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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대회 4연승 도전 '골프女帝' 박인비와 만났다

풍월 사선암 2013. 7. 14. 03:20

[김신영 기자의 별사람]

메이저대회 4연승 도전 '골프女帝' 박인비와 만났다

 

슬럼프 4, 죽을 것 같았던 시간티 박스에 서면 공포 그 자체였죠

2008US오픈 우승후 시련해도해도 안되고, 죽을 것 같았죠

정말 골프가 너무너무 싫었어요

신지애 등 동갑내기 활약 보며 열등감에 사로잡혀 잠도 못잤어요

 

'인비에게. 너의 이번 시즌은 점점 빠른 속도로 이 세상 수준을 초월하고 있구나. 시즌 여섯 번째 우승, 그리고 올해와 지난 세월 동안 네가 이뤄낸 모든 것을 축하하며.'

 

한국 여자 프로골퍼 박인비(25)1US여자오픈에서 우승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메이저 대회 연속 3승을 달성한 다음 날인 지난 2. 그의 이메일에 예상치 못한 한 통의 축하 메일이 들어왔다. 펜으로 쓴 서명이 붙어 있는 이 편지의 발송자는 '골프의 제왕'이라 불리는 아널드 파머였다. 1일 뉴욕주() 사우샘프턴의 세보낵 골프장 18번 홀에 박인비의 공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 골프사()는 큰 줄기가 다시 쓰였다. 골프가 대중화하기 이전인 1950년 베이브 자하리아스(미국)가 달성했던 '시즌 개막 후 3연승'이란 기록이 세워진 지 63년 만에, 이 기록을 다시 달성한 여성 골퍼가 탄생한 것이다. 미 언론은 필드에서 무표정하게 한 홀 한 홀을 점령해가는 한국인 골퍼 박인비에게 '침묵의 암살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박인비 신화'가 골프의 역사에 새겨지고 열흘이 흐른 지난 9일 캐나다 남부 소도시 워털루. 매뉴라이프 파이낸셜 LPGA 클래식이 열리는 그레이 사일로골프장 진입로엔 박인비의 사진과 '세계가 워털루에 온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11~14일 대회를 앞두고 이 골프장에서 토일섹션 Why?와 만난 박인비는 메이저대회 3연승에 대해 "감히 꾸지도 못했던 꿈을 갑자기 이룬 기분"이라고 했다. 그는 인터뷰를 약속한 방으로 들어오면서 교무실에 불려온 소녀처럼 두 손을 조몰락거렸고 인사를 건네자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침묵의 암살자'라는 무시무시한 별명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골프 입문 당시 영웅이었던 박세리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은 그는 과거 박세리처럼 '독하다'는 느낌도 주지 않았다.

 

박인비의 손은 손톱을 짧게 깎아 투박하고 그을린 '골퍼의 손'이었다. 손에 비해 얼굴은 하얘 보였다. 얼굴이 뽀얗다고 하자 박인비는 웃음을 조금 더 키웠다. "얼굴도 많이 탔는걸요. 사실 얼굴엔 자외선 차단제를 진짜 많이 바르긴 해요. 저도 결혼도 해야 하고관리해야죠."

 

한 번, 또 한 번 우승할 때마다 골프의 새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 스물다섯 살 박인비, 그는 "내 골프 인생은 봄을 지나 여름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요즘은 참 즐거워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잘하기까지 하고, 또 그 일로 돈까지 버니깐요, 하하."

   

가장 마음에 드는 별명 '침묵의 암살자'

 

박세리, 타이거 우즈와 동급으로 불리는 기분이 어때요?

 

"아휴, 제가 그 정도로 무언가를 굉장히 많이 이룬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 선수들과 비교되는 것 자체가 너무 낯설어요. 올해만 놓고 보면 두말할 것 없이 좋은 시즌을 보내고 있긴 하죠. 하지만 제가 프로 생활을 한 7년을 통틀어서 보면그런 대기록을 이룬 선수들과 비교하기엔 아직 한참 멀었어요."

 

돌부처, 여왕벌, 그리고 최근에 붙은 침묵의 암살자가장 맘에 드는 별명은 뭐예요?

