생이 바둑이 한갓 잡기나 도박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을 그때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까지 돈을 걸고 바둑을 둔 적이 없다.

 

한국바둑의 자긍심을 세워준 1980년의 조치훈

 

조치훈이 1980년에 오타케 명인에게 도전하여 411무의 전적으로 명인 타이틀을 쟁취한 것은 굉장한 사건이었다. “명인이 되지 않고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각오할 만큼 명인은 조치훈의 일생일대의 목표였는데 그 목표를 달성했다.

 

조치훈이 명인이 된 것은 그 자신의 성취일 뿐 아니라 한국 바둑인들의 긍지를 높이는 사건이었다. 한국바둑이 일본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던 그 때에 한국인이 일본바둑의 제일인자가 되었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한국바둑의 대부인 조남철 선생이 일본의 후지사와나 사카다에게 정선으로 바둑을 두었고, 박치문 기자의 표현을 빌자면 조남철 선생은 일본의 고수들보다 한 수 아래인 자신이 9단이 되는 것은 불경이라고 여길 정도였다고 했으니. 이것은 한국 바둑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는데, 한국인인 조치훈이 일본바둑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되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었겠는가.

 

1980년 조치훈 8(당시)은 명인 오타케에게 도전하여 411무의 전적으로 꿈에 그리던 명인 타이틀을 땄다. 단순한 명인 타이틀 하나를 차지한 게 아니라 일본바둑계를 정복한 것이었고, 조국 국민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드높이 쾌거였다. 한국바둑사에 이토록 인상 깊었던 날이 있었을까.

 

당시 나는 샌디에고에서 University of California at San Diego에 재직하면서 여가활동으로 아생기우회라는 바둑클럽을 조직하여 운영하였는데, 클럽회원들이 모일 때나 다른 곳에서 바둑 두는 사람들이 모일 때에는 조치훈의 명인전 도전기가 화제의 중심이었다.

 

조치훈이 일본에서 명인 도전자가 되었을 때부터 도전기가 진행되고 드디어 명인이 된 과정은 일간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명인을 획득하고 귀국하여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바둑붐을 크게 일으킨 첫 번째 사건이었다. 두 번째가 1989년에 조훈현이 응씨배 결승에서 녜웨이핑 9단을 32패로 무찌르고 바둑 황제로 등극한 사건이었다. 세 번째는 19921월에 만 16세의 바둑신동 이창호가 임해봉(린 하이펑) 9단을 32패로 이겨서 동양증권배 타이틀을 획득한 것이었다.

 

1980~85년의 조치훈

 

조치훈이 1980년에 명인 타이틀을 딴 다음에 각 기전에서 활약한 내역을 <1>에 적었다. 그는 다음해에 명인 타이틀을 방어했고, 다케미야에게 도전하여 본인방 타이틀을 따서 명인과 본인방 타이틀을 동시에 보유한 4번째 기사가 되었다. 다음 1982년에는 이 두 타이틀을 지켰을 뿐 아니라 십단과 학성 타이틀을 추가해서 4관왕에 올랐다.

 

<1> 조치훈의 주요 타이틀 보유 상황(1980-85)

 

1983년은 정점이었다. 랭킹1위 기성(棋聖) 타이틀을 1회부터 6회까지 보유한 후지사와 슈코에게 도전하여 3판을 내리 졌다가 나머지 4판을 연거푸 이겨서 기성, 명인, 본인방의 3대 타이틀을 동시에 보유하는 대삼관의 업적을 이룬 첫 기사가 되었다. 게다가 3연패 후 4연승이라는 드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본인방에 도전한 임해봉에게 도전기 마지막 판을 727일에 패배함으로써 대삼관 칭호는 4개월 남짓으로 끝났다. 1984년에는 다시 기성에 도전해 온 임해봉을 물리쳤고, 명인에 3년째 줄기차게 도전해 온 오타케를 물리치고 방어했다.

