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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서 돌아온 어묵집 손자, 어묵판을 바꾸다

풍월 사선암 2014. 12. 9. 08:03

뉴욕서 돌아온 어묵집 손자, 어묵판을 바꾸다

 

부산 삼진어묵 박용준 실장

 

학교 다닐 때 별명이 '오뎅' / "비린내 나는 공장 싫다" / 회계사 꿈 안고 유학 / 父親 쓰러져 진로 바꿔 

"지저분한 어묵은 그만" / 공장에 위생시스템 도입 / 매장은 카페·빵집처럼… / 백화점도 '러브콜' 

"봉래동을 어묵타운으로" / 1953祖父 어묵공장 / 전쟁통 피난민 단백질源 / "家業 100년 더 잇겠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돌아오면 안 되겠니."

 

20104월 미국 뉴욕에서 유학 중이던 박용준(31)씨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동맥경화로 쓰러졌다는 소식은 그의 진로를 바꿨다. 박씨는 뉴욕주립대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회계사 자격시험을 볼 생각이었다. 그는 어묵집 아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어묵 회사인 부산 삼진어묵은 할아버지가 만든 회사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묵 냄새를 맡으며 자라서인지 어묵 비린내가 지긋지긋했다. "뉴욕에서 살겠다"며 유학을 떠난 것도 그래서였다.

 

지난달 10일 부산시 영도구 봉래동 삼진어묵 본점 어묵판매대 앞에서 박용준(31) 관리실장이 웃고 있다. 아래 작은 사진은 어묵 공장을 리모델링해 깔끔하게 변신한 삼진어묵 본점.

 

하지만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박씨는 회계사도, 뉴욕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업을 물려받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회복됐다. 지난해 삼진어묵 매출은 300억원대로 늘었다. 박씨가 가업에 뛰어든 지 4년 만에 10배 늘어난 것이다. 그가 개발한 어묵 크로켓(일명 고로케)은 부산에서 '대박'이 났다. 폐허나 다름없었던 영도구 봉래동 어묵 공장은 어묵 베이커리와 어묵 역사관으로 변모했다. 입소문을 타 손님이 몰리자 롯데백화점 부산 서면점과 부산역에 지점을 냈다. 10~11월 서울 롯데백화점 잠실점과 소공동 본점에서 열린 '삼진어묵 특별전'20일 동안 45000여명이 몰렸다. SNS'삼진어묵 기다리는 줄이 지구 대기권을 뚫고 나갈 기세'라는 글까지 올라왔다.

 

"왜 어묵은 지저분한 음식이어야 하나?"

 

2010년 귀국한 박씨는 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서울 도매상의 반응은 냉랭했다. "삼진? 들어본 적도 없는 어묵을 우리가 왜 사줘야 하느냐"고들 했다. "가격을 낮춰 드리겠습니다"라고 해보고, "저희는 좀 오래됐습니다"라고도 해봤지만 비웃음만 돌아왔다.

 

어묵은 비위생적인 음식이라는 선입견부터 깨야 했다. "옛날 방식으로 수제 어묵을 제작하는 어른들은 아무래도 위생 관념이 좀 약했죠." 공장에 위생 시스템을 도입했다. 위생복을 입고 소독을 거쳐야만 공장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다.

 

시장조사를 해봤다. 그는 "8000억원 규모 시장에 유통되는 어묵 종류가 10개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느냐""동그란 어묵, 납작한 어묵, 긴 어묵. 이런 식이었다"고 말했다. 품목을 60여개까지 늘렸다. 대량생산 품목과 베이커리식 수작업이 필요한 고급 품목을 분리하니 제품 다양화가 가능해졌다.

 

그다음은 마케팅이었다. 시장에서 주는 대로 받아먹는 '싸구려 음식'이 아닌 카페나 베이커리 같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어묵을 고를 수 있도록 매장을 리모델링했다. 목욕탕 건물 같았던 본점 외관을 짙은 회색 타일로 감싸고 수직형 창문을 냈다. 5m 높이 천장은 반구형 아치 모양으로 개조해 어묵 제작 과정을 담은 벽화를 그렸다. 벽돌 벽엔 '1953 부산 어묵의 원조'라고 적었다.

