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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으로 치른 전투 - 베트남 디엔비엔푸

풍월 사선암 2013. 10. 9. 12:12

오만과 편견으로 치른 전투 - 베트남 디엔비엔푸

 

역사적으로 디엔 비엔 푸 전투 (Dien Bien Phu)만큼 오만과 편견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 사례를 찾기 어렵다.

 

베트남 북 서쪽 초록색 부분이 디엔 비엔 푸 전투 장소

 

프랑스군과 호치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군 간에 벌어진 전쟁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우리가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차 전쟁에 이어 프랑스군 대신 미군과 한국군이 투입되어 치른 1차전의 부록인 셈이다. 우리에겐 이 1차 전쟁보다 2차 전쟁이 훨씬 더 알려져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57월 포츠담 회담 결과 무장해제된 일본군 대신 베트남 북쪽은 중국이, 남쪽은 영국이 점령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밀실 협상을 통해 중국과 영국의 양보를 얻어 태평양 전쟁 전 베트남을 지배했던 식민지 권리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군을 진주시킨다.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막 독립을 쟁취한 호치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금 식민지배를 원했던 프랑스에 맞서 힘겨운 독립 전쟁을 벌이게 된다.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잔뼈가 굵은 나폴레옹의 후예들과 자전거를 타고 손자병법을 읽던 호치민의 베트남인들은 이렇게 맞부딪치게 된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자전거로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베트남군

 

개전 초기 압도적 장비와 40만 정예 병력을 동원한 프랑스군의 공세에 소총조차 부족해서 죽창과 칼로 무장했던 베트남군은 하노이, 하이퐁등 주요 도시를 내주게 된다. 하지만 외인부대, 프랑스인, 프랑스 식민지인, 현지 주민등으로 구성됬던 프랑스군 대비 민족 정신으로 무장한 베트남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세력을 불려가고 전략 거점을 하나 하나 탈환해간다.

 

그러던 중 19535월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앙리 나바르(Henry Navarre) 장군은 베트남 국토의 2/3을 점령한 베트남군의 주력을 격파해서 승기를 잡고 싶어했다. 앙리 장군과 미 군사 고문단은 베트남 북서부 라오스 국경 근처에 위치한 디엔 비엔 푸(Dien Vien Phu)로 베트남군을 유인해서 섬멸하는 작전 계획을 세우고, 19531120일 작전을 시작한다.

 

어찌 어찌하다보니 무장도 열악한 베트남군에게 지금껏 밀리긴 했지만, 월등한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개활지로 유인해 낼수만 있다면 한 주먹 꺼리도 않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인해 내려면 미끼가 필요하고, 그래서 디엔 비엔 푸라는 곳에 미끼를 뿌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디엔 비엔 푸에 강하중인 프랑스 군인들

 

먼저 남북으로 18km, 동서 6km에 이르는 분지로 주변 고지대에 둘러싸여있던 디엔 비엔 푸는 수송기에서 강하한 프랑스군에 의해 손쉽게 점령됬다. 수차례 추가 강하를 통해 주둔군은 16,000명으로 증강되어 비행장 시설을 확보하고, 최신식 화기와 대포 60문을 배치한다.

   

프랑스군은 북서 베트남의 교통 요지였던 디엔 비엔 푸를 점령하면, 주변 산맥과 정글에 배치된 베트남군 주력이 탈환을 위해 평야 지대로 집결할 것으로 예상했다. 숫적으로 우세한 적군 한 복판에 스스로 포위됨으로써 방심한 베트남군이 총 공세로 나올 경우, 노출된 적을 월등한 항공 전력과 포병 화력으로 괴멸시키겠다는 의도였다. 걸리면 뼈도 못추리게 해주겠다는 강한 자신감의 표현이랄까...

 

 

▲좌, 프랑스군 방어진지. 우, 대포를 끌고 1,000미터 고지를 넘고 있는 베트남군, 맨 몸으로도 넘기 힘든 높이다.

 

의도대로 디엔 비엔 푸를 요새화한 프랑스군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베트남군이 집결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프랑스군 수뇌부는 베트남군의 전투 의지와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정글을 헤치고 디엔 비엔 푸에 집결한 베트남군은 총 4개 사단 5만명에 달했고, 전의를 불태운 호치민과 보 구엔 지압 장군(Vo Nguyen Giap)은 험준한 산을 넘어 총 200문에 달하는 야포를 옮겨 온 것이다. 이 것은 프랑스 수뇌부가 예상한 것 보다 훨씬 막강한 전력이었다.

 

 

▲좌, 당시 디엔 비엔 푸 항공 촬영 사진. 우, 포로가 된 프랑스 군, 이들중 다수가 행군 중 사망한다.

 

베트남군은 프랑스군을 포위했고 야포들은 전투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교묘히 위장된 채 디엔비엔 푸 공격선에 배치됬다. 하지만 프랑스 주둔군 역시 의도했던 포위인지라 추가 병력 증원도 거부한 채 기꺼이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비록 수적으로 열세라도 항공 폭격을 동원하고, 경전차, 곡사포, 중박격포, 대공포등을 이용해 정글에서 노출된 베트남군을 박살내겠다는 의욕에 차 있었다. 베트남군의 야포는 몇 대 되지 않을 뿐더러 경사면에 배치되어 정확도도 떨어지고, 프랑스 폭격기들의 손쉬운 표적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포위된 상태에서도 적에 대한 과소평가는 여전했다.