 

안에서 살기가 어려웠다

 

조치훈은 1985년에 9기 기성전에서 다케미야 마사키의 도전을 받았다. 일본기원과 요미우리신문은 기성전 도전1국을 조치훈의 고국에서 가지기로 합의하여 116일에 소공동의 롯데호텔에서 대국을 시작하였다. 이 때에 입회인으로 사카다 에이오, 해설자로 고바야시 고이치가 같이 와서 이름만으로 위용을 갖춘 바둑 행사였다. 그리고 르포작가 사와키 고타로가 동행했다.

 

 

기성전 도전1(1985117,18) 1

: 조치훈 기성 VS : 다케미야 마사키 9

 

56수까지의 바둑은 두 사람의 기풍대로 전개되었다. 흑을 쥔 조치훈은 좌상귀에서 좌하귀에 이르는 19로 장통의 큰 실리를 얻었고, 우상귀와 우하귀에 확실한 근거를 마련하였다. 대신에 우주류의 다케미야는 중앙에 대세력을 확보하였다.

 

57로 젖혔을 때에 백58로 막았고, 흑이 59로 이단젖힘을 하자 백이 60으로 우지끈 끊어버렸다. 웅대한 백세력 안에 이렇게 고립된 흑돌들이 어떻게 사느냐가 이 바둑의 초점이 되었다.

 

조치훈 다케미야 제2(65-78)

 

65 이하 흑77까지 진행되었을 때에 백78이 매우 날카롭다.

 

 3124(세모표) 때의 상황

 

79 이하 간난신고 끝에 흑대마는 백돌 두 점을 잡고 살아갔다. 과연 타개의 조치훈이었다. 하지만 백은 흑을 공격함으로써 중앙과 우변에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여 바둑의 형세는 여전히 팽팽했다.

 

대국후 인터뷰에서 조치훈은 안에서 살기가 어려웠다고 말하였는데, 고립된 흑대마가 백의 세력권 안에서 살기가 어려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르포작가 사와키 고타로는 조치훈의 이 말을 여섯 살에 낯선 이국에 와서 일본 안에서 적응해 살기가 어려웠다는 뜻을 함축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오래 살아온 그가 조국인 한국도 그만 낯선 땅이 되어 한국 안에서 (적응해) 살기가 어려울것이라고 중의적으로 해석, 조치훈이 처한 상황을 절묘하게 설명하였다. 이후 안에서 살기가 어렵다는 말이 유명해 졌다. 이것은 그가 마차는 달린다라는 수필에서 썼는데, 사이버오로의 손종수 상무가 이 수필을 소개하여 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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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2, 서울에서 열린 조치훈 기성과 도전자 다케미야의 기성전 도전1국 시작 모습. 조치훈 기성이 고국에서 벌인 방어전이기도 했지만 일본기전사상 처음으로 해외에서 연 도전기로도 큰 관심을 모았다.

 

조치훈이 18세 때인 1975년 초에 당시 55세의 거장인 사카다에게 일본기원선수권전 결승에서 두 판을 이기고 세 번을 연거푸 져서 타이틀 획득에 실패한 바 있다. 이 때에 르포작가 고타로는 조치훈을 인터뷰하러 만났으나 조치훈이 속마음을 닫아두어서 무언가 막혀 있는 느낌을 받았는데, “내가 명인이 된 다음에 당신의 인터뷰에 진지하게 응하겠다말하였다고 한다. 그는 아무나 명인이 되나?”라는 생각을 했고, 그저 자신의 인터뷰에 진지하게 응하지 않은 변명으로 여겼다. 고타로는 바둑을 잘 모르지만 한국에서 온 승부사 조치훈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이때 인터뷰를 거절 당한 후 접고 있었다. 그런데 조치훈이 명인이 되자 잊지 않고 연락해 인터뷰에 응할 생각이 있다고 말하면서 둘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1985년 기성전 도전1국에 동행한 것이다.