 

"침묵의 암살자요! 한국 말로 번역을 해버리면 좀 세게 들리는데 영어로 '사일런트 어새신(silent assassin)'이라고 하면 어감도 괜찮고, 그만큼 카리스마가 있다는 얘기로 들려서 좋아요. 내가 코스 안에서 그만큼 강해 보이는구나이런 느낌이 드는 별명이에요. 제가 그렇게 해석을 한다는 거죠, 하하.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하면 모든 것에 좋은 쪽은 있는 거니까."

 

그래도 필드에서 너무 표정이 없는 것 같아요.

 

"저희 부모님도 늘 그 얘기를 하세요. 모션(움직임) 좀 크게 하고 웃고 하라고 만날 그러시죠. 저도 경기 끝난 다음에 녹화한 걸 보면 표정이 너무 없는 것 같긴 해요. '! 저 시점에선 웃었어야 하는데' '아이고, 웃으면 더 예뻤을 뻔했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요."

 

◀LPGA US여자오픈 우승 다음날인 2골프 제왕아널드 파머가 박인비에게 보낸 편지.

 

세리머니를 잘 안 하는 이유가 있나요?

 

"세리머니를 과하게 하고 오버 액션을 취하는 게불편해요. 자연스럽게 나오면 하겠지만 일부러 하려고는 안 해요. 제가 골프장 밖에서는 차분하고 이모션(감정)이 많이 없는 편인데 그런 상태가 골프장까지 이어지는 것 같아요. 골프라는 게 금방 버디도 하고 보기도 하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때마다 액션을 하면 감정 폭이 계속 업다운이 되니까(오르내리니까) 경기에 도움이 안 돼요."

 

차림도 수수한 것 같아요

 

"왜 흰색 긴 바지를 그렇게 자주 입느냐고들도 하시는데, 그냥 편해서 그런 거예요. 골프장이 덥다 보니까 연한 색 셔츠를 주로 입게 되고, 연한 셔츠 아래 어울리게 하려면 흰색 긴 바지가 제일 만만하거든요. 다리에 선크림 안 발라도 되고. 예전엔 귀고리도 하고 그랬는데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니까 골프 이외에는 다른 것에 신경을 잘 안 쓰게 되네요. 어느 날 보니까 귀고리를 하도 안 해서 귀 뚫은 것도 막혀 있더라고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메이저 대회 개막 후 연속 3승을 달성한 박인비를 지난 9일 캐나다 워털루의 골프장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매뉴라이프 파이낸셜 LPGA 클래식 참가를 위해 이곳을 찾은 박인비는감히 꾸지 못했던 꿈을 이룬 기분이라고 말했다.

 

긴 슬럼프 "차라리 포장마차를 해도 이것보다는"

 

박인비가 말하는 '힘든 시간'4년 동안의 긴 슬럼프를 뜻한다. 박인비는 19살이던 20087, '메이저 중의 메이저'라고 불리는 US여자오픈에서 프로 데뷔 이후 첫 승리를 거뒀다. 그러면서 박세리가 세웠던 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화려한 출발이었다. 당시 박인비의 소감은 "너무 빨라 두렵다"였다. 하지만 그 뒤 길고 어두운 슬럼프가 올 줄은 박인비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박인비는 이후 꼭 4년 동안 미국 대회에서 한 차례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신지애, 최나연 같은 동갑내기 골퍼들이 좋은 기록을 세우며 급부상했다. 박인비의 어머니 김성자씨는 "슬럼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골프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그때 골프 그만뒀으면 어쩔 뻔했어요.

 

"아무리 해도 점점 안 되는 거예요. 골프 때문에 불행했어요. 엄마한테 그랬죠. 조그만 포장마차를 해도 이것보다는 행복할 것 같다고. 무엇을 해도 골프보다는 나을 것 같았어요. 티 박스(공을 치기 시작하는 출발점)에 올라가면 공포가 엄습해서 칠 수가 없을 정도였었거든요."

 

그렇게 힘들었는데 그만두지 않은 이유는 뭐예요?

 

"그게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두려운 상태가 지속이 되다 보니까 그 공포가 몸에 익어서 점점 두려움이 잦아들었어요. 내성이 생겼다고나 할까. 처음에는 공이 옆으로 가면 죽어버릴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하도 옆으로 가니까 '그럴 수도 있지' 싶더라고요. 숲 속으로 공이 들어가는 것도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러웠는데 계속 들어가니까 익숙해지고그때 스포츠 심리학 전문가인 조수경 박사님을 만나 큰 도움을 받았죠."(조수경 박사는 박태환·손연재 등의 심리 상담도 맡는 스포츠심리학 전문가다.)

