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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 전 겨울, 흥남 부두, 지옥과 천당

풍월 사선암 2014. 12. 6. 09:38

64년 전 겨울, 흥남 부두, 지옥과 천당

 

세차게 불어 닥치는 海風(해풍)과 눈보라는 피난민들의 가슴속을 더 싸늘하게 파고들었다.

엄마를 잃은 아이는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얼고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돼 지쳐 주저앉아 발버둥치고 있었다.

박경애

 

나는 추워지면 195012월을 생각한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北進中이던 유엔군이 총퇴각을 하던 시기, 얼어붙은 戰線에서는 銃傷보다 凍傷으로 인한 부상자들이 더 많았다. 피난민들은 후퇴하는 군인들과 섞여 강을 건너고 산을 타고 배에 매달려야 했다. 20006.25 전쟁 5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가 手記를 모집한 적이 있었는데 충청도에서 살던 박경애 씨가 흥남에서 철수선을 탄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기어코 일은 났음메!

 

오늘 점심은 시원하게 오이냉국으로 하기오다

아버지의 말씀이 떨어지자 어머니는 『…알겠소다하시며 정지(부엌)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다. 느닷없이 귀청을 뚫을 듯한 요란한 폭음과 함께 유리창이 흔들렸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흥남으로 내려가는 철교가 제국주의의 폭격을 맞아 두 동강이 났다는 것이다.

 

동경유학을 하신 지식인 아버지께서는 입속말로 기어코 일은 났음메!하시더니 이러구 있을 때가 아이지비! 과수원집으로 날래 피난가기오!했다. 우리 가족은 여름옷 몇 가지만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내려쬐는 땡볕의 불덩어리를 안고 걸으니 숨이 막히고 푹푹 찌는 가마솥 찜통더위에 어머니의 하얀 모시 적삼은 어느새 흠뻑 젖었다.

 

남동생이 걷는 게 꾀가 났던지 아버지! , 쉬었다 가기오다했다. 아버지께서는 화를 내시더니 지금 무시기 헛소리를 하지비! 과수원집으로 원족을 가는 검메? 비행기가 또 언제 올지 모른다이!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에야 과수원집에 도착했다.

 

원두막 기둥에 묶여 있던 셰퍼드는 찜통 더위에 혀를 반쯤이나 내밀고 헉헉거리다 우리가 들어서는 기척에 주인님 오느냐고 좋아서 컹컹 짖기 시작했다. 동생이 목줄을 풀어줬더니 덩실덩실 기어올랐다. 피난살이는 이렇게 첫 밤을 맞았다.

 

모기떼들이 왱살판났다. 음침한 빈대들은 빨치산 특공대처럼 소리도 없이 기습해왔다. 곤욕스러운 피난살이가 하루속히 끝나기만을 고대하고 기다리던 그 어느 날이다. 신작로 쪽으로 나갔던 남동생이 헐레벌떡 숨이 다 넘어가는 소리로 어마이(어머니)를 불러대면서 집으로 들어와 인민군대가 말이오다 펑퍼짐한 바지 가랑이엔 피투성이고 머리, 눈까지 싸매고 목발 짚고 무리를 지어 북쪽으로 정신 빠지게 갑디다라고 했다.

 

이상해서 한참 쳐다봤더니 인민군대 하나가 따발총을 가슴에 들이대고 서슬이 시퍼런 눈으로 ! ! 종간나 새끼야! 무시기 구경났음메!했다고 한다. 동생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아버지께서는 번뜩이는 생각에 그거는 두말할 것 없이 인민군 패잔병이다이. 인민군 후퇴다이, 밖에 나가면 아이됨메. 쥐죽은 듯 숨기오다했다. 그후 열흘 남짓 지났다. 신작로 쪽에서 고함소리가 또 들려왔다. 아버지께서 내가 나가서 둘러보고 올끼오다했다.

 

아버지는 미소를 머금고 그럼! 그렇치!하면서 이거, 보기오다. 국방군이 北進(북진)하고 있소다했다.

어머니는 지금 무시기 말이오? 과수원 동네는 온통 태극기, 물결이오했다. 들뜬 기분이다.

 

흑인 병사를 본 충격

 

이제는 통일된다고 감격하고 기뻐했다. 어머니께서는 경애! 니는 절대 나가지 말기오다하며 거듭거듭 당부를 하였건만 그럴수록 나는 신작로 쪽이 더 궁금해 견딜 수가 없어 몰래 신작로 나왔다. 무장한 유엔군 트럭이 계속 北進 중이었다. 트럭에 탄 한 흑인 병사와 나는 어쩌다 눈이 마주쳤다. 지구상에 흑인이라는 인종이 살고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지금 내 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흑인 병사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나에게 윙크를 건넸다. 나는 순간적으로 충격에 당혹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숨쉴 새도 없이 달음박질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신발도 벗지 못하고 작은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고리를 잠그고 쿵쾅! 쿵쾅! 뛰는 가슴에 두 손을 꼭 얹었다 얼굴은 화로를 껴안은 것처럼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10군단은 함흥을 탈환하면서 여러 채의 천막을 짓고 지역 본부를 설치했다. 미군들은 총을 메고 보초를 서면서도 껌을 찍찍 씹고 서 있다. 아이들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보초병들 앞에 얼쩡거리며 할로 할로를 소리 지르니 보초병들은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하며 -하고 윽박질러도 아이들은 까-뎀의 말뜻을 몰라 따라서 -하고는 줄행랑을 쳤다.

