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허홍구 詩 '오래 전 그곳으로' 외 2편

풍월 사선암 2013. 1. 2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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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모시면서 / 허홍구

 

나를 사랑한다 했습니까.

나도 사랑하라 했습니까.

 

개 같이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빌고 또 빌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 했습니다.

기회가 오면 언제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나도 내가 두렵습니다.

내 속이 훤히 보이질 않습니까.

다 알고도 날 사랑한다 하심은

나도 그렇게 사랑하라 이 말씀이지요.

잊혀 지지 않는 원망과 미움도

용서하고 용서하라 이 말씀이지요.

용서 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용서하고 사랑하라 이 말씀이지요.

그래야 나도 용서받을 수 있다 이 말씀이지요.

 

내 이제 다시 몸을 바로 하여

당신 앞에 무릎 꿇어 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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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그곳으로 / 허홍구

 

어쩌면 내 고향은 여기서 너무 멀다

어머니에게 몸 받아 오기 전의 그 곳

나중에 나 홀로 반드시 찾아가야 하는 곳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는 그 곳으로

이곳의 모든 허물 다 벗어놓고

가벼운 영혼으로 찾아 가야 하리니

그리운 부모님이 계시고

날 사랑했던 옛날의 이쁜이도 있을,

먼저 간 친구들을 만나면 대폿집으로 초대하여

우리들 오랜 이야기에 밤을 잊을 것이다.

 

오래 전 그 곳

적멸보궁(寂滅寶宮)에 들었다가

내 이곳의 인연들 생각이 나면

구름으로 빗방울로 바람으로 햇살로

아니온 듯 무시로 다녀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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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부고장을 보내지 마라 / 허홍구

 

친구야! 다정한 내 친구들아

우리 이제 더 이상 부고장을 보내지 말자

지난 한 해 동안 열여섯 명의 친구를 잃었다

이제 정월인데 오늘도 두 명의 부음訃音을 듣고

가슴이 철렁 무너지는 듯 했었네

자네들 떠난 사랑 자리가 텅 비게 되면

맘이 어떠한지를 우리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홀로 왔다가 홀로 가야만하는 외로운 길

이미 몸 벗어놓고 떠나는 자네를 내가 만난들

아픔과 슬픔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부디 외로워하지도 서운하게 생각하지도 말게나.

 

내 죽으면 나도 친구들에게는

부고장 보내지 말라고 미리 일러두겠네.

사랑하는 사람, 고맙고 그리운 사람을

훌쩍 떠나보내고 나면 그 허전함 어찌하라고

떠나고 소식이 없으면 우리들의 그리움은

그래도 가슴에 꽃향기처럼 남아 있지 않을까?

그냥 우리 그렇게 살다 홀연히 떠나가세.

 

먼 훗날 바람으로 햇볕으로 봄비처럼 왔다가

인연이 되면 고운 꽃으로도 만날 수 있으리.

 

*부고(訃告).訃音 = 사망통지(死亡通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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