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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환규의 골든타임] 그러나 아이는 죽지 않았다

풍월 사선암 2013. 4. 21. 17:53

그러나 아이는 죽지 않았다

 

[토요판] 노환규의 골든타임 / <1> 1987년 인턴시절

 

의사가 된 계기는 아마도 중학교 3학년, 서울 홍제동에 살 때 앓았던 맹장염 수술이었을 것이다. 저녁부터 배가 살살 아프더니 새벽 2시쯤에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12시가 넘으면 통금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아버지가 연세대 부설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데리고 갔다. 병원에서는 맹장염을 의심했다.

 

기본 진찰을 받은 뒤에 응급실에 누워 있었는데, 의사가 오더니 손가락을 항문으로 넣어서 검사를 했다. 직장 검사였다. 급성맹장염에서 나타날 수 있는 소견 중 하나가 항문에 집게손가락을 넣어 염증이 있는 방향에서 나타나는 압통(눌렀을 때 통증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이곳저곳을 누르면서 여기 아파요? 여기는요?” 하고 물었다. 이윽고 항문에서 손을 뺀 의사는 맹장염인 것 같네요. 수술해야 하니 입원 수속을 하세요라고 말했다.

 

◀어렸을 적 급성맹장염으로 병원에 실려가 대여섯번의 직장 검사를 받으며 겪은 고통은 노환규 대한의사협회장이 의사를 꿈꾼 계기가 됐다. 19일 서울 이촌동 의사협회 사무실의 히포크라테스상 앞에서 노 회장이 포즈를 취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위 해부도를 보며 의사를 꿈꾸던 밤

 

그런데 그로부터 잠시 후, 대여섯명의 의사들이 몰려왔다. 그러더니 그중 한 의사가 장갑을 끼더니 다짜고짜 다시 항문에 손가락을 넣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손가락을 돌리며 누르면서 어느 곳이 아픈지 또다시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왜 검사를 또 할까 싶었지만 참으면서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검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 사람이 하고, 그리고 또 다음 사람이그렇게 몰려온 그들 모두가 직장 검사를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의사가 되어보니, 그들은 모두 의사가 아니라 의과대학생들이었다. 선진국에서는 환자들에게 의과대학생을 소개하며 앞으로 이들이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협조해주지 않겠습니까?”라며 부탁한다고 한다. 환자를 위한 이런 배려가 지금도 아쉽지만, 어쨌든 돌이켜보면 당시 세브란스병원은 환자에 대한 배려는 적었어도 의과대학생들 교육만큼은 확실히 시켰던 것 같다.

 

배는 아파 죽을 지경인데, 영문도 모른 채 계속 직장 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어린 나이였지만 은근히 화가 났다. 입원실에 올라가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뒤에도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께 이곳에서 수술을 못 받겠으니 다른 병원으로 옮겨달라고 떼를 썼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아픈 배를 부여잡고 후에 나의 모교가 된 세브란스병원을 퇴원해 을지로의 신생병원인 을지병원으로 갔다.

 

