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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환규의 골든타임] 의사는 “살고싶다”는 소년의 호흡기를 떼고…

풍월 사선암 2013. 4. 21. 18:31

의사는 살고싶다는 소년의 호흡기를 떼고

 

인공호흡기를 떼고, 나는 지옥을 빠져나왔다

[토요판] 노환규의 골든타임 / 가슴에 묻은 폐결핵 환자

 

폐결핵 후유증과 기흉으로

호흡곤란 호소하던 19살 청년

다시 보지 말자는 당부에도

그는 병원에 오고 또 왔다

갈비뼈도 부러뜨린 흉곽성형술

수술 뒤 반대쪽 폐가 문제였다

 

선생님 살고 싶어요라는 글씨

참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그의 엄마도 울기 시작했다

가래 뽑는 횟수를 줄였다

그의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가래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1980년대 서울 은평구 구산동의 결핵인마을 풍경.1965년 결핵 전문병원인 시립서대문병원이 설립되면서 전국에서 온 결핵 환자들이 모여 자연스레 형성됐다. 마을엔 날품팔이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2000년대 중반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추진되면서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탈바꿈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여름, 흉부외과 레지던트 2년차였던 나는 어느 지방도시로 파견근무를 나가게 됐다. 당시 서울 본원의 근무 여건은 주당 130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것이어서 주당 80시간 내외의 근무가 가능한 지방병원의 파견근무는 휴식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곳에서 20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가슴에 묻게 될 환자를 만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판자촌에서 형도 아빠도 결핵으로 떠난 뒤

그를 처음 만났던 것은 장마가 막 시작되던 6월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젊은 청년이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응급실로 들어왔다. 나이 19. 소년의 티를 벗지 않는 키가 큰 젊은이였다.

 

호흡음을 들어보니 양쪽의 호흡음이 모두 감소되어 있었다. 흉부 엑스선 검사 결과, 오른쪽 폐는 완전히 하얗게 변해 있었다. 폐결핵으로 폐조직이 완전히 망가져(destroyed lung), (허파)는 전혀 기능을 하지 못했다.

 

숨이 찼던 이유는 왼쪽 폐에 갑자기 생긴 기흉 때문이었다. 기흉은 공기가 들어 있는 폐에서 바람이 새어나와 시작된다. 흉강 안에서 빠져나갈 곳이 없는 바람이 다시 폐를 누르고 호흡곤란을 유발하는 것이다. 새어나온 바람의 양이 적으면 대부분 위험하지 않지만, 양이 많거나 폐기능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응급처치가 필요하다. 게다가 이 환자는 기흉이 발생한 쪽에서 심한 폐기종 양상도 보이고 있었다. 폐기종이란 허파꽈리가 많이 망가져서 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 환자는 바람이 샌 양도 많았던데다 양쪽의 폐기능이 워낙 떨어진 상태였다. 숨이 찬 환자는 몹시 괴로워했다. 차트를 보니 예전에도 기흉을 앓은 적이 있었다. 두번째였던 것이다.

 

나는 폐를 누르고 있는 바람을 빼기 위해 왼쪽 가슴에 흉관(흉강에 넣는 튜브 모양의 기구)을 삽입했다. 여기저기 폐가 흉벽에 붙어 있는 유착이 있어서 폐가 다치지 않도록 흉관을 넣는 것도 어려웠다. 흉관을 통해 폐를 눌렀던 바람이 빠지자마자, 환자의 호흡곤란 증상은 바로 좋아졌다. 19살의 어린 나이에 폐결핵의 후유증을 혹독하게 앓은 그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자신의 병에도 불구하고 잘 웃고 농담도 잘하며 매우 쾌활했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나를 그는 형처럼 따르며 살갑게 대했다. 며칠 뒤 폐에서 새던 바람이 멎었다. 나는 다시 보지 말자며 웃으며 그를 퇴원해 보냈다.

 

그러나 예상보다 빠른 약 보름 뒤, 아이는 응급실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며칠 전과 똑같은 증세가 발생했다. 지난번과 똑같은 왼쪽 폐의 기흉으로 진단이 내려졌지만, 상황은 더욱 심했다. 환자는 전보다 더 힘들어했고 의식마저 혼미했다.

