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MBC사우회

대한민국 대표 연출가 표재순

풍월 사선암 2013. 9. 10. 17:44

 

연극과 드라마, 뮤지컬을 비롯한 무대 예술은 물론 올림픽과 월드컵과 같은 국가의 주요 대형 행사까지 연출을 도맡아 대한민국 연출 역사의 증인이라 불려온 연출가 표재순.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실험정신과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연극과 드라마를 통해 민족과 나라사랑에 힘쓰고 있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희 집은 원래 농사짓는 집안이었어요. 밭이 많아서 농사도 지었고, 저희 큰형님은 상업에 종사하셨기 때문에 저희 집은 농사꾼장사꾼 집안이었다고 할 수 있죠. 저는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그 당시 왕십리는 변두리였기 때문에 요즘처럼 도심 한 가운데서 지내는 그런 생활하고는 달랐어요. 그래서 주로 들판에서 노는 경우가 많았지요. 어린 시절에는 장난기도 많고 호기심도 많아서 여러 사람을 괴롭히기도 했어요. 그래서 혼도 많이 나고 매도 많이 맞았죠.

 

그러다가 6·25가 나고 저희 가족은 대구로 피난을 갔습니다. 대구에 도착해서는 식구들이 여기 저기 떨어져 살게 됐고, 저는 큰누님 댁에서 기거를 했어요. 그 시절에는 누구나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 일을 해야 하고 그래서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1년 반 정도 일을 했어요.

 

거기서 나온 후로는 대구역에 있는 시쳇말로 양키시장이란 곳에서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깡통 통조림을 파는 장사를 했어요. 그때가 중학교 2학년 올라갈 무렵이었으니 소년시절이었죠. 또 당시 화폐로 원가가 만 오천 환 정도하는 아지노모토라는 일제 조미료를 팔았어요. 나중에 우리가 쓰게 된 MSG 조미료의 일본 이름이 아지노모토거든요. 그 조미료를 미군 부대 중개상을 통해 받아서 시내에 직접 배달 다닌 거예요. 대구 시내가 별로 크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다니면 대구 시내를 한 바퀴 다 돌 수 있었는데 수입이 제법 됐어요. 그렇게 직접 배달도 다니고 냉면집, 중국집을 다니면서 조미료를 팔았는데 인기가 좋았죠. 그때는 자전거도 없을 때여서 포대에 짊어지고 다녔어요. 제가 장사를 잘하니까 우리 큰형님이 이 녀석은 장사에 소질이 있다. 상업학교에 보내야겠다.”하시면서 상과대학에 보내려고 하셨는데 저는 문과대학에 갔죠. 그때 큰형님이 많이 실망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연극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는데, 외국 작품을 들여와 우리들이 직접 번역을 하고 연출을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연극으로는 처음 소개되는 것이었죠. [더 레인 메이커]라고 미국 작가의 작품인데 후에 영화가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됐어요. [비는 행운을 싣고]라는 제목으로 버트 랭커스터캐서린 헵번이 주인공이었죠. 내용은 사기꾼 이야기인데 그 사기꾼 이름이 스타벅이었어요. 제가 맡은 역은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의 약혼자였죠. 첫 무대에서 50마디 이상을 했는데 얼마나 긴장하고 힘들었던지 온몸이 다 땀으로 젖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이후 연기는 두 번 다시 안 하리라 생각했죠. 그래서 스태프로 전향한 거예요. 무대감독을 시작으로 조연출에서 연출로 말이죠. 사실 연극에 처음 참여한 것은 한참 거슬러 올라가서 초등학교 4학년 학예회 때였어요. 대사 한마디 없는 엑스트라였어요. ‘동명성왕이라는 연극이었는데 동명성왕 궁궐 앞을 창 하나 들고 한 시간 내내 서있는 그런 문지기요. 그러고 보면 제 연극 인생의 첫 출연이 바로, 대사 한마디 없는 궁궐지기 엑스트라였던 거죠.

