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박제영 - 식구 외

풍월 사선암 2013. 5. 14. 00:11

 

누가, 인간에게 원숭이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주었나

 

박제영

 

1985년 대학 1학년 일반물리학 중간고사 때 일이다.

 

y축으로 y높이의 전봇대가 서 있고, x축으로 x거리 떨어진 곳에 포수가 서 있다.

전봇대 위에 원숭이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실수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원숭이를 맞추려면 포수는 몇 도 각도로 총을 쏘아야 하는가?

 

정답이 아크탄젠트 y분의 x이든, x분의 y든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정답 대신 질문을 해야 했다.

 

사람에게 원숭이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누가 주었나요.

사람이라면 떨어진 원숭이를 치료해서 다시 숲으로 돌려 보내야 하지 않나요.

 

f학점을 맞고 결국 공학도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28년이 지난 지금 아트탄젠트를 정확히 푼 친구들은 대학 교수도 되고

대기업 임원도 되고 잘 살고 있다.

나는 삼류 시인이 되었고 여전히 그때의 질문을 풀지 못하고 있다.

 

누가, 인간에게 원숭이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주었나

 

 

식구

 

사납다 사납다 이런 개 처음 본다는 유기견도

엄마가 데려다가 사흘 밥을 주면 순하디순한 양이 되었다

 

시들시들 죽었다 싶어 내다버린 화초도

아버지가 가져다가 사흘 물을 주면 활짝 꽃이 피었다

 

아무래도 남모르는 비결이 있을 줄 알았는데

비결은 무슨, 짐승이고 식물이고 끼니 잘 챙겨 먹이면 돼 그러면 다 식구가 되는 겨

 

 

아내

 

다림질하던 아내가 이야기 하나 해주겠단다.

 

부부가 있었어. 아내가 사고로 눈이 멀었는데, 남편이 그러더래.

언제까지 당신을 돌봐줄 수는 없으니까 이제 당신 혼자 사는 법을 배우라고.

아내는 섭섭했지만 혼자 시장도 가고 버스도 타고 제법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대.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버스에서 마침 청취자 사연을 읽어주는 라디오 방송이 나온거야.

남편의 지극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아내가 혼잣말로 그랬대.

저 여자 참 부럽다. 그 말을 들은 버스 기사가 그러는 거야.

아줌마도 참 뭐가 부러워요. 아줌마 남편이 더 대단하지.

하루도 안 거르고 아줌마 뒤만 졸졸 따라 다니는구만.

아내의 뒷자리에 글쎄 남편이 앉아 있었던 거야.

 

 

거룩한 계보

 

식구들 먹다 남은 밥이며 반찬이 아내의 끼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타박도 해보지만 별무소용이다.

 

버리고 하나 사라 얼마 된다고 빤스까지 꿰매 입나

핀잔을 줘도 배시시 웃는데야 더 뭐라 할 수도 없다.

 

지지리 궁상이다 어쩌랴

엄마의 지지리 궁상이 아버지 박봉을 불리고 자식 셋을 키워낸 것이니

어쩌랴 아내의 지지리 궁상이 내 박봉을 불리고 자식들을 키울 것이니

 

그래서다 고백컨데

우리 집 가계(家系)는 대를 이은 저 지지리 궁상이 지켜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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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영 

강원도 춘천 출생

1990년 고대문화상 시부문 수상

1992<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맨홀 속의 사내>,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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