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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환규의 골든타임] 특별히 신경을 써드렸더니…운명하셨습니다

풍월 사선암 2013. 4. 21. 18:49

특별히 신경을 써드렸더니운명하셨습니다

 

[토요판] 노환규의 골든타임 / 공포의 VIP 신드롬

 

의사들이 가장 많이 받는

누구누구 신경써달라는 부탁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뜻하지 않은 부작용 가져온다

신경을 쓸수록 위험한 역설 

 

아들 담임선생님 아버지가

가슴 통증으로 입원했다

수술 마치고 퇴원하는 날

짜장 색깔의 변이 나왔다

두번의 위출혈 지혈했지만

세번째는 수술이 필요했는데

 

◀환자를 위해 잘하려고 하는데도 이상하게 일이 꼬이는 브이아이피(VIP) 신드롬의 경험을 의사들은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다. 의사들은 병원과 의료의 원칙과 효율성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한다. 한 병원의 수술 장면.

 

필자처럼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주변으로부터 종종 부탁을 받는다. 병실을 마련해 달라거나 진료일을 앞당겨 달라는 등 정말 난감한 부탁들도 많다. 그러나 아마도 내 지인이 어느 병원에 누구 앞으로 입원해서 수술을 받게 되었으니 연락을 해서 신경을 좀 써 달라고 얘기해 달라는 게 가장 많이 받는 부탁이다. 담당 의사에게 신경을 더 써 달라고 하면 아무래도 나을 것 같아서 부탁을 하는 것이겠지만, 의사들은 누구나 그런 부탁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부탁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많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더 많이 신경쓰는 환자에게 더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는 현상을 의사들은 브이아이피(VIP) 신드롬이라고 한다. 일종의 징크스에 대한 공포도 있다. 의사들이 자신의 가족을 직접 수술하지 않는 이유도 브이아이피 신드롬 때문이다.

 

의사들이 가족을 수술하지 않는 이유

 

내가 처음 브이아이피 신드롬을 겪은 것은 20여년 전 전공의 시절이었다. 내가 소속된 과장님과 친분이 있는 어느 신부님이 심장판막수술을 받으신 뒤 수술 부위에 염증이 생겼다. 심장수술 후 감염이 비교적 흔하던 시절이었다. 심장수술 후 생기는 세균감염은 매우 위험하다. 심장 주위로 염증이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수술 후 신부님의 염증이 깊어 가슴 상처를 다시 절개한 뒤 여러 날 동안 상처 소독을 했다. 정성을 들여 치료한 덕택에 염증은 가라앉았고, 개방을 해놓았던 상처를 다시 닫았다. 며칠 관찰한 결과 염증이 확산되는 징후는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자 환자에게 미열이 생겼다. 상처는 괜찮아 보였다. 성탄절이 다가왔다. 신부님은 며칠간의 특별외출을 부탁했고, 과장님은 미열 때문에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신부님은 밀린 일이 많다. 신부에게 성탄절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않느냐며 꼭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시면서 미소를 지으셨다. 잘 아는 사이인데다 간곡히 부탁하니 과장님은 곤란해했다. 미소 띤 얼굴의 간곡한 부탁에 과장님은 끝내 그렇게 하시죠. 대신 열이 오르면 곧장 병원으로 오셔야 합니다하고는 차트에 외출 사인을 하셨다. 실수였다. 얼마 뒤 야간에 신부님은 고열로 병원을 찾았다. 상처는 그사이 벌겋게 홍조를 띠고 있었다. 잠깐 사이 염증이 확 퍼진 것이다. 패혈증에 빠진 신부님은 약 2주 뒤 돌아가셨다. 과장님을 비롯한 의료진들이 환자의 부탁을 들어준 것을 후회하고 안타까워했다. 그가 브이아이피가 아니었다면 매몰차게 거절했을 것이고 어쩌면 신부님은 패혈증에 걸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두번째 기억나는 브이아이피 신드롬은 내 환자다. 의사들은 모든 환자들에 대해 막중한 책임을 가지지만, 특히 지인에게 사망이나 합병증이 생기면 더욱 힘들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15년 전, 한 대학병원 교수로 있을 때 일이다. 68살 남자가 자주 찾아오는 가슴 통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검사 결과 진단명은 관상동맥이 좁아져서 생긴 협심증이었다. 혈관이 여러 개 좁아져 있고 당뇨병도 있어서 수술을 하기로 했다. 그 환자는 보통 환자가 아니라, 당시 내 아들이 다니고 있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부친이었다. 그 담임선생님은 나와 같은 교회를 다니던 교우이기도 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는 작은 교회였고 나는 선교팀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잘 아는 분이었다. 환자는 내게 최고의 브이아이피였다.