 

본격적인 연출은 1963년 극단 산하에서 [잉여인간]이라는 작품으로 시작을 했고, 1964년엔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기념으로 [말괄량이 길들이기]라는 작품을 했어요. 그리고 이듬해 미국 작가 토마스 울프의 자서전적인 작품을 각색한 [천사여 고향을 보라]는 작품으로 처음으로 연극 신인상을 탔습니다. 그때 미국의 유명한 여배우였던 헬렌 헤이스가 제 연극을 보러 오셨는데 꽤 칭찬을 해주셨어요. 그렇게 첫 신인상을 받고 난 이후 일본에서 열린 한국영화연극예술상에서 연출상, 마지막에 대상과 작품상도 받았어요. 관에서 주는 상은 못 받아도 민간에서 주는 상은 좀 받은 편이죠.

 

대학 졸업 후엔 군대에 다녀왔어요. 군대를 제대하고는 집안 일을 도와야 했어요. 당시에 저희 집이 명동과 중앙시장에서 식료품 가게를 했었는데 가게 일을 돕고 있었죠. 그 무렵 196311월로 기억되는데, 극단 산하가 창립되었고 창단 동인으로 참가했는데 어딘가 기록이 잘못돼서 실험극단 단원으로 되어있더군요. 실험극단은 1960년 준비 과정에서 잠깐 참여를 했었고 저는 그해 군대에 갔거든요. 제가 군대 가있는 사이에 실험극단이 창단되었기 때문에 저는 실험극단과는 그리 깊은 관계가 없습니다. 1970년대에 한번 객원 연출자로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란 작품을 올린 게 실험극단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맺은 인연이에요. 그 후 극단 산하에서 연극을 계속 해왔고 1976년에 현대극단으로 옮긴 이후 뮤지컬 중심으로 공연을 했죠.

 

젊은 시절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의 표재순 감독. 어려서부터 연극을 좋아했던 그는 대학 때 극단 창단 멤버로 활동했다. 이후 가업을 도와 장사를 하다가 다시 무대로 돌아와 연극 연출을 맡았다. 이어 TBCMBC, SBS로 옮겨가며 30여 년 간 방송국에 몸담으며 여러 편의 드라마를 제작했다.

 

사실 연극만으로는 생활을 이어가기가 힘들었어요. 어렵고 촉박하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제일 큰 이유는 아내 때문이었어요. 제가 집안일을 도우려고 가게 일을 하면서 중간에 짬짬이 연극을 올리고 있었는데 아내는 그게 싫었나 봅니다. 어느 날, 자기가 장사꾼에게 시집 온 줄 아느냐고 큰소리를 치더군요. 그 말이 저에겐 쇼크였어요. 그래서 바로 장사를 그만두고 지금 JTBC의 전신이었던 동양TV로 가서 아침 프로그램부터 시작을 했어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후라이보이 곽규석입니다가 오프닝 멘트였던 곽규석 선생님의 프로였어요. 거기서 모닝 쇼를 좀 하다가 원래 드라마를 했기 때문에 드라마PD로 옮겨 3년 정도 있었죠. 그러다 문화방송이 생기면서 자리를 옮겨 드라마PD로 쭉 일했고 나중엔 이사직까지 맡게 됐죠. MBC에는 20년간 몸담고 있다 그만두고 1년 정도 쉬고 있는데 서울방송, SBS가 개국하게 돼서 그곳에서 전무로 3년 있었어요. 그 후 다시 프로덕션으로 옮겨서 4년을 일했고요. SBS에서의 7년까지를 합하면 방송국에서 30년간 생활을 한 셈이죠.

 

야외 촬영장에서 촬영 스태프 및 연기자들과 가마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했다.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표재순 감독. 그 다음은 탤런트 김영란씨, 표감독 왼편에 촬영 감독이 카메라를 안고 있다. 영상장비가 발달하지 않았던 70년대까지 방송국에서도 야외 촬영 때는 영화 촬영용 필름 카메라를 사용했다.

 

어느 쪽이다 딱 집어서 얘기할 수가 없는 문제죠. 텔레비전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매력이 있거든요. 카메라를 통해서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제가 연출한 드라마는 일시에 전국에 나가잖아요. 지금으로 보면 전 세계로 나간다고 봐야 되겠죠. 반면에 연극은 내가 티켓을 직접 사가지고 가야 볼 수 있는 거고요. 연극은 그렇게 관객층을 대상으로 가까이에서 실제로 호흡을 하니까 생생해서 좋고, 텔레비전은 모니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니까 좋은 거죠. 그렇게 차이점이 극명하기 때문에 연극과 텔레비전 드라마를 구별해서 애착을 두지는 않습니다. 매체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만큼 각 장르의 특징이 있고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죠.