 

어떤 이야기가 가장 큰 도움이 됐나요?

 

"제가 골프를 안 그만두고 버틴 이유 중에 이런 게 있었어요. 내가 골프를 그만두면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무시할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늘 했어요. '실패한 사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 같은 말들을 되풀이해서 생각했고요. 생각이 꼬리를 물면 잠이 안 왔어요. 괴로웠죠. 조수경 박사님은 '왜 삶 전체를 골프와 연관지어서 생각을 하지? 네가 골프를 잘 치건 못 치건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계속 너를 좋아할 거야'라고 이야기해 줬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계속 두려움과 함께 살아야 했을지도 모르죠."

 

박인비는 슬럼프가 계속되자 2010LPGA2부리그 격인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어머니 김성자씨는 "'세리 키즈'(어린 시절 박세리를 보며 골프를 시작한 세대) 중에 가장 먼저 우승을 한 인비는 슬럼프를 겪는 동안 친구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열등감과 자기 비하가 심해져 괴로워했다. LPGA를 떠나 일본에 간 후엔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오히려 조금씩 평정심을 찾아가더라"고 했다. 그는 당시를 뒤돌아보며 "'이기는 습관'을 조금씩 되찾아가던 시기였던 것 같다"고 했다.

 

한동안 스폰서가 없어서 마음고생이 심했죠?

 

"스폰서 때문이 아니라 골프가 안 돼서 마음고생을 했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데 스폰서가 있으면 뭐해요. 미안하기만 하죠. 저는 돈이 없어서 투어를 못 다닐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스폰서 때문에 걱정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주위에서 우려를 하셨죠."(박인비의 아버지 박건규씨는 건실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면서, 12살 때 시작된 박인비의 골프 유학 생활을 뒷바라지했다.)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다고 하면, 혹시 섭섭한가요?

 

"헝그리하지 않은데 일부러 헝그리 정신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는 데 대해 감사하고 여유 있게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득이 될 수 있겠죠. 물론 '안 되면 말고' 식이면 좋은 여건이 독이 될 거고요."

 

◀지난 1LPGA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후 박인비(가운데)가 아버지 박건규씨(오른쪽), 어머니 김성자씨와 함께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모습 

 

"제 스윙? 하나도 안특이한데요"

 

슬럼프에 빠져 두려움을 친구로 삼아 지내던 박인비를 결정적으로 이끌어낸 사람은 스윙 코치이자 약혼자인 남기협 코치였다. 한국프로골프 투어에서 활동하던 남 코치는 미국 전지훈련 때 박인비를 처음 만나 친해졌다. 2007년 경주에서 열린 LPGA투어에서 다시 만나 연인 사이가 됐고 2011년엔 약혼했다. 남기협씨가 박인비의 스윙 코치를 맡으면서 전설의 '박인비표 스윙'이 탄생한다. 느리게 백스윙을 하고 공을 친 후 왼손이 끝까지 리드하는 것이 특징이다. 손목을 거의 꺾지 않아 톱(백스윙의 정점)에서 골프채가 하늘로 높이 세워진다. 임팩트(골프채가 공을 때리는 순간) 순간부터 시선이 공을 따라가기 때문에 골퍼들이 금기시하는 헤드업(head up·머리 미리 들기)을 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주말 골퍼들은 박인비의 스윙을 '꿩 잡는 게 매 스윙' '설렁설렁 스윙', 혹은 그냥 '박인비의 특이한 스윙' 등으로 부른다.

 

스윙이 특이하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데요.

 

"전 하나도 특이하지 않은데요? 제 약혼자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하지?'라고 하고요. 제가 손목이 잘 안 꺾이는 편이에요. 팔 위치나 어깨 위치는 정상 궤도 안에 있는데 손목만 안 꺾이기 때문에 (스윙 폭이) 짧아 보여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인다고 하는 것 같아요. , 저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안 써요. 저만큼 저에 대한 전문가가 어디 있겠어요."

 

'헤드업 금지'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박 선수의 자세 때문에 혼란을 느끼고 있대요.

