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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두환 박근혜

풍월 사선암 2013. 9. 13. 08:15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

 

전두환은 박정희 키즈였다. 전두환 신군부는 박정희의 야망과 성취에 매료됐다. 박정희의 국가 개조, 산업화 혁명은 전두환 세대의 롤 모델이었다. 박정희는 그들을 격려했고 밀어줬다. 전두환은 5·16(1961) 때 대위였다. 그는 육사 생도들의 5·16 지지 시위를 끌어냈다. 그는 국가재건 최고회의 민원비서관이 됐다. 대위 때다. 그 무렵 그의 기억은 이렇다.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 때 나보고 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했다. 그래서 저는 군대에 있겠습니다. 군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박 대통령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았다. 1년에 한두 차례 청와대로 나를 불렀다. 나는 육영수 여사가 만든 분식을 두 그릇이나 비운 적도 있다.” 박정희는 전두환을 권력 주변에 두었다. 수경사 30경비 대대장,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 보안사령관으로 중용했다.

 

전두환은 사조직 하나회 회장’(12·12 재판 중 전두환 표현)이었다. 윤필용 사건(73)은 하나회를 집단 예편의 위기로 몰았다. 박정희는 전두환을 구제해 주었다. 전두환 그룹은 박정희 친위세력을 자임했다. 12·12 쿠데타는 전두환 신군부의 승리다. 정승화의 구군부는 퇴출됐다. ·구의 충돌에는 10·26을 둘러싼 논란과 갈등이 깔렸다.

 

5공 주역들은 그 사건을 이렇게 정리한다.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의 망발과 패륜, 추종 세력을 제거했다. 그 덕분에 박정희 시대의 치적이 결정적으로 보호됐다. 그때 김재규를 민주투사로 옹호하는 세력도 있었다.” 요즘 5공 사람들은 그 당시를 회고한다. 거기에는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불만과 섭섭함이 깔려 있다. 검찰수사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 박근혜에게 5공 시절은 가슴 아프게기억된다. “청와대를 나온 이후 정권 차원에서 아버지에 대한 매도(罵倒)가 계속됐다. 새로운 권력에 줄을 서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거짓과 추측, 비난으로 매도, 왜곡된다면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헐뜯기와 권력 배신-. 박 대통령은 개탄과 분노를 절제 속에 말(90, 인터뷰 집)과 글(2007, 자서전)로 표출해 왔다.

 

집권 초기 5공 정권은 박정희 시대와 차별화에 나섰다. 그런 통치 구상은 밑으로 내려가면서 거칠게 실천된다. 사생활도 주시 대상이 된다. 박 대통령은 “5공 시절 아버지 추도식을 공개적으로 치를 수 없었다. 집에서 동생들과 조용히 제사를 지냈다고 했다.

 

987월 김대중(DJ)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들을 초청했다. 청와대 부부동반 만찬이다. 그 자리에서 주요 발언자는 전두환이었다. 만찬 뒤 그는 따로 청와대 본관을 구경했다. 그가 전직대우를 제대로 받은 드문 사례다. DJ는 전두환의 신군부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권력은 역설로 작동한다.

 

전두환은 백기 투항했다. 가족 일가의 추징금 납부 계획을 내놓았다. 민정기(전 비서)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 가족은 세상과 싸울 생각도 힘도 없다고 한다. 전두환은 골목성명(9512) 때의 기세도 없다. 9712월 말 출옥 때 드러낸 활달함도 사라졌다. 그는 그때 교도소에 가지 마시오라고 했다.

 

그의 측근도 단출해졌다. ‘전두환 추징법의 통과 장면은 외로운 처지를 실감시킨다. 강창희 국회의장은 순서대로 방망이를 두들겼다. 그는 부의장에게 의사봉을 넘기지 않았다. 강창희의 초기 경력은 육사 선배 전두환이 만들어줬다. 37세 때 그는 총리 비서실장이 됐다. 강창희의 무심한 표정은 세상사 무상함을 드러낸다.

 

전두환의 12·12는 전광석화(電光石火)의 결과다. 그는 6·10 항쟁을 6·29 연출로 반전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추징금 행태는 시간 끌기와 버티기였다. 그 추함과 졸렬함은 정치적 업보를 키웠다. 조롱과 수모를 자초했다. 5공의 객관적 평가 분위기를 스스로 헝클어트렸다. 12·12 쿠데타, 광주민주화 탄압, 5공 비리는 과오다. 물가 안정, 젊은 세대 취업 보장, 올림픽 유치는 그 시대의 성취다.

 

박근혜정부의 원칙과 일관성은 뚜렷한 돌파력을 갖고 있다. 추징금 문제 해결도 그 결실이다. 박 대통령은 역대 정부가 해결 못하고 새 정부가 의지를 갖고 해결하려 한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정치자금 논쟁에서 자유롭다. 과거 대통령들과 다르다. 그것은 권력의 특별한 경쟁력이다.

 

박 대통령은 호찌민 묘소에서 아버지 시대의 베트남과 화해했다. 박근혜 식 역사 정리는 품격과 미래 지향이다. 전두환의 추징금 납부 의지 표시는 늦었다. 사회적 갈등과 낭비는 컸다. 이제 그를 전직들의 역사 무대로 보내줘야 한다. 그것이 다수 국민의 원숙한 바람이다. 그것이 시대의 품격과 미래 지향의 풍토를 다진다.

 

[중앙일보] 입력 2013.09.13 00:31 / 박보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