 

19501120李承晩(이승만) 대통령께서 함흥을 방문하였다. 나는 국방부 정훈국 웅변대회 때 일등 하여 학생대표로 李承晩 대통령 환영식장에 참석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함흥공회당 입구에는 권총을 찬 미군 헌병들이 입장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몸수색했다. 한복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李承晩 대통령과 치마저고리를 입은 옷차림이 퍽 어색해 보이는 프란체스카 여사가 연단에 모습을 드러내니 공회당 안의 분위기는 감격하여 열광의 박수가 터졌다.

 

동포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 나, 이승만이 함흥에 왔습니다하는 목메인 인사는 듣는 이의 가슴속을 적셨다. 시베리아의 칼 같은 바람과 눈보라는 끊이지 않고 있었다.

 

국방부 정훈국 학도호국단 함흥분실은 매일같이 학생들의 집합 장소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볼셰비키 운운하며 유창하게 露語(노어)를 써가며 앞장서 설치던 학생들이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친구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는 행동은 듣기가 민망스럽다.

 

지옥이 된 흥남부두의 그날 밤

 

아직 확실한 통치 제도가 들어서지 못해 애국한답시고 미행하여 사과노릇을 한 애매한 사람들이 누명을 쓰고 기관 요원에게 억울하게 잡혀가고 있었다. 실제 토마토로 산 사람들은 그들만의 안전지대로 이미 떠나고 없었다. 헌신적인 변화가 아니고 감격과 분노가 뒤범벅이 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오늘도 눈이 많이 오겠다이, 학교가 파하면 학도 호국단 그런데 가지 말고 집으로 옵세 알겠음했다. 교문을 나와 집으로 가는 중인데 갑자기 유엔군 트럭이 물밀듯 신작로를 다 차지하고 흥남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내가 가는 길을 철저히 막고 있었다.

 

눈보라는 아침보다 더 세차게 내리니 한치 앞을 구별할 수 없었다. 보따리를 챙긴 사람들의 행렬이 순식간에 점점 불어나 분명 심상치 않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개마고원 장진호는 미군이 완전 포위당해 혹독한 추위 속에 사상 최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미군이 몰살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모택동 군대가 국경을 넘어와 국방군은 후퇴를 하게 돼 살아남으려면 흥남으로 가 배를 타야 된다고 이구동성이다. 나는 그 틈바구니 속에 묻혀 헤어날 길이 없어 방향을 잃었다.

 

그 무리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흥남부두까지 무리와 같이 밀려왔다. 흥남부두는 마치 콩나물시루 같았다.

 

동족 간의 싸움에 흥남부두는 비극을 만들어 가고 있다. 세차게 불어 닥치는 海風(해풍)과 눈보라는 피난민들의 가슴속을 더 싸늘하게 파고 들었다. 엄마를 잃은 아이는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얼고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돼 지쳐 주저앉아 발버둥치고 있었다.

한편 어떤 엄마는 자식의 이름을 목청 높여 불러가며 반 미친 모양이다. 법도, 질서도, 인정도, 양심도 찾아볼 수 없는 비극의 현장이 바로 이 흥남 부두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것처럼 흥남부두는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변했다. 그 지옥 같은 흥남부두에도 밤은 찾아들었다. 어둠이 덮치니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 닥쳤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사시나무 떨듯이 와들와들! 발을 동동 구르는데 뭔가 밤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바로 함포사격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에서는 엘에스티(LST)라고 부르는 군함에 승선을 하게 됐는데 서로 먼저 타려고 사양하는 예절도 잃은 채 아귀다툼을 했다. 그러자 보따리가 짐이 되니 바다에 전부 던지고 말았다. 내가 들어간 곳은 배의 맨 밑바닥인 것 같다. 퀴퀴하고 고약한 냄새에 숨이 막혀 질식을 할 지경이었다. 피난민들은 기진맥진하여 지쳤다. 잠에 취해 곯아 떨어진 사람도 있었다.

 

여기도 역시 콩나물시루다. 발 한번 뻗지 못하는 옹색하고 비좁은 자리지만 마다않고 이 잡는 소리, 코 고는 소리, 더욱 놀랜 소리는 갓난애의 앵하는 울음소리가 터졌다. 다들 이기? 무시기 소리오?했다.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먹을 것도 없는데 화장실로 가고 싶었다. 화장실은 줄을 서 기다려야 했다. 화장실 안은 용변이 가득 차 봉우리, 봉우리다. 발 들여 놓을 틈도 없고 풍기는 악취가 곤욕스럽기만 하다. 워낙에 배가 크고 복잡하다 보니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엉뚱한데로 들어섰다.

