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길을 찾는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 간다

풍월 사선암 2013. 9. 4. 08:39

 

길을 찾는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 간다

 

9월의 첫 출근날이던 어제 아침, 버스를 타고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다 새로 바뀐 시구를 보았다.

 

또로 또로 또로 / 책 속에 귀뚜라미 들었다 / 나는 눈을 감고 / 귀뚜라미 소리만 듣는다

(김영일의 동시 귀뚜라미 우는 밤’).

 

교보생명 건물에 걸린 광화문 글판이다. 가을이구나.

서울 중심가의 계절 변화는 광화문 글판이 옷을 갈아입으면서 시작된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노염(老炎)마저 풀 죽은 기미가 완연했다.

모기와 임무교대한 귀뚜라미 소리가 솔솔 귀를 간질이던 터였다.

게다가 9월은 독서의 달.

 

초창기 홍보 위주이던 광화문 글판이 달라진 것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였다.

신용호(1917~2003) 당시 교보생명 회장이 홍보는 생각 말고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자

제안해 시를 내걸기 시작했다.

광화문 네거리에 사옥을 지으면서 지하 금싸라기 공간에 상가를 들여 돈 벌 생각하지 않고

책방(교보문고)을 낸 이다운 발상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교육보험을 창안하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서점을 차린 신용호 본인은

정작 무학(無學)이라는 점이다. 초등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했다.

 

신용호는 전남 영암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폐병에 걸려

보통학교(초등학교) 입학 시기를 놓쳤다.

친구들이 4학년 되던 해 들어가려 했지만 나이 많고 정원이 찼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집에서 독학하던 그는 17세부터 작심하고 3년간 천일독서를 한다.

1000일간 도서관·지인들로부터 수많은 책을 빌려 독파했다.

그리고 가출해 서울로, 다시 중국 다롄(大連)으로 건너가 맨손으로 사업을 일으켰다.

하루 4시간 이상 자지 않고 견뎌낸 천일독서가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여기까지는 웬만큼 자수성가한 사람이면 이력서에 포함될 만하다.

그러나 신용호는 더 나갔다. 많은 업종 중에서 보험, 그중에서도 교육보험을 선택한다.

형제 한 명이 일제 시절 보험회사에 다녔던 인연과 대학이 우골탑(牛骨塔)’으로 불릴 정도로

서민 가장의 허리가 휘던 실정을 고려했다.

1958년 대한교육보험을 세울 당시 상법은 보험회사명에 생명을 넣게끔 돼 있었다.

그는 김현철 재무부 장관을 몇 달간 쫓아다니며 설득해 교육보험으로 인가받는 데 성공했다.

세계보험협회(IIS)의 세계보험대상 수상, 세계보험 명예의전당 헌정, ‘보험의 대스승추대 등은

교육보험을 창안해 키운 업적 덕분이었다.

 

고 신용호 회장 10주기를 맞아 내일 추모의 밤, 사진전 등 기념행사가 열린다.

고인의 좌우명은 길을 찾는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 간다였다.

대학 진학률이 70%를 넘는 요즘, 최고 학부를 졸업한 젊은이들이 공무원·교사 등

익숙한 길을 찾는 세태를 고인은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주머니가 두둑하면 지능지수(IQ)도 높아진다

 

최근 재미있는 연구결과가 나왔는데, 지능이 주머니사정에 따라 즉각 변한다는 내용이다.

미국 하버드대 등 연구진이 과학전문지 사이언스 최근호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경제 상황의 변화에 따라 지능지수(IQ) 검사를 했더니 결과에 명확한 차이가 났다는 것이다.

한 예로 인도 사탕수수 농부에게 수확 4개월 전과 수확 후 각각 IQ 테스트를 했더니 수확 후

IQ가 수확 전보다 9~10포인트나 높았단다. 가난은 심리적 위축이나 생활의 어려움을 넘어

아예 두뇌마저 위축시켜 가난을 극복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수성가 성공신화가 유난히 많은 우리 기득권층은 가난해서 머리가 나빠진다는 사실보다

머리가 나빠서 가난해진다는 데 더 큰 믿음을 갖는다.

그래서 성실하고 의지가 강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를 퍼뜨린다.

물론 모두 가난했고, 신분상승도 자기 하기 나름이었던 신화의 시대가 있었다.

한데 그 시대는 끝났고 우린 부익부빈익빈 시대에 산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가 말한 시장경제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

심화되는 불평등의 사회다(불평등의 대가, 열린책들).

이 시대엔 의지만 있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수많은 논쟁거리를 던졌던 경제민주화논의를, 개인적으론 이런 현실인식에서 출발했다고 믿었다.

한데 관련 법안은 재벌에 대한 보복 법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규제일변도로 가더니,

이내 대통령이 직접 독소조항은 바로잡겠다며 물러섰고,

재계는 때를 만난 듯 실질적 입법조치를 하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어째 전반적으로 갈지()자 걸음을 보는 것 같다.

이번엔 대통령이 중산층 70% 복원, 고용률 70% 달성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주문하며,

창조경제가 해답이라고 했다. 숫자와 용어로 장식된 수사학으로 경제는 민주화될까.

 

9월이다. 2년 전 이맘때엔 자본주의의 심장부 미국 뉴욕 월가가

우리는 99%”라고 외치는 시위대에게 점령당했다.

경제력이 집중된 상위 1%와 나머지 99%의 대립은 이 시대 자본주의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떠올랐다.

중산층 회복을 외치는 건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이 시점에 스티글리츠 교수가 제시한 상위 1%의 각성은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1%의 운명은 99%의 운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인식.

50년 후 부유층이 소외와 절망의 사회 속에서 폐쇄된 그들만의 세상에 살게 될는지,

만인을 위한 자유와 정의가 실현된 공동체에서 살는지는 이런 인식 여하에 달렸다는 각성 말이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