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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43):정조(下)

풍월 사선암 2014. 11. 28. 00:02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43):정조()

 

진료기록으로 분석한 정조 독살설의 진실

 

정조는 심한 종기로 치료받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종기가 생긴 것이나 패혈증으로 악화된 데는 과로가 큰 원인이었지만 독살 의혹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종기는 42세에도 생겼는데, 잘 낫지 않자 민간에서 피재길(종기 전문의, 고약 치료)이라는 의원을 불러 치료받기도 했습니다. 49세에는 허리에 작은 종기가 생겨 고약을 발랐으나 화농이 심해지고 피고름을 짜내느라 극심한 통증을 참아야 했는데, 종기가 등으로 번지고 목뒤의 머리까지 번져서 아픔 때문에 누울 수도 없고 기운이 쇠한 탓에 일어설 수도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종기가 얼마나 심했기에 죽음에까지 이르렀나?

 

고름이 나오고 등골뼈 아래쪽부터 목뒤 머리카락이 난 곳까지 여기저기 부어올랐는데, 크기가 어떤 것은 연적(硯滴)만큼이나 크며 병이 오래되어 원기가 점점 약해진다고 했습니다. 종기 부위가 당기고 아프며 입맛이 없고 열기가 오르는 증상이 심해졌고, 연신 고름을 짜내고 고약을 바르고 침을 맞고 여러가지 탕약을 마셨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편, 정조가 친필로 쓴 비밀편지인 어찰(御札)’ 299통이 지난 2009년에 처음 공개되었는데, 자신의 질병에 대한 얘기도 들어 있습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 고전번역원 번역대학원이 지난 200929일 정조가 자신과 대립각을 세운 인물로 알려진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비밀편지 299통을 공개했다.

 

정조의 어찰에 쓰인 내용은?

 

어찰은 당시 정조의 반대세력의 중심에 있던 우의정 심환지에게 보낸 것인데, 심환지는 노론 강경파인 벽파(僻派)의 영수로서 정조를 독살한 배후로 지목되고 있기 때문이죠. 특히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그 때 심환지는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심환지와 수많은 비밀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정조가 독살된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습니다.

 

비밀편지에서 정조는 자신의 병세를 여러 차례 전했으며, 사망하기 13일 전인 1800615일에는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항상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열을 내리는 황련(黃連)’이라는 한약재를 몇 근이나 먹었는지 모른다고 호소했던 내용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처럼 자신의 병세를 자세하게 얘기할 정도로 가까웠던 사이인 심환지가 독살을 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죠.

 

비밀 편지를 보냈던 정조는 읽고 나서 즉시 태우든가, 먹물을 씻어내서라도 없애버리라는 명을 내렸지만 심환지가 따르지 않았기에 전해졌던 것이죠. 그렇지만 정조가 병사했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기에, 공개된 편지가 독살설을 완전히 뒤엎을 증거라고 보기도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정조는 반대세력의 숱한 정치적 음모와 저항을 정면 돌파했던 탁월한 정치전략가이기도 했으니 이처럼 편지 정치도 했던 겁니다.

 

종기는 어떤 병이기에 증세가 그리도 심한가?

 

종기는 조선의 왕들을 괴롭힌 직업병’ 1위라고 할 수 있는데, , 뒷목덜미 부분에 잘 생기고 엉덩이, 허리, 얼굴 등에도 생기는 등창입니다. 고름이 피부에 국소적으로 생긴 뾰루지, 즉 부스럼(carbuncle)인데, 한의학에서는 ()’, ‘()’이라고 합니다. 동의보감에는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상하거나 소갈(消渴)이 오래되면 반드시 옹저나 정창이 생긴다고 하였으니 스트레스와 당뇨병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나라를 다스리는 막중한 책무로 인한 스트레스와 운동부족이 왕들에게 종기를 선사했던 것이죠. 서양의학적으로는 원인균인 포도상구균이 피하조직에 들어가 생기는데, 심해지면 균이 피하조직을 따라 점점 퍼지며 합병증인 패혈증이 생겨 전신에 퍼지게 되면 뇌막염 등 여러 장기에 염증이 생겨 사망하게 됩니다. 종기로 고생했던 임금은 세종, 문종, 성종, 효종, 정조 등이죠.

 

이명래 고약과 조고약.

 

종기는 위생 상태가 좋은 요즘에는 보기 힘듭니다. 만약 생기더라도 초기에 항생제를 쓰면 쉽게 낫지만 해방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심지어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다행히 1905년에 이명래 고약이 나오고, 뒤이어 조고약이 나오면서 더 이상 골치 아픈 병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죠. 그렇지만 요즘도 연세 많은 분들, 특히 당뇨병이나 심장병이 있는 경우에 합병증으로 생기기 쉬우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오래 병상에 누워서 지내는 분들에 잘 생기는 욕창(蓐瘡)’도 종기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죠. 꾸준히 운동하고 영양 섭취를 골고루 해야 종기가 생겨나지 않는 겁니다.