 

고타로는 조치훈이 한국에서 더 열렬한 지지를 받는 바둑영웅이어야 마땅한데, 그렇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1980년 말과 다음해 초에 걸친 조치훈의 1차 조국 방문 때의 일을 상기하면서 그 의문을 해석하였다. 그때 조훈현과 조치훈의 기념대국 첫판에서 조치훈이 승리하자 한국기원의 한 관계자가 조상연에게 와서 (다음 대국은 돌을 쥐어서 누가 흑번이 될 것인가를 정하지만) 조훈현이 흑번이 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 판은 속기였으므로 조훈현이 흑을 쥐면 더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

 

물론 이런 사정을 조훈현은 모르고 있었지만, 대국 전 이 말은 조치훈에게 전달되었고, 조치훈은 내가 지기를 그렇게 바라나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렇다면 한번 붙어보자하고 반드시 이기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는 일화를 고타로가 전하였다.

 

고타로는 한국인들이 기사를 응원하는 열기가 일본과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였다. 조치훈이 일본기사와 대국하면 조치훈을 더 열렬히 응원하지만, 조치훈이 조훈현과 대국하게 되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조훈현을 더 열렬하게 응원하고, 서봉수와 조훈현이 대국하게 되면 순 한국바둑인 서봉수를 일본에서 바둑을 배워온 조훈현보다 더 열렬히 응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치훈이 일본에서 부와 명예와 아내와 가족 등 모든 것을 얻었지만, 이방 땅 일본 안에서 살기가 어려웠고반면에 여섯 살 때 타의에 의해 떠난 조국에서는 일본에서 오래 살아온 그를 한국말을 잘 못한다느니 일본여자와 결혼했느니 하는 비합리적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한국 안에서 살기가 어렵다는 뜻도 가진 것으로 조치훈의 말을 해석하였다. 조치훈이 일본에서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이 말한 “marginal man”(주변인)이 된 처지를 잘 설명하는 말이 되었다.

 

소년 조치훈의 일본에서의 삶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자살할 생각으로 길을 떠났다가 죽을 것이 아니라 죽을 각오로 바둑을 두면 길이 열리지 않을까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라는 조치훈의 대국자세가가 탄생한 것이다.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두는 조치훈에게 상대의 거대한 세력 속에서 자신의 대마의 생사를 걸고 바둑을 두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상대방의 대세력 안에 들어가서 그것을 깨고 사는 일을 수없이 하였기에 상대방 세력을 깨는 폭파 전문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 일본 안에서 살기가 어려웠던 그의 인생의 경험은 안에서 살기 어려운상대의 세력 안에 뛰어드는 바둑을 둘 수 있게 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사와키 고타로가 안에서 살기가 어려웠다는 조치훈의 말을 함축적으로 해석한 것이 결코 자의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조치훈을 키운 형 조상연에 대해

 

조치훈의 오늘이 있게 한 데는 그의 형 조상연 7단의 공이 지대하다. 조상연(19411124일생)은 당시의 기준으로는 이른 나이인 1956년 만 14세에 입단하였다. 비슷한 나이의 강철민(39년생)과 김인(43년생)58년에 입단했고, 윤기현(42년생)59년에 입단했다. 뒤를 이어 이창세(40년생)60년에, 정창현(38년생)61년에 입단한 것과 비교하면 조상연과 김인이 제일 어린 나이에 입단하였다.

 

당시 1920년대 이전에 출생한 민영현, 김봉선, 김명환 사범들이 조남철 선생의 경쟁자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어린 나이에 입단한 새싹들에게 기대할 수 밖에 없었는데, 1961년 만 19세인 조상연이 가장 먼저 제2회 최고위전에서 도전자가 되어 숙부와 마주하였다. 결과는 숙부인 조남철 선생의 3연승으로 끝났지만, 조카를 마주 대하는 조남철 선생은 거북하였을 것이다.

 