을지병원에서도 직장 검사를 받았지만 단 한번으로 끝났다. 수련병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그런데 병실 벽에 걸려 있던 위 해부도가 호기심을 끌었다. 한참 동안 해부도를 들여다보던 그때가 처음으로 의학이라는 학문에 매료된 순간이다. 그리고 남들이 잠든 새벽, 맥박과 체온을 확인하기 위해 조용히 손목을 잡던 간호사의 손길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숭고함이 느껴졌다. 퇴원 뒤 자연스럽게 의사의 꿈이 생겼고 내가 앞으로 의사가 될 것이라는 결심은 이후로도 변함이 없었다. 급성맹장염을 앓지 않았더라면 나는 의사의 길을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해보면 당시 세브란스병원 병실에는 위 해부도가 걸려 있지 않았으니, 나의 못된 성격 때문에 을지병원으로 옮겨가는 일이 없었더라면 아마 내가 의학에 흥미를 가지고 의사가 될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하면, 급성맹장염의 정확한 용어는 급성충수염이다. 소장이 대장으로 이어지는 부위에 꽁지처럼 달린 부분을 충수돌기라고 한다. 급성충수염은 이 충수돌기에 생긴 급성염증이다. 요즈음은 진단의 정확도가 높은 시티(CT)를 사용하여 확진하지만, 당시에는 시티가 국내에 도입되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아프기 시작했는지 문진을 하고 진찰하는 이학적 검사와 엑스레이 등을 찍어 급성충수염을 진단했다. 그래서 오진도 많았다. 의사가 충수염이라고 생각하고 배를 열었는데, 막상 염증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외과의사들은 급성충수염이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수술이라고 말한다. 쉬운 건 정말 쉬운데, 난해한 경우에는 실력 있는 외과의사도 쩔쩔맨다. 간혹 충수돌기가 비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수술이 난해해진다. 염증이 지나치게 진행됐을 때도 수술이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간단해 보이는 급성충수염 수술의 위험을 지금도 무시할 수 없다.

 

맹장수술 부탁해요.”

   

◀두 번이나 사망 판정을 받은 아들 성은이(가운데)27살의 건장한 청년으로 자랐다. 얼마 전 캐나다에서 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한 장애인시설에서 공익요원으로 근무중이다. 2008년 유럽여행 때의 가족사진. 노환규 제공

 

흉부외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경기도의 한 의료원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할 때다. 당시 외과 과장은 34일 예비군 동원훈련을 가면서 외과계열 의사들에게 급성맹장염 환자가 오면 수술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떠났다. 당시 그 의료원에는 흉부외과 전문의였던 나 말고도 산부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등 여러 외과계열 의사들이 있었다. 나는 흉부외과 의사였기에 혈관수술을 위한 개복수술의 경험은 몇 차례 있었지만, 맹장수술은 해본 적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그 지역은 맹장 환자가 그리 많지 않은 한적한 시골이어서, 외과 과장의 부탁은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그런데 첫날부터 환자가 왔다. 다른 의사에게 부탁하고 싶었지만 마침 다른 외과계열 의사들은 모두 수술중이었다. 다행히 수술은 원활히 진행됐다. 생각보다 간단히 수술이 끝난 것이다. 다행이었다. 이튿날 두번째 급성맹장염 환자가 왔다. 수술실에서는 이제 당연스레 나를 찾았고 전날보다 더 말끔하게 수술을 끝냈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다음날 세번째 환자가 왔을 때엔 나는 아무런 염려 없이 수술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맹장은 어디 갔는지 찾을 길이 없고, 주변은 이른바 이 되어 있었다. 의사들은 염증이 주변까지 퍼져서 조직의 구분이 안 가고 서로 붙어 있는 경우(유착)떡이 됐다고 표현한다. 보통 유착이 없으면 손가락을 돌려 충수돌기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이런 경우엔 아예 찾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난감해하던 그 순간,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예비군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외과 과장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이 마치 영화 속 영웅처럼 느껴졌다.

 

임신한 아내의 배가 이상했다

자궁이 둘로 나뉜 쌍각자궁

9개월만에 진통이 왔지만

병원은 태연하게 돌려보냈다

곧 양수가 터졌고 탯줄이 보였다 

 

살더라도 뇌성마비율 99.9%

뇌출혈로 앞도 못 본다는 진단

망설이다 인공호흡기를 뗐다

인큐베이터 산소공급도 끊었다

아이의 몸은 새까맣게 변했지만

심장은 멎을 듯 멎지 않다가

 

허술했던 외래 진료, 성급했던 사망 판정

 

나는 본과 4학년 때 아내와 결혼식을 올린 뒤 졸업 직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돌아오느라 동기들보다 1년 늦게 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임신 5개월째 아내의 배가 오른쪽만 불러 왔다.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자궁이 둘로 나뉜 이른바 쌍각자궁’(bicornuate uterus complete type)이었다. 아기의 발육 부진 등 여러 위험을 안고 있는 질환이었다.