 

이번에도 흉관을 가슴에 넣어 바람을 뺐다. 환자의 상태는 금세 좋아졌다. 나는 기흉의 재발을 막기 위해 흉막유착술을 시도했다. 흉막유착술이란 폐와 흉벽을 싸고 있는 막에 염증을 일으키는 약물을 주입하는 시술이다. 이렇게 하면 염증이 폐와 흉벽 사이에 일종의 접착제 구실을 하여 기흉의 재발률을 떨어뜨리는 시술이다. 관을 통해 약물을 흉강에 주입하는 간단한 시술이지만, 흉막이 자극된 환자는 고통스러워한다. 그는 고통스러운 시술을 잘 이겨내고 이번에도 쾌활한 웃음을 지으며 약 열흘 뒤 퇴원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다시 보지 말자며 나는 그를 퇴원시켰다.

 

내 바람과는 달랐다. 그는 며칠 뒤 또다시 식은땀을 흘리며 응급실로 실려왔다. 이번에도 매우 급박하고 심각한 상태였다. 또 흉관을 넣었다. 상태는 좋아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폐에서 새어나오는 공기량이 많았고, 며칠을 기다려도 바람이 멎질 않았다.

 

자꾸 기흉이 반복되고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자 과장님은 수술을 고민하셨다. 결국 갈비뼈를 부러뜨려 망가진 폐를 주저앉히는 흉곽성형술을 하기로 결정하셨다. 망가진 폐가 흉조직화되면서 수축하여 반대쪽 폐의 과팽창을 일으켜 폐기종과 기흉을 일으키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망가진 폐가 더이상 수축하지 않도록 폐를 주저앉히는 수술을 결정한 것이다. 환자의 폐 상태가 워낙 나빠서 수술의 안전성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환자를 근본적으로 치료할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결국 과장님은 보호자인 아이의 엄마를 불러 수술의 위험성을 설명했다. 엄마는 수술 설명을 듣고는 하염없이 울었다. 환자의 형도, 아빠도 결핵으로 잃고, 환자는 마지막 남은 아들이라고 했다.

 

과장에게 가망없는 퇴원을 지시받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끝났다. 그런데 수술 뒤 반대쪽 폐, 즉 그나마 기능이 남아 있던 폐에 염증이 생겼다. 망가진 폐를 주저앉히는 수술을 위해서는 환자가 옆으로 돌아누워야 하는데, 염증으로 망가진 오른쪽 폐의 감염된 분비물들이 왼쪽 폐로 넘어온 것이 원인으로 생각됐다. 수술 뒤 인공호흡기를 떼었지만, 늘어나는 가래로 인해 호흡곤란이 와서 다시 인공호흡기를 걸어야 했다. 폐의 염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염증도 염증이었지만 가래가 늘어나는 게 문제였다. 처음에는 30분 간격으로 가래를 빼면 됐지만, 점차 10, 5, 2~3분으로 간격을 줄여야 했다. 물처럼 흘러나오는 가래농은 5분만 놔두어도 환자 의식이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심했다. 이 때문에 간호사 한 사람이 아무 일도 못하고 환자의 바로 곁에 붙어 있어야 했다. 고단위 항생제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가래가 차면 아이는 의식이 희미해졌지만 가래를 빼면 아이의 의식은 즉시 또렷하게 돌아왔다. 인공호흡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종이와 펜으로 나와 대화를 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났다. 폐기능은 더욱 떨어졌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환자는 매일 열번도 넘게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찾기를 반복하면서 하루하루 고비를 넘기면서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환자의 엄마가 과장님을 찾아갔다. 잠시 뒤 과장님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가망없는 퇴원’(hopeless discharge)을 지시하셨다. 환자 가족이 더이상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망없는 퇴원이란 죽음이 확실시되는 환자를 집에서 운명하도록 조처하는 것을 말한다. 2년 전 내 아들도 가망없는 퇴원을 했다가 살아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 병원의 파견의이자 유일한 흉부외과 전공의였던 나는 가족의 결정과 과장님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많이 괴로웠다. 생명이 위태롭고 회복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직 의식이 멀쩡한 아이를, 가래가 차서 인공호흡기를 떼는 것이 불가능한 아이를, 집에 데리고 가서 호흡기를 떼라니.