 

흥행이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대중성이 있다는 뜻이죠. 그런데 연극의 경우 그렇게 흥행을 하기가 사실 가뭄에 콩 나듯 드물어요. 전에는 연극을 대극장에서 공연했습니다. 1년에 한 번 내지 두 번이었죠. 왜냐면 연극을 할 수 있는 극장이 없었으니까요. 명동에 있는 가장 큰 극장이 800석 정도 되었는데 리모델링된 지금의 명동극장입니다. 그 다음은 지금 시의회 자리에 있던 세종문화회관 별관이었죠. 거기가 1,000석 정도 됐어요. 그 당시에는 공연장이라고는 그렇게 두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그 외에는 대학교 강당들이었고요. 그때는 극단이 10개가 조금 넘는 시절이었으니까 제작비가 있어서 부지런하게 만들어 낸다고 해도 1년에 드라마 2, 연극 2편 정도 올리면 잘하는 거였어요. 게다가 그때 연극은 단막극이 아닌 장막극 위주였죠. 세계 유명 작품이나 최신작을 올렸는데 관객이 별로 오지 않았죠. 그래서 주로 여대생들을 상대로 하는 드라마를 많이 만드는 경향이 있었죠. ‘카페 드라마라는 것까지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연극에서 흥행을 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러다가 1970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장충동에 국립극장이 생겼고 제가 1976년에 [빠담빠담빠담]으로 뮤지컬을 시작했어요. 외국 작품이 아닌, 우리 작품인 창작극이죠. 그게 흥행을 했는데 연극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뮤지컬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해서 뮤직비디오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빠담빠담빠담]이 잘 나가니까 대한민국 연극 60년사를 말아먹는다는 기사가 나왔고 그로 인해 신문사와 마찰이 생겼어요. 왜 연극 무대에 코미디언이 나오고 가수가 나오느냐, 이게 쟁점이 된 거예요. 그래서 일곱 번이나 논전이 벌어졌어요. 그러다가 흐지부지 되어버렸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했죠. 저희가 왜 60년 연극을 말아먹겠어요. [빠담빠담빠담]도 창작극이었는데 말이죠. 그로부터 10년도 안 돼서 우리한테 화살을 쏘던 분들이 전부 다 뮤지컬 형태로 수입품을 가져다가 무대에 올리더군요. 지금은 뮤지컬 시대 아닙니까? 이제 와서 돌아보면 사필귀정이고 부끄럽지 않은 일을 한 것이지만 그 당시를 떠올리면 억울했다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죠. 그리고 그 당시는 저도 해적판을 많이 올리기도 했어요. 지금과 같은 저작권법이 없었고 우리나라가 국제 협약에 가입이 안 되어있기 때문에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피터팬], [오즈의 마법사] 같은 작품들을 올렸었죠.

 

민족혼 부활 프로젝트의 첫 결과물은 윤동주 시인에 관한 연극이었다. 2004년 조한신 작가와 함께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를 그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은 2007년 일본에서 공연하는 등 최근의 연극으로는 드물게 3년 넘게 국내외에서 공연됐다. 앞줄 맨 왼쪽에 앉은 이가 표 감독이다.

 

보고 즐기는 공연보다는 의미 있는 공연을 연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순수연극의 자리를 찾았고 그 일환으로 해마다 한편씩 역사적인 인물을 다뤄서 지금까지 네 분의 연극을 만들었어요. 앞으로 여섯 분 정도만 더 하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첫 번째는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두 번째는 안중근 의사를 다룬 [대한국인 안중근], 세 번째가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의 면암 최익현 선생님, 금년(2012)에는 월남 이상재 선생님, 이렇게 네 분의 삶을 연극으로 올렸어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국사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잖아요. 게다가 역사 과목은 학교에서도 고등학교 1학년만 필수더라고요. 심지어 국가에서 보는 고시도 국사는 선택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역사를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면 어디서 가르칩니까? 국사를 모르면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평생 연극을 해온 사람으로서 연극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우리 역사를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가르쳐야겠다는 그런 사명감과 의무감이 들어서 시작을 한 프로젝트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도 한계가 있어요. 역사의 전체적인 부분을 다 다룰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100년에서 120년 전 정도로 잘라서 인물을 선택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윤동주 시인의 서시는 잘 아는데 그분이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떻게 돌아가신 지는 잘 몰라요. 안중근 의사가 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했는지, 척살했는지에 대한 것도 15개 법정에서 나오는 증언이 있거든요.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쳐 준 적이 없어요. 아마 지금도 안 가르칠 겁니다. 그런데 우리 연극을 본 사람들은 다 알게 됐을 거예요.