 

인턴 2개월차인 나는 안양중앙병원에 파견돼 있었다. 갑자기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용건은 간단했다. 아내가 병원에 와 응급수술에 들어가니, 보호자의 전신마취 승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수술에 동의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수술실에는 마취된 아내가 누워 있었다. 동기였던 1년차 산부인과 레지던트가 수술의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라는 나의 질문에 친구는 상황이 안 좋아라고 짧게 대답하곤 말이 없었다.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는 아기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뒤늦게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출산 예정일이 아직 한달 넘게 남은데다 아침부터 찾아온 진통이 그리 심하지 않자, 아내는 응급실로 가지 않고 평소 다니던 산부인과 외래진료실로 갔다. 점차 심해지는 진통을 참으면서 무려 두 시간을 외래에서 기다렸다가 산부인과 교수님을 뵈었지만, 차트를 슬쩍 훑어보신 교수님은 간단한 진료 뒤 진통이 아니니 그냥 돌아가서 안정을 취하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안 되어 화장실에서 양수가 터졌고 아내는 몸 밖으로 빠져나온 탯줄을 보게 되었다. 이른바 제대탈출이었다. 태아는 탯줄을 통해 영양을 공급받기에 제대탈출은 무척 위험한 응급상황이다.

 

빠져나온 탯줄과 터진 양수를 목욕타월로 감싸고 아내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처음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의료진은 태아의 심장이 뛰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응급수술을 준비하느라 시간이 지체되는 도중 의료진은 태아가 사망한 것으로 판단했다. 산부인과 전공의는 아내에게 안타깝지만 태아가 사망해 태아를 꺼내야 합니다. 아래로(질을 통해) 꺼내면 상처는 남지 않지만 태아가 손상됩니다. 위로 꺼내면(제왕절개) 태아는 망가지지 않겠지만 상처가 나고 수술에 위험이 따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태아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던 아내는 제왕절개를 부탁했고, 병원이 응급수술에 앞서 내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태아가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던 교수님은 뱃속에서 태아를 꺼내자마자 수술실을 떠났다고 했다. 그런데 간호사가 아이가 사망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했고 그제야 의료진은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을 하고 아이를 신생아 중환자실에 옮겼던 것이다.

 

아이의 심장은 뛰고 있었지만 병원에서도 별다른 기대를 안 했다. 인체 조직은 혈액을 통해 산소를 공급받는다. 심장이 제대로 안 뛰면 뇌가 혈액을 원활히 공급받지 못하게 되고, 산소를 공급받지 못한 뇌는 빠르게 손상을 입게 된다. 이것을 허혈성 뇌손상이라고 한다. 아들은 응급실에서 한번, 수술실에서 한번 모두 두차례나 사망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심한 뇌손상이 예상됐다. 일주일 뒤 시행된 뇌초음파 검사에서는 뇌출혈 진단이 추가됐다.

 

그렇게 3주일이 지나자 소아과 교수님은 나를 불러 치료를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심한 허혈성 뇌손상을 입었고 폐와 간 기능도 떨어져 생존 가능성이 없다. 만에 하나 살더라도 뇌성마비가 될 가능성이 99.9%. 시야를 담당하는 부위에 뇌출혈이 있어 앞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루를 망설이다가 나는 결국 동의했다. 의료진은 인공호흡기를 뗐다. 그러나 느리게 뛰는 아이의 심장은 멎을 듯하면서도 멎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버텼다. 심장이 멎지 않자 의료진은 인큐베이터의 산소공급을 중단했다. 아이의 몸이 새카맣게 변했고 심장 박동은 더욱 느려졌다. 그러나 아이는 죽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는 또 며칠을 버텼다. 그러자 소아과에서는 다시 나를 불러 호플리스 디스차지’(hopeless discharge·가망 없는 퇴원)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설득했다. 이는 병원을 떠났을 때 환자의 생존 확률이 0%가 확실하다고 판단될 때 취하는 조처다. 쉽게 말해 집에 가서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라는 권고다. 의료진은 아이가 먹지를 못하니 수액주사를 끊으면 사망할 텐데, 병원에서 수액주사를 끊는 것까지 하긴 어렵다. 집에 가면 곧 사망할 것이니 데려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병원에서 재원 사망률’(hospital mortality)을 높이는 일을 피하고 싶어 이런 권유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지만, 말단 의사로서 당당하게 반박할 명분도 지식도 없었기에 권고를 따랐다.

