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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분쟁 4개 섬 이야기 / 중국 vs 러시아 전바오다오

풍월 사선암 2012. 9. 6. 09:30

스페셜 리포트 동북아 분쟁 4개 섬 이야기

1969년 핵전쟁 공포 부른 화약고, 장쩌민-고르바초프 담판으로 일단락

 

중국 vs 러시아 전바오다오

이동훈 기자

◀중국군이 전바오다오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전바오다오(珍寶島·러시아명 다만스키섬)는 중국과 러시아 간의 화약고였다. 이 섬은 중국과 러시아의 동북 경계를 이루는 헤이룽강의 지류인 우수리강에 있는 면적 0.74의 하중도(河中島). 서울 여의도(8.4) 크기의 10분의 1도 채 안 된다.

 

19693월 중국과 러시아는 이 섬을 둘러싸고 무력 충돌했다. 핵 보유국 간의 충돌은 전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에 몰아넣었다. 중국에서 전바오다오 자위반격전이라고 부르는 무력충돌은 양국 간의 어업 갈등에서 비롯됐다. 중국과 러시아(옛 소련)의 동쪽 국경인 우수리강에서 조업하는 중국 어민들을 러시아 측에서 불법조업으로 규정해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양측 무력충돌 1년 전의 일이었다. 소련의 불법조업 단속 과정에서 중국 어민 4명이 죽고, 9명이 다쳤다.

 

4300가 넘는 긴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는 1600년대부터 국경분쟁을 벌였다. 대개 중국이 강할 때는 중국 입장이, 러시아가 강할 때는 러시아 입장이 반영됐다. 예컨대 네르친스크조약(1689) 때는 중국(당시 청나라), 아이훈조약(1858)과 베이징조약(1860) 때는 러시아(제정러시아)의 입장이 대폭 반영됐다.

 

전바오다오가 문제로 떠오른 것도 1860년 베이징조약 때다.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당시 청나라가 러시아에 연해주를 떼주며 우수리강이 새로운 국경선이 됐는데, 전바오다오 등 하중도의 영유권이 명확하게 정리가 안 됐다. 중국에서는 베이징조약을 줄곧 불평등조약으로 봐 왔는데, 무력충돌까지 일어난 것이다. 전바오다오 사건 때는 장갑차와 T-62탱크, 헬기와 전투기까지 총동원됐다. 죽거나 다친 양국 군장병은 200명이 넘었다. 무력 충돌의 여파로 같은 해 8월에는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서부국경에서도 양국은 탱크를 동원한 국지전을 벌였다. 1964년부터 1969년까지 빚어진 중·소 양국 간의 크고 작은 무력충돌은 4180회가 넘는다.

 

전바오다오 사건은 ()의 장막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당황한 마오쩌둥은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를 중국으로 초대한다. ·일 정상의 연쇄 방중은 1972년 중·일 수교와 1979년 중·미 수교로 이어졌고 소련은 상대적으로 고립됐다.

 

이후 전바오다오 문제는 1991년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급진전됐다. 19915월 장쩌민 전 주석은 중국공산당 총서기 자격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19895월 베이징을 찾은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대한 답방 형식이었다. 1957년 마오쩌둥의 소련 방문 이후 34년 만에 중국 최고지도자의 모스크바 방문이었다.

 

·소 양국은 19911월 터진 걸프전에서 미국의 가공할 무력을 지켜본 후 화해할 필요를 느꼈다. 이 같은 국제적 사정은 중국과 소련을 협상테이블에 앉혔고, 장쩌민과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에서 ·소동부국경협정을 체결한다. 결정적으로 고르바초프는 우수리강의 중국 측 강안을 양국 간 국경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제정러시아 이래의 주장에서 물러섰다. 이후 양국 간 경계는 우수리강의 중간선이 되면서 전바오다오의 영유권은 중국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당시 성급히 국경을 획정한 데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있다. 전바오다오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더 큰 땅을 잃어버렸다는 것. 아이훈조약과 베이징조약 등 기존의 중·러 간 불평등조약을 사실상 인정한 꼴이 되어서다. 지금도 중국의 일부 강경파들은 연해주와 사할린섬까지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해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