 

중세 유럽풍의 인테리어 디자인은 박씨가 뉴욕 유학 시절 가본 록펠러센터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했다. 고급 빵집에서처럼 물건을 고르는 '어묵 베이커리'는 부산의 명소가 됐다. 타지에도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려 주차장은 평일 낮부터 만차(滿車). 박씨는 "시장에서 천대받던 고향 음식 어묵이 번듯한 대접을 받는 모습에 부산 시민이 감동한 덕"이라고 말했다.

 

영도 본점, 롯데백화점 서면점, 부산역점 세 곳 하루 매출을 합치면 5500만원. 감자·고구마·카레·고추 네 가지 맛 어묵 크로켓은 삼진어묵의 대표 상품이다. 한 개 1200원짜리 이 제품이 하루 12000개 팔린다.

 

19세 청년의 삶을 바꾼 사고

 

박씨 얼굴엔 왼눈에서 이마를 타고 뒤통수까지 이어지는 20길이의 흉터가 있다. 20022, 부경대 신입생이었던 박씨는 경상북도 경주로 오리엔테이션을 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자전거를 타는데 큰 트럭이 덮쳤습니다.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죠. 며칠 뒤 깨어났더니 병원이더군요." 허연 뇌가 들여다보일 만큼 중상이었다. 400바늘을 꿰매는 5시간 대수술 끝에 목숨은 건졌다. 그는 "'죽을 뻔했구나. 앞으론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다친 몸으론 학교에 다닐 수 없어서 자퇴했다. 몸이 회복되자 바로 입대했다. 키가 커서(183) 23사단 헌병대에서 근무했다. "죽다 살아난 인생이니까, 군대 생활도 열심히 해야겠다 싶었죠." 학창 시절 손들고 발표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만큼 소심했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전역할 무렵 처음으로 미래를 고민해봤다. 어묵집을 물려받긴 싫다는 결론이 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하교하면 매일 어묵 공장에 가서 기계에 낀 찌꺼기를 청소해야 했다. "··12년 별명이 '오뎅'이었어요. 냄새도 많이 났고. 전 그냥 평범한 화이트칼라 회사원이 되고 싶었습니다." 가업을 잇기 싫다는 장남의 선택을 부모님은 존중했다. "죽다 살아난 제가 난생처음 눈 부릅뜨고 '미국 가고 싶다'고 하니 좀 대견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20064월 박씨는 미국으로 갔다. 4년 뒤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지만 박씨는 "미국 생활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삼진어묵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뉴욕에서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을 체득했습니다. 수백 개 국가의 음식이 모두 모여 있는 곳도 뉴욕이고요. 어묵 품목을 다양화하고, 매장을 고급화할 수 있었던 자양분 역시 뉴욕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이었죠."

 

"100년 기업 꿈꾼다"

 

박씨는 "좀 뜬다고 반짝하고 사라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삼진(三進)이란 이름을 지킨 까닭도 그래서다. "처음엔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고리타분하고 촌스러워서 안 팔릴 거라고 했지요." 그런데도 박씨가 삼진을 고수한 이유는 역사와 전통 때문이었다. 조부 고() 박재덕(1925~1992) 창업주는 1940년대 일본에 징용된 뒤 해방을 맞았다. 홋카이도에서 어묵 기술을 배워 부산으로 온 조부는 1953년 전쟁통에 삼진어묵 공장을 열었다. 박씨는 "당시 부산에 몰려든 피난민에게 어묵은 거의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삼진이라는 이름에 얽힌 이러한 역사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봉래동 본점 자리도 "이 자리는 지켜야 한다"는 박씨 고집이 아니었다면 팔려서 원룸 부지가 될 뻔했다. "여긴 할아버지가 1953년 열었던 판잣집 공장이 있던 자리예요. 아버지 대에 공장을 새로 지었고 제가 리모델링해서 어묵 베이커리와 역사관을 만들었지요. 제가 어렸을 때 뛰어놀던 골목이기도 하고요. 3대의 기억이 서린 곳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는 봉래동 일대를 1950년대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어묵 타운'으로 만들 계획이다. 여기에 어묵박물관과 어묵연구소를 짓고 어묵 장인 제도를 만들어 아버지뻘 옛 장인들을 불러 모으겠다는 생각이다.

 

"어묵 종주국인 일본 자료를 찾아봤어요. 어묵 맛의 기준을 어종(魚種)에 따라 식감·냄새·색감으로 분류하고, 치아에 닿는 어묵의 탄력까지 수치화해 놓았더라고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조선일보 원선우 기자  2014.12.06 0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