 

저희 연극은 국내와 해외로 순회공연을 다니는데, 티켓을 돈 받고 팔지는 않습니다. 상업적인 공연이 아니라 전 좌석이 초대로 이루어지는 공연이거든요. 그래서 후원자를 구해서 무료 초청하는 형식으로 연극을 해요. 올해는 월남 이상재 선생님의 극을 무대에 올렸는데, 이상재 선생님은 YMCA 초창기 총무를 맡으셨던 분이고,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시면서 일본과 대항했던 선각자인데 이분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아는 분이 많지 않았어요. 몇몇 대학생들에게 월남 선생을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이북에서 탈북한 사람이냐고 되묻더군요. 우리가 이런 정도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분께서 돌아가셨을 때 20만 명이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국민적 추앙을 받던 인물이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이런 기록들을 가지고 연극을 통해서나마 다음 세대들에게 역사적 인물의 이야기를 전달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느껴서 지금까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거죠. 이제 다음 인물을 위해 또 다른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나이까지 연극을 계속하는 이유는 흥행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민족혼 부활 프로젝트의 세 번째로 면암 최익현 선생을 다룬 연극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스태프와 함께 한 기념 사진. 극작가 신봉승 선생이 극본을 쓰고, 연극인 오현경 씨가 면암 역을 맡았다. 앞줄 의자에 앉은 이 중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표감독, 다섯째가 주인공 오현경씨다.

 

민족혼을 생각한다는 것은 곧 나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나라 사랑의 길은 여러 가지가 있겠죠. 과학을 하는 분은 과학 분야를 개척함으로써, 독립운동을 하는 분은 독립운동을 통해, 또는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작은 일을 하더라도 자신이 하는 일이 국민에게, 민족에게 보탬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나라 사랑이거든요. 나라가 없이는 민족도 없는 겁니다.

 

제가 무대에 올리고 싶은 분들은 우리의 사표(師表)가 되고 스승이 된 분들이죠. 그래서 그분들의 생을 좀 더 부각시켜서 널리 알리는 것도 결국 나라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민족혼 부활 프로젝트를 시작한 거예요. 글로벌 시대에 나라와 민족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느냐고 말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조들을 기억하고 지나온 역사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나라를 사랑하면 그것이 결국은 세계까지 흘러가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기초로 글로벌 시대 속에서 역량을 발휘하게 되는 거죠. 요약하자면 우리의 기초, 근간이 되어야 하는 것은 나라 사랑이라는 겁니다. 제가 지금은 역사에 남고 기억에 남는 분들만 무대에 올리지만 사실 더 중요한 분들은 작은 일에 충실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분들을 헤아린다면 수천, 수십 만, 수백 만도 넘겠죠. 그분들도 다 나라 사랑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전혀 이름 없는 분들, 들풀처럼 살아간 분들, 할 수만 있다면 그분들의 이야기도 무대에 올리고 싶습니다. 민족을 사랑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들춰내서 널리 알리는 것이 우리의 민족혼을 이어가고 지켜내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드라마의 흐름을 살펴본다면, 우선 기술의 변화에 따라서 달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정권이 바뀜에 따라서 드라마의 방향도 많이 달라졌고요. 우리나라 드라마는 1956년 처음으로 시작됐는데, 그때만 해도 아주 원시적인 수준이었죠. 라디오에서 드라마를 내보낼 때만 해도 재연 연극을 스튜디오로 옮겨서 그대로 중계하는 형식이었어요. 그 다음에는 실제 연기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고요.