 

몇 시간을 끌던 나는 어둑한 저녁이 되어서야 환자와 함께 앰뷸런스에 올랐다. 아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도 인공호흡을 하면서 나는 계속 뿜어져 나오는 가래를 주사기를 이용해서 뽑아줘야 했다. 단 몇 분만 가래를 뽑지 않아도 의식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의식이 가물거리던 아이는 가래를 뽑으면 곧바로 또렷한 눈망울로 애원하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덜컹거리던 구급차는 어느 판자촌 후미진 곳에 멈췄다. 이윽고 도착한 것이었다. 아이를 방으로 옮기고, 나는 계속 앰부(인공호흡에 이용되는 럭비공 모양의 고무주머니)를 잡고 있었다.

 

아이는 손으로 내게 쓸 것을 달라는 표시를 했다. 엄마가 펜과 수첩을 건네주자 아이는 수첩에 흔들리는 글씨로 선생님 저 살고 싶어요라고 적었다. 이미 붉어진 내 눈에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이의 엄마도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는 울지 않고 나를 쳐다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앰부를 이용한 인공호흡과 주사기로 가래를 뽑아내기를 계속했다. 아이 엄마의 슬픈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났을까구급차 기사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방으로 들어와 이제 가셔야죠하며 눈치를 줬다. 정말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대신해줄 수는 없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또 30여분이 지났다. 내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구급차 기사의 재촉은 계속됐다. 그의 말대로 언제까지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의사도 가족도 포기한 마당에 환자를 데리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가래를 뽑는 횟수를 줄였다. 아이의 의식은 곧 가물가물해졌다. 그렁그렁하는 가래 소리가 내게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눈물에 젖은 나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이윽고 아이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몇 분이 지나자 호흡도 멈췄다. 나는 인공호흡을 위해 삽입했던 기관 내 튜브를 제거했고 아이는 천국으로 갔다. 나는 지옥을 빠져나오듯이 그 집을 빠져나왔다.

 

왜 그는 최선의 치료를 끝까지 못 받았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원 담벼락에 붙어 있던 포장마차로 걸어갔다. 혼자서 소주 한병을 들이켰을 즈음, 어떻게 아셨는지 과장님이 들어와 옆자리에 앉으셨다. 그리고 내 소주잔을 채우셨다. 둘이서 말없이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세병쯤 들이켜고서야, 나는 그 아이와 헤어졌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는 떠났고, 나는 남아 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올 때마다 긴장성 기흉이라는 위험한 상태로 내원했다. 양쪽 폐가 모두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망가졌기 때문에 굳이 수술을 하지 않거나 가망없는 퇴원을 하지 않았어도 오래 살기를 기대하는 건 어려웠다. 그러나 또렷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며 살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에게서 기관 내 튜브를 제거하는 것은 전기의자에 앉은 사형수의 전기버튼을 누르는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한 일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의사라는 직업이 너무 싫었다. 아이는 최선의 치료를 받았어도 숨졌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돈 때문에 최선의 치료를 끝까지 받지 못했던 것은 명백하다.

 

그 아이를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무엇일까. 중증의 폐결핵인가, 치료비를 감당 못한 가난인가. 아니면 서민의 치료비를 해결하지 못한 사회의 제도인가. 어쩔 수 없이 냉정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엄마인가, 그의 요청을 받아들인 과장님인가 아니면 어떤 용기도 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그를 떠나보낸 나였는가. 그날의 기억은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나는 이 아이를 가슴에 묻었다. 가끔씩 그날의 일을 돌이킬 때마다 그의 검은 눈망울이 떠올라 눈물이 난다. 내가 아이에게 한 마지막 약속은 평생 기억하겠다는 것이었다. 부디 좋은 곳에서 잘 있기를.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결핵으로 잃은 그의 어머니도 잘 계시기를.

 

우리나라는 아직도 결핵의 발병률과 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24년 전 내 품에서 떠난 아이의 비극이 지금도 어디에선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의료비의 지출 규모는 적지만 치료비의 개인부담률이 매우 높다. 다른 나라들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세금에서 의료비를 지원하는데, 우리나라는 의료비의 상당 부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가정이 가계소득의 40% 이상을 의료비로 지출할 때 이를 재난적 의료비라고 한다. 의료비로 인해 재난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재난적 의료비 발생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1위다. 국가의 지원이 적고 의료비 부담을 국민에게 미루기 때문이다. 국민의 생명이 달린 의료비에 대한 국고지원이 대폭 늘어나야 할 것이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