 

갑판서 외친 전쟁이여, 물러가라!

 

내 눈에 언뜻 보인 것은 덩치가 큰 괴상하게 생긴 사람이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근육! 바닷바람에 그을린 단단한 체구는 황우 장사도 해치울 것 같다. 얼굴 전체가 구레나룻으로 덮인 험상궂은 털보였다. 흰바가지 모자를 쓰고 불룩 나온 배는 예닐곱 달은 된 것 같다. 입고 있는 청바지는 움직이면 금세 터질 것만 같다.

 

한 손에 칼을 들고 한 손에 깡통을 든 채 서 있는 해병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순간 나는 소름이 끼쳤다. 놀라는 나를 바라보며 능글능글 여유 있게 웃는 태도는 어릴 적 그림책에서 본 해적임에 틀림없다. 나는 얼떨결에 엄마야…』 소릴 지르면서 그곳에서 빠져 나왔다. 그는 해적이 아니라 그 함대 주방에서 일하는 병사였을 것이다.

 

엘에스티는 원한과 비극을 가득히 실은 채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구역질하며 토하기 시작했다.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갑판으로 올라갔다. 이러는 나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엘에스티는 동해안을 끼고 으로 으로 가고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망망대해다. 노예로 팔려가는 기분이었다.

 

군함을 타고 목적지도 모르고 바다 위에 떠 있는 딸을! 학교에서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 기다리고 계실 어머님을 생각하니 나는 가슴이 무너졌다. 울컥 설움이 치밀어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전쟁이여! 물러가라고 미친 듯 외쳤다. 갑판 위에서 구역질하며 토하던 모든 피난민들은 내가 외치는 소리에 일제히 몸부림치며 통곡을 터뜨려 갑판은 일시에 눈물의 바다로 屍身(시신)이 없는 초상을 치렀다.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된 생면부지의 땅 대한민국, 묵호라는 곳에서 잠시 쉬게 됐다. 나는 외투 주머니 속에 든 붉은 지폐를 만지작거렸다. 여기서는 쓸 수 없는 돈이 아닌가? 버릴까? 말까? 한참 망설였다. 하지만 생각 끝에 붉은 지폐를 묵호 바다에 던지니 지폐는 훨훨 날아갔다.

 

묵호를 떠나 거제도 장승포에 내렸다. 다시 다른 배를 갈아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 인솔자의 안내로 부산 외곽지대 피난민 수용소로 정착을 했다. 가마니로 비바람을 겨우 막을 수 있는 이 수용소는 얼핏 보기에는 서커스장 같았다. 거적에 누워 있노라니 앞날이 캄캄했다. 한숨과 눈물만 흘러내렸다.

 

딸아

대한민국 부산에 와 있는 줄도 모르고 밤마다 노심초사 악몽에 시달려 베갯잇을 적시고 긴긴 겨울밤 바람 소리에 대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면 경애냐?하시며 버선발로 뛰쳐 나왔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미칠 지경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금지옥엽이요, 생명이요, 희망인데 나는 어찌하여 1·4후퇴의 제물이 돼 부모님 가슴에 소리없이 못질을 한단 말인가.

 

이 거적때기 같은 수용소가 내가 영영 헤어나지 못할 유배지란 말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드니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눈물 줄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아직도 마르지 않은 눈물샘

 

날이 밝았다. 밤새도록 눈물바다를 이루다 보니 눈이 팅팅 부어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다. 세수를 하자니 비누, 치약, 칫솔이 있어야 말이지. 교복 주머니 속의 손 때 묻은 손수건으로 눈꼽을 닦았다. 주먹밥이 왔다. 한 입 물고 보니 밥이 아니라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 또 설움이 북받쳐 목이 메인다. 거적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교복 단추가 다 떨어졌다. 흰 칼라는 땟국물이 꼬질꼬질 찌들었고 털신은 앞이 달아서 발톱이 나왔다.

 

수용소 뒷산 자락에는 성냥개비 깔린 것처럼 빼곡하게 들어 차 있는 판잣집들이 있었고, 학교에 가야 될 어린 아이들이 구두닦이, 양담배, 껌팔이로 식구들의 생계를 떠맡아 밥벌이에 나서고 있었다.

 

전쟁은 하루아침에 이렇게 평화를 파괴했다. 석 달이면 다시 수복한다던 말은 헛소리였다. 벌써 반세기가 돼 간다. 이제 70줄에 접어든 황혼 길목에서 손자, 손녀의 재롱에 잊고 넘길 때도 있었지만 무덤에까지 가지고 가야 되는 한 맺힌 과거사가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때의 참혹한 전쟁과 비극은 몇 날 며칠을 두고 해도 모자라는 얘기다. 이제 말라붙었을 법한 눈물샘이 다시 솟아 손등으로 처량하게 떨어져 쓰던 글을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