 

환자에게는 좁아진 관상동맥에 우회도로를 만들어주는 관상동맥우회로술이 필요했다. 내 전문 분야였고 수술 성적도 좋았으므로 환자도, 환자의 딸인 아들의 담임선생님도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그가 브이아이피여서 각별히 신경쓰이긴 했지만 그럴수록 평범한 환자처럼 대하려 애썼다. 브이아이피 신드롬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술은 무사히 마쳤다. 네 곳의 관상동맥에 우회로를 만드는 관상동맥우회로술이 무사히 끝난 것이다. 수술 뒤 경과도 좋았다. 수술 뒤 8일째 되는 날, 나는 아침 회진에서 인사를 나누고 퇴원을 지시했다. 뒤돌아 병실을 나서려는 순간, 환자가 나를 불렀다.

 

선생님, 저 오늘 아침 변을 봤는데요. 색깔이 꼭 짜장 색깔처럼 새까만 변을 봤어요.”

 

짜장 색깔의 변. 그것은 상부 위장관, 즉 식도나 위 혹은 소장 윗부분의 출혈을 암시했다. 그중에서도 위궤양에 의한 출혈이 가장 흔하다. 안 그래도 환자는 위궤양으로 치료받은 전력이 있어서 수술 직후부터 위궤양 치료제를 투여하던 참이었다. 환자들에겐 심장수술이라는 큰 수술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몸에서 나오는 코르티솔 등 스트레스 호르몬들로 인해 위궤양이 악화되기도 한다. 즉시 퇴원을 취소하고 검사를 지시했다.

 

몇 시간 뒤 위내시경 검사 결과가 나왔다. 위궤양이 악화돼 그곳에서 출혈이 있다고 했다. 소화기내과 의사는 위내시경을 통한 클리핑으로 위궤양으로 인한 출혈을 성공적으로 치료했다. 클리핑이란 일종의 호치키스(스테이플러)처럼 클립을 이용하여 출혈을 일으키는 혈관의 양쪽을 집음으로써 지혈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 뒤 며칠 동안 관찰을 하였으나 추가적인 위 출혈 소견은 없었다. 나는 다시 퇴원 지시를 내렸다.

 

이번에도 퇴원 당일에 또다시 위출혈이 발생했다. 즉시 소화기내과에 연락했고, 환자는 두번째 클리핑 치료를 성공적으로 받았다. 이번에는 환자에게 신중하게 지켜보자고 말했다. 주말 동안 병원에서 잘 지켜보고 괜찮으면 주초에 퇴원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다량의 출혈내가 그냥 배를 열까 말까

 

일요일 오후 호출기가 울렸다. 병원에 전화를 해보니 이번에는 환자가 피를 토해내는 토혈까지 했다는 것이다. 즉시 병원으로 달려갔다. 토혈의 양이 많아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복부수술을 담당하는 일반외과에는 응급수술이 필요할지 모르겠다고 연락을 해놓고, 또다시 응급으로 클리핑을 시행할 소화기내과 당직 스태프를 찾았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당직 내과의사는 이번이 벌써 세번째니 아예 수술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외과에 다시 연락을 했다. 잠시 후 답변이 왔다. 외과 당번 교수가 당장 달려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일반외과 의사에게 가능한 한 빨리 오라고 말은 해두었지만, 환자의 상태는 외과의사를 기다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내과의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또 한번 클리핑을 해달라고 부탁하고는 환자를 부리나케 내시경실로 옮겼다. 소화기내과 전문의가 다시 클리핑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쉽지 않았다. 소화기내과 의사가 점차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혈을 하려면 클립으로 출혈을 일으키는 작은 혈관을 잡아야 하는데, 숨이 가쁜 환자가 헐떡이는 바람에 그 작은 혈관을 잡아 지혈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환자는 점차 쇼크 상태로 빠져들었다.

 

위궤양으로 인한 출혈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위궤양으로 인해 위벽이 많이 헐게 되면 위벽 안에 있던 혈관이 노출돼 출혈을 일으킨다. 위내시경 모니터에는 위궤양과 출혈을 일으키고 있는 혈관이 보였는데, 동맥혈관에서 나오는 출혈은 높은 압력으로 인해 반대쪽 위벽을 강하게 일직선으로 때리고 있었다. 화면을 통해 엄청난 출혈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축축해진 환자의 손을 잡았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혈관이 잡히지 않자, 내과의사는 환자에게 더 큰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숨을 참으셔야 해요! 숨을 못 참으시면 잘못하면 위에 구멍이 난다구요!”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속으로 위에 구멍이 나면 어떤가. 이러다 돌아가실 판인데 좀 과감하게 하시지라는 말을 되뇌었지만, 끝내 그 말을 못했다.