 

"그럴 수도 있을 테지만옛날에는 프로들도 공이 있던 곳을 끝까지 보는 게 대세였어요. 정말 유연한 사람은 그렇게 스윙할 수 있어요. 그런데 끝까지 아래를 보려면 (몸의) 꼬임도 많아야 하고 자연스럽지가 않은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요즘은 억지로 더 머리를 아래로 두고 치는 게, '올드 스타일'(옛날식) 스윙이 되어가고 있어요."

 

박인비는 '골프는 인간의 본능에 반하는 스포츠'라는 통설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러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스윙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지금의 박인비를 만든 주역인 남 코치는 언론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날도 약혼녀가 미국의 골프 채널과 인터뷰 녹화를 하는 모습을 문밖에서 잠시 조용히 지켜보다가 돌아갔다.

 

남 코치님이 이런 '박인비표 스윙'에 대해 한번 설명을 해주시면 좋을 텐데

 

"글쎄요. 노출되는 걸 싫어하더라고요. 그냥 싫대요. 조용히 살고 싶대요, 하하."

 

친구들 "인비야, 연습 좀 해라"

 

박인비의 골프를 보고 많은 사람은 정확한 퍼팅에 놀란다. 올 시즌 박인비의 평균 퍼트 수는 LPGA 투어 2(28.43), 그린 적중 시 평균 퍼트 수는 1(1.702). 그런데 문제는 박인비가 왜 퍼팅을 잘하는지, 본인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해설자들은 '박인비가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워서 그렇다' 같은 그 나름의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명쾌한 해답은 아직 없다. 그저 '()이 좋다'는 말이 제일 자주 나온다.

 

''만 내세우면 서운하지 않나요? 운 좋아서 공이 잘 들어간다는 것 같아서.

 

"아니, 그런데 저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누구처럼 라인(공이 홀에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거나, 차근차근 걸으면서 발로 거리를 재거나 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감이라는 설명이 맞는 것도 같아요. 부모님한테 감사해야 하나? 하하."

 

피아노를 배워서 퍼팅을 잘한다는 해석엔 동의하나요?

 

"아이고, 피아노 배운 게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인가. 지금도 '엘리제를 위하여' 같은 곡 몇 개는 칠 수 있지만 너무 오래전에 배웠는걸요. 골프 처음 배울 때 운동 신경이나 리듬감 기르는 데는 도움이 됐을 수도 있겠네요."

 

주말 골퍼들 필수품인, 퍼팅 연습기도 있나요?

 

"시즌엔 언제고 필드에서 연습을 할 수 있으니까 가지고 다니진 않아요. 한국 집에는 있어요. 가끔 겨울에 퍼팅 많이 못 할 때는 저도 거기서 연습하고 그래요."

 

스윙 연습은 얼마나 많이 해요?

 

"전 연습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코스에서 연습하는 걸 즐기고, 별도 연습은 그냥 제가 만족하면 그만 해요. 애들(동료 골퍼들)은 저한테 연습을 너무 안 한다고, 넌 어쩜 그렇게 연습을 안 하느냐는 얘기를 많이들 하죠. 저희도 일종의 직장생활이라, 보통 아홉 시부터 다섯 시 정도까지 코스에 나와 있거든요. 라운드 끝나고 보통 한 시간 정도 연습들을 더 하고 가는데 저는 30분 정도 해요. 아침 몸 풀기도 다른 선수들 한 시간 반 하면 저는 한 시간 정도고요."

 

일부러 연습을 짧게 하는 건가요? 과거 박세리 선수는 '눈물 콧물 흘리며 죽도록 연습했다'고 했는데요.

 

"그냥 스타일이죠, . 공 하나를 치더라도 집중해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치자는 주의라고나 할까요. 저도 골프가 안 됐던 때가 있었고 그때 연습이 너무 부족해서 그런 걸까, 갈등했었어요. 그런데 많이 해도 적게 해도, 안될 때는 연습량을 아무리 늘려도 안되더라고요. 연습량이 실력과 꼭 비례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현재 전 세계 골프팬들의 시선은 박인비의 캘린더 그랜드슬램 달성에 집중되고 있다. 은퇴하기 전에 메이저대회를 모두 우승하면 되는 '커리어 그랜드슬램'과 달리 '캘린더 그랜드슬램'은 한 시즌 안에 메이저대회를 모두 우승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를 달성한 사람은 미국의 보비 존스(1930) 한 명밖에 없다. 다음 메이저 대회는 8월초에 열리는 브리티시오픈이다. 박인비 선수는 "도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고 조금 덤덤하게 말했다.