 

정조는 종기에 대하여 어떤 치료를 받았나?

 

정조는 내의원 의원들에게 진찰받아 처방약을 들기도 했지만 의술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기에 사망 14일 전에는 직접 처방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소요산(逍遙散)에 황금(黃芩), 황련을 추가해 사용하고 이어 사순청량음(四順淸凉飮), 웅담고(熊膽膏) 등을 투약했습니다. 가미소요산은 기와 혈이 막혀 흐르지 않는 것을 가볍게 흔들어 열어줌으로써 푼다는 의미로서 불면, 어지러움, 때때로 올라오는 열감, 안면홍조 등의 증상을 완화시키는데 쓰입니다. 사순청량음도 혈액 속의 열기를 풀어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웅담은 곰의 쓸개인데, 열과 독을 없애주는 효과가 있지요. 그래도 효과가 없자 연훈방을 사용하였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일부 학자들이 독살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연훈방(烟燻方)’이란 어떤 치료인가?

 

연훈방은 수은 성분인 경면주사(鏡面朱砂)를 태워서 연기를 쏘이는 치료법입니다. 경면주사는 가장 음적인 물질로서 열을 식히는데 으뜸으로 치는데, 문제는 수은이 중금속으로서 독성이 크기 때문이죠. 그리고 연훈방을 건의한 심연이 심환지의 친척이라는 점도 의심이 됩니다. 그러나 연훈방을 사용한 뒤인 625일 정조의 증상은 한결 나아졌고, 다음날에도 사용하여 종기 부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연훈방을 장기간 복용하면 수은 중독 위험이 있지만 사흘 정도 사용한 것은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는데, 문제는 다른 독을 함께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죠. 한편, 병세에 맞지 않게 인삼이 들어간 처방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화기가 많아 열을 내리는 약을 복용하였는데 왜 인삼을 썼나?

 

사망하기 이틀 전인 626일의 실록을 보면 이시수라는 의원이 아뢰기를 이전에는 종기가 부어올라 당기고 아픈 정도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종기를 다스리는 일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만, 이제는 종기가 거의 나아가 별다른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열이 오르내리고 왔다갔다하는 것은 한때 가슴의 화기처럼 보입니다만,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로 보더라도 침식이 편하지 않으면 번울증이 있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며칠 동안 병을 조리하시는 가운데 잠을 매일 설치고 수라도 드시는 것이 없으시니, 이러한 과정에 원기가 날로 차츰 쇠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서 열기가 더 오르는 것도 반드시 기운이 허약해진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양제(凉劑), 즉 찬 성질의 약을 드시는 일은 이미 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반드시 먼저 원기를 보충하셔야 하니, 그런 뒤에야 허열 또한 사라지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정조의 종기가 거의 나았고, 그동안 너무 찬 성질의 약을 사용한데다 잠도 못 자고 먹지도 않아 원기가 허약해진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열도 병독으로 인해 생긴 실열(實熱)이 아니라 몸이 허약해서 생긴 허열(虛熱)이므로 기와 혈을 보충하는 약을 써야 한다는 것이죠.

 

정조는 인삼이 들어간 처방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인삼이 들어간 경옥고나 가감팔물탕 등을 복용하였기에 열을 가중시켜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보약을 써야 한다는 것은 당대 명의인 강명길을 비롯한 여러 의관들의 공통된 견해라는 것이 실록에 나옵니다. 그리고 경옥고(瓊玉膏)에는 인삼(人蔘, 24900g)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주된 약은 생지황(生地黃)으로써 16(9,600g)이나 되고 백복령(白茯苓, 481,800g)도 들어 있지요. 생지황은 찬 성질로서 피를 서늘하게 하고 열을 내리는 효능이 있습니다. 경옥고는 음기를 돕는 보약이고, 꿀도 10(6,000g)이나 들어 있지만 고약(膏藥)으로서 빠른 효과를 보는 약이 아닙니다. 가감팔물탕(加減八物湯)도 인삼을 2돈에서 1돈으로 줄여서 썼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인삼과 좁쌀미음을 들었는데요, 사망 당일에도 신하들을 접견하는 중에 위중해져 정신을 잃었습니다. 마지막 한 마디가 정순왕후가 거처하던 수정전(壽靜殿)’ 3자였습니다.

 

인삼을 상태에 맞지 않게 쓰면 열을 올려 부작용이 생길 수 있기는 하지만 당대 명의들이 소량의 인삼을 며칠간 쓴 것이 과연 왕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였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정조가 사망하기 28일 전인 530일의 경연에서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면서 대대적인 정계 개편을 암시하는 오회연교(五晦筵敎)’라는 하교로 인해 노론 벽파에서 살 길을 찾아 일을 도모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이 생기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