 

의사인 나조차 병원이 정말 미웠다

 

당시 아내는 수술 후유증으로 처갓집에서 요양중이어서 아이를 데려가는 것은 부모님의 몫이었다. 부모님께서는 광목을 준비하는 등 장례 치를 준비를 마치고 아이를 데려갔다. 뭐라도 먹여야겠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조그마한 찻숟가락으로 보리차를 떠서 아이 입에 넣으셨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받아먹었다. 나중엔 엄마가 주는 우유도 받아먹었다. 그렇게 아이는 생명을 이어갔다. 아이가 첫울음을 터뜨린 것은 집에 온 지 한달이 다 되어서였다. 생후 2개월째였다.

 

어느 날 밤이었다. 자다 일어나 불을 켰더니, 아이가 깜짝 놀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앞을 못 볼 줄 알았는데 어쩌면 앞을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39도가 넘는 고열이 찾아왔다. 폐렴이었다. 다시 찍은 시티에서는 예전에 없던 커다란 크기의 뇌경색도 발견됐다. 아이의 체중은 고작 2.2이었다.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신생아 중환자실에는 생후 30일 이내의 아기만 들어갈 수 있다는 규정을 들어 입원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어이가 없었다. 참고 있던 병원에 대한 원망이 터져 나왔다. 병원은 결국 중환자실 입실을 허용했지만 어느 모로 보나 가망이 없어 뵈는 아이를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열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를 퇴원시켰다. 지금 백일사진을 보면 아들의 모습은 흡사 외계인 같다. 뇌수종 때문인지 비정상적으로 길고 큰 머리에, 눈동자는 아래를 향하고 있었으며, 몸 색깔도 어두웠다.

 

그러나 아이는 의료진의 예상과 달리 점점 건강을 찾아가고 있었다. 심한 뇌손상을 입은 탓에 정상적인 발달은 기대도 안 했는데, 아들은 생후 16개월에 첫걸음마를 뗐다. 평균 12개월에 걸음마를 시작하는 정상 아이들에 비해 늦을 뿐이었다. 결국 아들은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를 무사히 졸업했고, 고등학교 때는 아이스하키 선수로도 뛸 정도로 건강하게 성장했다.

 

두 번이나 사망 판정을 받은 아들을 통해 정말 많은 걸 배웠다. 첫째, 불성실한 외래진료도 의료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1987년의 이야기이지만 아직도 ‘2시간 대기, 3분 진료의 시스템은 여전하다. 낮은 진료수가를 극복하기 위한 짧은 진료 시스템의 위험성이 너무 간과되고 있다. 외래진료를 성실하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간단한 외래진료조차 의료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들의 사례가 보여준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올바른 의료제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둘째, 의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두 번이나 사망 판정을 받고 가망 없는 퇴원을 했지만 아이는 보기 좋게 의사들의 판단이 틀렸음을 입증했다. 의사가 의학적 지식에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셋째, 감사하는 마음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자식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는 처음에 아이가 살기를 바랐다. 두번째는 앞을 보기를 바랐고, 세번째는 걸을 수 있기를 바랐고 그다음엔 대화할 수 있기를 바랐다. 모든 소원이 이뤄진 지금, 나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