 

그 후 1960년에 처음으로 텔레비전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그 시작을 계기로 일일 연속극도 만들어지고 한 주에 한 편씩 하는 월요 드라마, 화요 드라마, 수요 드라마 등 일곱 편이 매일 생방송으로 나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긴장도 많이 했어요. 그 이후에 VCR 테이프가 도입됩니다. 그건 곧 생방송이 없어진다는 이야기였죠. 사전에 녹화를 해서 방송에 내보내게 된 것이죠. 1980년대 들어가면서는 컬러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됐어요. 이것은 아주 큰 혁명이었죠. 그리고 1995년에 케이블 방송이 만들어졌어요. 케이블 시대가 되면서 또 양상이 달라졌고, 이제 디지털로 바뀌는 시대인데 이런 혁신이 있을 때마다 방송의 큰 흐름이 바뀌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평론가 이어령 선생과 건축 전시회에 참석한 표재순 감독. 표 감독은 88 서울 올림픽의 개회식과 폐막식 연출을 맡은 총감독으로, 이어령 선생은 당시 88 서울올림픽 기획단장으로 함께 일했으며 각종 문화행사에서 손발을 맞춘 파트너이기도 하다.

 

1988년에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의 개막식과 폐막식 제작단장 겸 총연출을 맡았습니다. 연출이라는 게 혼자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희 상위 기관으로 기획단이 있었는데 이어령 선생님, 한양순 선생님, 변종화 화백 등 역량 있는 분들과 함께 진행한 거예요. 그분들이 작가들에게 자문을 받아 먼저 대본을 꾸미죠. 특히 올림픽 개폐회식 대본이라는 게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1차 대본을 가지고 IOC 본부에서 헌법 조항에 맞춰서 인증을 하고, 승인이 나게 되면 그것이 다시 저희에게 와서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죠. 저희가 아이디어를 내고 다시 기획단으로부터 아이디어를 받고 서로 끊임없이 움직였어요. 11시면 박세직 조직위원장이 회의를 소집하고, 저희는 밤새도록 회의하고 계획한 것을 실행하기 위해 확정하는 시간을 거치죠.

 

◀방송국에서 드라마를 제작해온 표재순은 1988년 서울에서 열린 88 서울 올림픽의 개막식부터 폐회식까지 공식 행사의 총감독을 맡았다. 당시 군부대와 각급 학교에서 동원된 수만 명의 집단 퍼포먼스들을 하나의 흐름을 갖도록 짜 맞추는 연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IOC에 인증 받은 것은 기획단에서 맡아 하셨고, 이어령 선생님이 주로 전체를 주관했어요. 아이디어도 많이 내주셨고요.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전체가 정리되고 기획단에서 진행하라고 허락하면 저희는 그걸 가지고 실제화 시키는 작업을 했어요. 이 모든 것이 협력해야만 한 덩어리가 돼서 개폐회식이 이루어지거든요. 저는 총연출로서 조정도 하고 기획된 내용을 실제화 시키기 위해 교통정리를 하는 역할이었어요.

 

올림픽 행사는 우리 한민족이 만들어낸 것이지, 어느 몇 사람에 의해서 완성됐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도 그 전체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고요. 그런 일은 결코 적은 인원의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폐회식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전 세계에 동시에 생중계가 되기 때문이에요. 국가 홍보로는 최고인 거죠. 그 짧은 시간에 한국이란 나라를 전 세계 사람들에게 부각시키려면 우리의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의 전통사상이 천지인(天地人)이잖아요. 하늘, , 사람이 한데 어우러진 삼재사상(三才思想)이죠. 그것은 우리 선조 때부터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였거든요. 올림픽 개폐막식은 그것을 기조로 해서 힘썼던 행사였습니다. 그 밖에 월드컵 전야제, 대전 엑스포, 하이 서울 페스티벌 등의 연출도 맡아 했습니다.

 

드라마는 각본에 의한 것이고 그야말로 소규모죠. 작가와 출연자들 그리고 스텝만 있으면 가능해요. 물론 많은 경우 30명에서 50명까지도 필요하고 한번에 몇 천 명이 모여서 대형 촬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개 연습도 충분히 하고 준비된 채로 움직여요. 그런데 대형 행사의 경우 일회적인 이벤트거든요. 그게 큰 차이예요.

 

드라마 녹화 때 NG를 내면 다시 찍으면 됩니다. 드라마의 경우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다시 찍을 수 있는데, 행사는 일회성이기 때문에 한번 실수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건 연극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네요. 연극도 일회성이니까요. 연극을 보러 와서 배우가 실수한 모습을 보면 그 관객은 다신 안 오거든요. 이벤트도 그런 면에서 같아요. 한번 실수하면 그게 끝이니까요. 그러니까 콘티에 의해서 녹화하는 경우하고는 전혀 다른 거죠. 그래서 국가의 주요행사 연출은 몇 배의 힘이 더 들어가죠. 때로 천재지변의 영향을 입기도 하는 등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많습니다.