 

"아침은 꼭 한식, 햇반에 김이라도 싸서 먹어요"

 

부모님이 브리티시오픈에는 동행하시겠죠?(아버지 박건규씨와 어머니 김성자씨는 사업을 잠시 챙기러 귀국해 이번 대회에는 함께 오지 않았다.)

 

"지난주에야 참석하겠다고 확정을 하셨어요. 지금 호텔 방 뒤늦게 구하느라고 난리예요. 워낙 큰 대회라 방이 진작에 동났거든요. 부모님은 '소파에서 자는 한이 있어도 갈 거야'라고 하시죠, 하하. 엄마는 특히 밥 때문에 더 오려고 하실 거예요."

 

시합이 있는 날 아침엔 뭘 먹고 나가요?

 

"제가 정말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아침에 먹는 양식이에요. 맛이 없잖아요. 시합 날은 꼭 한식을 챙겨 먹으려고 해요. 엄마가 계시면 순한 국에 멸치조림, 계란찜 같은 가벼운 반찬을 해주세요. 엄마가 안 계시면 저는 직접 요리할 상황이 안 되니까 전날 저녁을 한식당에서 먹고 음식을 포장해 와서 데워 먹어요. 그것도 안 되면 햇반을 구해다가 참기름, 간장 비벼서 김에 싸서 먹기도 하고요."

 

7월 말에 한국에 올 예정이죠? 뭘 제일 하고 싶어요?

 

"저는 보통 '안 움직이는 것'을 제일 하고 싶어 해요. 일 년에 열 달은 비행기를 타고 돌아다니니까, 한곳에 정착해서 사는 걸 굉장히 부러워해요. 그래서 한국에 가면 보통 집에서 꼼짝을 안 해요. 무엇보다 한국은 배달시켜 먹는 음식이 아주 맛있잖아요. 통닭, 자장면 이런 거 시켜서 가족들이랑 강아지 세미랑 널브러져서 테레비(TV) 보면서 먹는 걸 좋아해요."

 

박인비는 1998년 박세리가 신발을 벗고 연못에 들어가는 투혼을 보인 끝에 우승했던 US여자오픈을 보고 골프를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강아지 세미는 박인비에게 처음 골프를 권했던 할아버지의 선물이었다. 박인비가 골프에 입문한 지 3년째인 2000년에 할아버지는 "대회 10등 안에 들면 강아지 사주마"고 약속을 했다. 박인비는 그해 대회에서 덜컥 우승을 해 강아지를 선물로 받았다.

 

골프 말고, 쉴 때는 뭐 하고 놀아요?

 

"스키를 좋아하는데 올해부터는 못 탈 것 같아요. 프로 생활하면서 부모님이 다친다고 말리셨지만 작년까지는 몰래 타고 그랬거든요. 그래도 올해는 책임감이 더 커졌으니까한국 드라마 보는 것도 좋아해요. 최근엔 '구가의 서'를 재미있게 봤고요, 연예인 중에는 조인성을 참 좋아해요."

 

박 선수는 혹시 다이어트 생각은 없나요?

 

"음식 조절이나 겨울에 근력 훈련을 하면서 약간 정도요? 조금 빠지면 보기 좋잖아요. 그렇지만 어차피 제가 이십 킬로 삼십 킬로 빼는 건 불가능하고요. 저는 먹는 것도 좋아하고, 먹고 싶은 건 먹고 살아야 한다는 주의거든요. 먹고 싶은 거 못 먹는 체조 선수나 그런 직업 있잖아요. 절대 그런 일은 안 할 거예요. 저는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해요!"

 

슬럼프에 다시 빠질까 봐 두렵지 않아요?

 

"한번 겪었으니깐, 괜찮아요. 초반에 겪은 게 오히려 잘된 것 같아요. 이겨낸 경험이 앞으로 올 것에 대한 두려움까지 없애줬어요. 앞으로 그런 시기가 다시 온다고 해도, 한번 해봤으니까 이젠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