조상연과 조치훈의 부친인 조남석(1920~1991) 선생은 당신의 아들이 일방적으로 패퇴한 것이 불만스러웠는지 그 해에 조상연을 일본으로 보냈다. 조상연은 기타니 문하에 들어갔고, 2년 후인 1963년에 일본기원 2단을 받았다. 형의 권유로 1962년에 조치훈이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리타 공항에서 꼬마 조치훈과 형 조상연(오른쪽)과 일본 유학중이던 청년 김인. 낯선 이국에서 조상연은 조치훈에게 부모 같은 형이었으며 뒤를 돌봐주는 그림자 같은 매니저였다. 조치훈을 키운 건 8할이 형 상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생 치훈이 일본에 간 후에 형인 조상연은 본인의 바둑공부보다 기재가 뛰어난 동생의 뒷바라지를 우선순위로 삼았다. 부모를 떠난 어린 조치훈이 기댈 수 있고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해온 형이 있었기에 오늘의 조치훈이 있을 수 있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조상연은 한국기원의 기사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86년에 그는 한국기원의 기사직에서 제명 당하였다. 이유는 조치훈이 명인이 된 후 한국에서의 인기를 이용하여 [월간 바둑세계]를 출판하여 (한국기원에서 발행하는 [월간 바둑]과 경쟁하여) 한국기원에 경제적 손실을 입혔다는 것이었다.

 

조상연은 2007년 경에 자신의 기사직을 복직시켜 줄 것을 한국기원에 탄원하였다. 그의 기사직이 복직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현 한국기원 부총재인 박치문 기자도 그런 의견을 피력하였다.

 

조상연씨의 바람대로 한국기원이 그를 복권시켜 명예를 회복해 주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이다. 24년은 어떤 잘못도 녹일 만한 긴 세월이다. 더구나 조상연씨의 제명 사유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거기에 덧붙여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형의 복권으로 조치훈 9단의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스산한 응어리를 풀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중앙일보 201042)”

 

한국 현대바둑 70, 포용하고 화해하는 해가 되었으면

 

이제 한국바둑 70년주년을 맞이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던 미국과 베트남이 오래 전에 국교를 맺었고, “한국군이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용병이라고 비난하던 한국과도 국교를 맺은 지 오래다. 이강욱 사범이 바둑 보급하러 베트남에 갔을 때 그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제 30년이 되어 가는 옛 일을 잊고 화해할 때도 되었다. 그리고 조상연이 바둑 월간지를 출판해서 한국기원에 끼쳤다는 경제적 손실은, 그가 조치훈이 바둑 고수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 결과적으로 한국바둑 발전에 끼친 공적에 비하면 백분의 일도 안 되는 미미한 것이다.

 

반면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는 처절한 심정으로 어려운 시절을 극복해 나갈 때에 한국기원이 그를 위해서 해 준 것은 별로 없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조치훈이 한국의 바둑발전에 공헌한 것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월간 바둑] 20158월호의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 조치훈, 대삼관 달성이라는 글에서 이광구는 한국 바둑 중흥과 도약의 일등공신은 누구일까. 그런 걸 따지는 건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편협한 일이다. 공신이 어디 한둘일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조치훈이다. 비극적 영웅의 실루엣, 그 주인공 조치훈이다.”라는 말로 맺었다. 이번 전설의 귀환이라는 행사에도 조치훈은 흔쾌히 참석하여 한국의 바둑팬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말하는 기회로 삼은 것도 높이 평가할만하다.

 

단 하나 남은 조치훈의 육친인 형을 명예 회복시켜서 죽기 전에 한국에서 한번 살고 싶다는 조치훈 명인의 애틋한 소원을 이루게 한국 안에서 살기가 어렵다가 아니라 안에서 살기가 편하게해주는 것이 한국기원의 도리라고 본다. 조상연의 기사직을 회복시킬 뿐 아니라 일본기원에서 퇴직할 때에 받은 7단을 인정해 주는 것도 순리라고 본다.

 

지난 2010년에 조상연의 복직 문제를 기사회에서 투표했을 때에 젊은 기사들이 많이 기권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이라면 젊은 기사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조상연의 제명사건 이후에 태어났거나 그 때에 철부지였던 80년 이후에 출생한 기사들이 역사의식을 가지고 앞장서기를 당부한다. 이제 한국기원은 80년 이후에 출생한 기사들이, 18세가 넘은 인원만 따져도 기사회의 절대 다수가 된다. 이 젊은 기사들이 나는 잘 모르는 과거의 일이라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고 역사의식과 패기를 가지고 이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하기를 당부하고 싶다. 젊은 기사들이 목소리 높은 고참 기사들에게 주눅이 들어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한국바둑계가 개혁되고 발전할 수 있겠는가?

 

배태일 2015-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