 

정신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거죠. 시간에 맡겨야 하고요. 그 스트레스라는 건 이루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항상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해요. 가능하면 주어진 일을 처리해 나갈 때 웃으며 하자는 게 제 신조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겨 나가는 거죠. 그리고 주변에서 좋은 의견들을 많이 주시니까 그걸 취합하며 고쳐 나가기도 해요. 내가 고집부릴 게 하나도 없거든요.

 

저는 좋은 의견이 있으면 다 수렴해요. 그러다 보니까 힘들 때도 있어요. 귀 있고, 눈 있고, 입 있는 분들은 전부 다 한마디씩 쏟아 놓으니까 그걸 다 수렴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참 어려운 노릇인데 그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는 나를 죽이는 수밖에 없더군요. 내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죠. 그러면서 최선을 찾아가는 것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껏 살고 있습니다.

 

 

단일색은 아닌 것 같아요.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면 장르만 바뀌었을 뿐이지 제가 연출을 한 것은 변함이 없어요. 젊은 나이에 장사를 한 경험 또한 제 인생 장르 중 하나로 저에겐 소중한 경력으로 남아 있죠. 대학교 가정학과에서 실습할 식품을 납품하는 일도 해봤고, 중앙대학교에서 궁중요리를 담당하셨던 황혜성 교수님의 실습 재료도 제가 납품을 했어요. 서울 시청, 총리 공관 등에 직접 자전거 타고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배달 다녔던 장사꾼이었단 말이죠. 누가 저를 보고 그런 일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제 인생의 색깔은 한국의 전통 색깔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방색(五方色)이랄까? 오방색은 (), (), (), (), ()’의 다섯 가지 기본색이죠. 청은 동쪽이고, 서쪽은 백이고, 북쪽은 흑, 남쪽은 빨간색, 가운데는 황이죠. 우리 비빔밥을 보면 위에 올라오는 고명이 오방색 아닙니까? 제가 연출이라는 한 길을 걸었지만 오페라, 뮤지컬, 이벤트 행사, 드라마, 연극 등 여러 가지를 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비빔밥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빔밥을 좋아해서 그렇기도 하고요.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색깔은 다 한데 뭉쳐진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 힘은 호기심이 아닐까요? 그 다음엔 열정이고요. 그렇게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돌이켜보면 살면서 이거 한번 해보면 좋겠다’, ‘이게 뭘까?’하는 호기심이 늘 끊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지치지 않는 열정이 결국은 여러 장르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연출가로 살아오게 만든 힘이 아니었나 싶어요.

 

저는 지금도 하고 싶은 게 많습니다. 목공 하는 사람을 만나면 목공 일을 하고 싶고, 미장이질 하는데 가면 미장이가 되고 싶고, 옻칠하는데 가면 저도 옻칠을 하고 싶어져요. 종이 만드는 예술가들을 만나면 그것도 배워서 하고 싶고요. 다른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하는 일을 보면 그게 그렇게 신기해 보이고 저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충만해져요. 이런 걸 보면 제가 아직도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표재순 감독 부부. 지치지 않는 열정과 호기심의 표 감독 곁에는 언제나 든든한 아내가 함께 했다. 덕분에 그는 늘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세상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기가 있겠죠. 저도 위기를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결정적으로 큰 위기라고 느낀 기억이 별로 없네요. 작은 위기는 많이 있어도 배가 침몰하거나 파선될 정도의 위기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어떤 문제에 대한 제 마음의 태도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지 않는 성격이니까요.

 

30년 다니던 방송국을 그만 둘 때도 위기로 생각지 않고 또 다른 기회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까지 위기를 찬스로 바꾸는 철학을 가지고 살아왔어요. 그게 긍정적으로 살아왔다는 또 다른 표현이 될 수 있겠죠.