 

몇 번의 산발적인 전투를 거쳐 1954313일 야간, 베트남군의 총 공격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 요새 진지에 대한 정밀 포격이 시작되고 프랑스군 진지를 향해 베트남군이 땅을 파 들어오자 군 수뇌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베트남 야포의 사격은 정확했고, 반대로 아군의 포격은 은폐된 적 대포를 효율적으로 타격하지 못했다. 엎친데 덮쳐 우기가 시작되자 진지 내 비행장으로의 수송기 이착륙이 불가능해졌고, 불량한 시계로 공군의 지원 역시 받기 힘들어 졌다. 이 정도도 예상 못하고 만 육천명을 적진 한가운데 보낸 군 수뇌부는 참 한심한 셈이다.

 

◀포위상태에서 적을 불러내 섬멸하려던 계획에서, 반대로 적에게 섬멸된 프랑스군

 

프랑스군의 공중 폭격과 포격으로 베트남군 역시 상당한 인명 손실이 생겼지만, 5만에 달하는 총 병력은 지속적인 공세를 유지하기에 충분했다. 포위상태가 지속되면서 프랑스군의 참호와 요새는 하나 둘씩 베트남군 수중으로 떨어졌고, 프랑스군의 항공보급은 정확도가 떨어졌다. 프랑스 공군의 항공 보급 물품은 베트남군에게 깜짝 선물 정도였다고 한다.

 

부상자조차 후방으로 후송할 수 없었던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늘어났지만 디엔 비엔 푸를 이중, 삼중으로 둘러싼 지뢰, 부비 트랩, 참호, 포위망 때문에 후퇴조차 불가능했다. 애초 스스로 포위 상태가 되도록 유도한 프랑스 군 수뇌부의 뜻대로 완벽히 포위는 되었지만, 계획대로 프랑스 공군과 포병은 베트남군에 괴멸적 피해를 주지 못했다.

 

◀부상자의 후송조차 불가능했던 디엔 비엔 푸 상황

 

주요 방어 기점을 빼앗긴 상태에서 저공 폭격을 해야 했던 프랑스와 미국 공군은 대공화기에 50대 가까운 항공기를 격추당했다. 탄약도 떨어지고 후방 지원도 힘들어진 상태에서도 정예 부대였던 프랑스군은 용감하게 싸웠다. 프랑스 공수부대, 외인부대 모두 명성에 걸맞게 물밀듯 밀려오는 베트남군을 상대로 백병전을 벌이면서 버텨나갔다. 하지만 공군 지원도 포병 지원도 무력해지고 보급물자도 부족한 상태에서 세 배가 넘는 베트남군을 막아내기는 불가능했다.

 

마지막 날 전투에서 모든 요새가 베트남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디엔 비엔 푸 포위전은 끝나게 된다. 프랑스군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병사가 70명에 불과했고 전사자 5,000명에 11,000명이 넘는 부상자, 생존자가 포로가 됬다.

   

베트남군도 전사자가 25천명에 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지만, 이 전투의 결과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로 하여금 1954721일 제네바 휴전 협정에 서명토록 만들수 있었다.

 

전투가 종결되고, 디엔 비엔 푸에 입성하고 잇는 보 구엔 지압 장군

 

프랑스는 19564월 베트남에서 영구 철수하기 전 마지막 작별 선물을 준비한다. 호치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맞서 남부 베트남에 무능하고 부패한 고딘디엠 정권을 세움으로써, 자신들을 괴롭힌 베트남인들 스스로 싸우도록 만든 것이다. 이 분단 상황이 이후 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베트남 전쟁으로 확대됬으니 그런 면에서 분풀이 제대로 하고 간 셈이다.

 

프랑스군은 자신들 대신 베트남에 진주하는 미군들에게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니 베트남인들과 싸우지 마라는 충고를 했지만, 그들 역시 프랑스군이 가졌던 오만과 편견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월한 장비와 월등한 화력으로 베트남인들의 통일 의지를 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오판 한 것이다 

 

호치민과 보 구엔 지압 장군은 뜬금없이 16,000명의 프랑스 군이 자신들의 진지 한가운데로 줄줄이 강하하는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 까? 분명 그들의 의도를 간파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험준한 길을 달려 대 병력을 집결시키고, 야포를 끌고 산을 넘은 것이다. 야포가 공군기나 포병 전력에 노출되지 않게 은폐한 것이나, 프랑스 진지를 향해 땅을 파들어간 점등은 프랑스군의전략을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증인 셈이다.

 

◀호치민과 보 구엔 지압 장군

 

미끼를 던져 몸통을 잡으려던 프랑스군, 그리고 던져진 미끼를 확실히 박살내서 프랑스군 전체의 전의를 잃게 만들려던 베트남군, 둘 다에게 이 전투는 기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상대를 얕잡아 봄으로써 스스로 던진 함정에 스스로가 빠져버린 셈이다. 결국 기회를 살린쪽은 좀 더 신중하게 준비하고 대비한 베트남 쪽이었던 셈이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사력을 다한다고 했다.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일거다. 전쟁이나 비지니스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장 큰 적은 상대방을 얕잡아 보는 우리 마음속의 오만과 편견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