 

수십분 동안 땀에 흠뻑 젖도록 힘을 썼지만 내시경을 이용한 지혈은 실패했다. 내과 전문의는 결국 클리핑을 포기했다. 그는 수술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는 장갑을 벗고 내시경실을 떠났다. 출혈이 멈추지 않는 환자를 다시 이동식 침대에 태우고 나는 수술실로 침대를 밀었다. 외과 교수는 도착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수술 준비를 모두 마치고도 점점 쇼크 상태에 빠져드는 환자를 지켜보면서 나는 언제 올지 모르는 외과 스태프를 마냥 기다렸다. 사실 굳이 일반외과 교수가 왔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고 생각됐다. 단순히 위를 열어 지혈하는 것은 그리 고난도의 수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외과 전공의(레지던트)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공의가 수술 책임을 지지 않도록 되어 있는 병원의 원칙상 어쩔 수 없이 교수를 기다려야만 했다. 비록 내가 가슴을 여는 흉부외과 의사지만, 생각 같아서는 내가 그냥 배를 열고 출혈을 일으키고 있는 위를 손으로 누르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흉부외과 의사들은 주로 가슴을 수술하지만, 복부 대동맥 등의 수술을 위해 배를 여는 개복수술도 흔히 한다. 위를 절개하는 것은 일반외과 의사의 영역이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병원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1분이 하루처럼 느껴졌다. 한 시간여가 지났을까. 이윽고 일반외과 스태프가 도착했다. 그동안 환자의 출혈을 따라가기 위해 계속 수혈이 돼야 했다. 일반외과 의사가 배를 열자마자 부풀어오른 위가 튀어나왔다. 위를 절개하자 1000가 넘는 혈종(혈액이 한곳으로 모여 혹과 같이 된 것)이 나왔다. 일반외과 스태프는 혈종을 제거한 뒤 위를 떼어내지 않고 그냥 출혈을 일으키는 혈관을 단순 봉합했다. 그저 그뿐인 것을이렇게 간단한 것을나라도 그렇게 할걸 하는 후회가 순간 들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혈압도 다행히 안정적이었다. 의식도 깨끗이 돌아왔다. 다만 많은 양의 출혈 때문에 받은 다량의 수혈이 마음에 걸렸다. 수혈의 부작용만 없다면 아무 일 없이 퇴원할 상황이었다. 다량의 수혈 후에 가장 염려가 되는 것은 급성폐손상이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바랐다. 염려하던 대로 수술 후 환자의 폐가 급속히 나빠졌다. 다량의 수혈로 인해 급성폐손상에 이어 급성호흡기능부전에 빠진 것이다. 수술 당일 밤부터 나빠진 폐 기능은 짧은 시간 동안 급속도로 악화됐다. 사흘째 되는 날, 급기야 환자는 인공호흡기로 100% 산소를 공급받는 상황에서도 폐 기능이 유지되지 않았다. 결국 체외막 산소공급기(ECMO: Extra-Corporeal Membrane Oxygenation·혈액을 밖으로 빼 산소를 공급한 후 다시 혈액 안으로 넣어주는 장치)를 달았다. ‘에크모를 달고 이틀 만에 환자는 사망했다. 심장수술 뒤 위궤양으로 인한 출혈의 합병증 때문이었다.

 

집에 못 들어간 6, 그러나 후회와 자책뿐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에 걸어 들어온 환자가 하얀 천에 싸여 실려 나가는 일은 가족도 의료진도 절대 겪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아들의 담임선생님이자 같은 교회 교우의 아버님께. 일요일에 불려나가 금요일 돌아가시기까지 단 하루도 집에 가지 못하고 24시간 환자 곁을 지켰다. 내 모습을 본 환자의 가족들은 나를 책망하지 않았다. 진료 현장에서 최선은 쓸모가 없다. 병원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다. 이유야 어쨌든 결과는 가족을 잃은 것이다. 그런 가족들이 내게 책망조차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팠다.

 

생각할수록 후회되는 일이 많았다. 내시경으로 클리핑을 시도하던 내과 전문의에게 좀더 과감하게 하라고 강력히 말할걸 그랬나. 원칙에 어긋나더라도 일반외과 교수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일반외과 전공의에게 수술을 하라고 명령해야 했나. 역시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일반외과 스태프가 도착하기 전 내가 배를 열고 위를 누르면서 기다려야 하지 않았을까. 내가 지나치게 원칙을 고수하거나 다른 과에 대한 예의를 차리느라 환자가 더 많이 기다리게 됐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피를 수혈받게 되어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건 아닌가. 이런 자책들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15년이 지난 뒤 이 글을 쓰고 있으니 환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늘 너그럽고 인자한 표정을 지으시던 그분이 마치 괜찮다. 그것은 내 운명이었다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오늘도 많은 환자들이 병원에서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순간을 맞는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나보다 훨씬 용기있고 지혜로운 의사들이 더 많은 환자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있을 것이다.

 

*타인의 수혈에 따르는 부작용들 때문에 요즘은 많은 병원에서 응급수술이 아닌 경우 자가수혈을 이용하여 수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