 

◀작품 연출 회의 중의 표재순 감독. 그는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남을 배려하는 것이 삶의 교훈이라고 말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저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입장을 바꾸어서 이럴 땐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 늘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방송국 안에서는 분쟁이 생길 일들이 많잖아요. 연기자와도 그렇고 제가 간부를 맡고 있었으니까, 노조와 임금관계 등 많은 관계 속에 있었는데 그럴 때는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내가 탤런트라면 어떻게 말을 할까?’ 항상 그걸 먼저 생각하면서 상대방에게 답변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었어요.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는 중고등학교 때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이라고 네가 큰 사람이 되고자 하면 사람의 도리를 다해라그게 저희 학교 교훈이었어요. 이 말은 아직까지 마음에 남아 있는데, 다시 말해 네가 크고자 하면 남을 섬기라는 의미로 성경에도 있는 말씀이에요. 거기서 뽑아낸 거죠. 아펜젤러 선교사님께서 네가 크고자 하면 남을 섬겨라라는 말씀을 해주신 거예요. 그 교훈이 저는 참 좋았어요. 물론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살아서 걱정이지만요.

 

우리나라는 학력이 높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있어요. 학부형들도 학생들도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학력보다는 학생의 적성이 무엇인지, 뭘 잘할 수 있는지를 발견해 주는 거예요. 그것이 부모나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내 자녀, 내 제자가 무엇을 제일 잘하는지 살펴주는 게 대단히 중요한데, 그건 학교 공부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거든요. 저는 기본적인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적성이 뭔지, 뭘 잘할 수 있는지 발견하고 키워주는 게 우리의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해요. 다행히도 요즘 그렇게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긴 해요. 지금도 많이 달라지고 있잖아요. 대기업도 고졸 학생들을 인턴으로 쓰기도 하고, 학교 교육도 많은 변화가 일고 있어서 전망이 좋아 보입니다.

 

◀표 감독은 젊은이들에게 남을 쫓아가지 말고 자기 길을 갈 것을 권한다. 남의 뒤만 쫓다가는 매번 2, 3등에 머물 뿐 정작 자신의 삶은 없어진다는 것. 그는 실제로 제자들에게도 적성에 맞는 것이 무엇인가 찾아주고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을 찾도록 도와준다.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남 쫓아가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남 흉내 내면서 1등 하는 사람만 뒤쫓지 말고,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하면 10년 후에는 그 분야에서 1등을 할 수 있어요. 남이 가진 것이 좋아 보여서 그걸 흉내만 내다보면 정말로 자기가 잘 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게 되거든요. 적성도 못 찾을뿐더러 밤낮 2, 3등에 머무른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적성에 맞는 게 무엇인지 조기에 발견해서 한길을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표재순 감독은 사진이 거의 없다. 평생 연기자들을 찍기만 했지 정작 자신은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표 감독이 어렵게 시간을 내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제가 소띠거든요. 소는 평생 밭만 갈고 살잖아요. 밭 가는 것 말고 소가 뭐하겠어요. 열심히 밭을 갈아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와서 씨 뿌리고, 물주고, 꽃 피우면 그 다음엔 또 다른 사람들이 와서 열매를 따가죠. 돌아보면 저는 밭만 가는 인생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 제 맘을 알아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결국 밭이 제 맘을 알지 않을까 그런 결론이 나오더라고요.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웃곤 합니다.

 

제 주변에 계시던 분들이 많이들 가셨어요. 장례식장에 가보면 허무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솔로몬의 고백도 기억이 나고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성경 말씀도 있습니다만, 저는 이후에 어떤 인물로 남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제 성()이 표() 씨라서 제가 가끔 우스갯소리를 하는데요. 표시 안 나게 살다가 표시 안 나게 죽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이에요. 이 세상에 무얼 남기고 가겠으며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는 게 뭐 그리 중요할까요? 살아있는 동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다가 가면 그뿐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은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분별하고 침착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 인생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남은 시간 동안 무얼 해야 할까 고민 중에 있습니다. 꼭 하고 싶은 일은 지금 진행 중인 일인데요. 우리나라의 민족혼을 일깨우고 국민을 깨우쳐 주셨던 어른들의 생애를 연극 무대에 올리는 일, 그 일을 힘닿는 데까지 연극으로 담아 무대 위에 올리고 싶습니다.

 

표재순 /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학 때 극단 창단 멤버로 활약한 것을 계기로 연극 연출을 맡았고, 이후 TBC, MBC, SBS를 옮겨가며 30년간 드라마를 제작하였다. 연극과 TV 드라마, 뮤지컬을 비롯해 올림픽과 월드컵과 같은 국가의 주요 대형 행사 연출을 도맡아 대한민국 연출 역사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현재 민족혼 부활프로젝트로 연극 연출에 매진하는 한편, 문화예술 기획 분야의 거장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