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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인물열전] 20세기 후반, 그리고 오늘 미국을 만든 결정들(4)

풍월 사선암 2012. 8. 10. 11:50

 

불안한 제국, 새로운 시대에 운명을 걸다

 

20세기 중반까지 적어도 인류의 절반이 미국에게서 희망을 보았고,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들, 민주주의와 자유,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어느 문화권에서나 진흥되어야 할 가치라고 생각했다. 객관적인 미국의 힘도 역사상 최고에 달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했을 뿐 아니라, 지정학적으로도 대양으로 둘러싸여 있는 미국 본토까지 적의 침략이 미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핵탄두를 탑재한 대륙간 탄도 미사일만이 유일한 위협이었지만, 그것의 사용은 곧 상호 파멸을 의미했기에 쉽사리 핵전쟁이 날 수는 없었다. 경제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1960년까지 국민 평균 구매력은 20퍼센트가 늘고, 경제규모는 열 배나 증가했다. 전세계 공업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미국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또한 코카콜라, 맥도날드 햄버거, 헐리웃 영화, 디즈니 애니메이션 등 미국의 대중 소비상품이 전 세계인의 인기를 휩쓸었다.

 

9.11 테러 공격으로 파괴된 세계무역센터의 잔해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이런 제국의 영광에는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외교안보적으로는 인도차이나와 쿠바, 아프리카 등에서 공산화 확산을 막지 못했으며, 경제적으로는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커져가는 가운데 세계대전의 상처를 씻은 일본, 유럽이 강력한 경쟁자로 나타났다. 여기에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에 걸친 새로운 진보와 저항의 물결, 그로 인한 국론 분열과 세대간, 인종간 갈등, 그런 사회적 이슈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워터게이트 등의 추문까지 양산한 정치권의 무능 등이 겹치며, ‘미국의 시대가 조기 종결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학계에서나 대중매체에서나 나오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에 냉전이 미국과 자유진영의 승리로 끝나는 듯하며 그런 비관주의는 잠시 잦아들었지만, 이후 테러리즘과 핵확산, 지구환경파괴, 글로벌 금융위기 등의 문제에 미국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안팎에서 일면서 다시 미국 시대 종말론이 나오고 있다.

 

한때는 일본이 미국을 대신해 세계 초강대국이 된다는 전망이 유행했고, 그 다음에는 유럽공동체가,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이 그 후보자로 꼽혔다. 21세기 초인 이 시점에서 아직 그런 전망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연 미국이 10년 뒤에도 지금과 같은 위상을 유지할 수 있을지, 수십 년 뒤에는 아예 몰락하는 것이 아닐지 하는 우려와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그만큼 현명한 지도자를 뽑고, 지도자들이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진 오늘날의 미국인 것이다.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을 내린 미국의 대통령들

 

리처드 닉슨(37, 1969~1974), 중국과 수교하다

 

남부 출신의 존슨이 누구보다도 민권법 제정에 소극적인 대통령이 될 듯싶었다면, 리처드 닉슨은 누구보다도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기 싫어할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속한 공화당이 1930년대 이래 반공이라는 가치를 민주당보다 강력히 추구해온 데다, 닉슨 자신이 한때 빨갱이 때려잡는 투사로 이름을 날려 거물 정치인으로의 발판을 마련했었기 때문이다.

 

닉슨은 아직까지는 변방 취급을 받던 캘리포니아 출신이었고, 두뇌는 명석했으나 집이 워낙 가난하여 무명의 지방대를 나왔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중앙정치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힘들었는데, 1940년대에 불어 닥친 매카시즘 광풍에 편승하여 그 일급 투사가 됨으로써 그렇게 될 기회를 겨우 잡았다. 그는 매카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반미활동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유명한 앨저 히스 간첩 사건을 주도했다. 당시 앨저 히스는 민주당 정부에서 국무부 관료로 활동하며 소련을 위해 일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히스는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으나, 닉슨은 미심쩍은 증거와 증인을 내세워 그를 감옥에 처넣는 데 성공했다(나중에 히스의 혐의는 벗겨졌다). 닉슨은 그 뒤에도 선거전에 나설 때마다 상대방을 빨갱이 냄새가 난다며 색깔론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승리를 거듭하곤 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의 주인공이 된 닉슨  

 

그러나 196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에게 패배한 그는 한동안 야인 생활을 했으며, 그러면서 격동하는 60년대를 보다 차분한 자세로 성찰할 수 있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수립된 미국의 기본 질서와 세계질서가 흔들리던 때였다. 풍요 속에서 성장한 젊은 세대는 구세대의 보수적 가치관과 반공주의를 더 이상 따르지 않았으며, 흑인 민권운동이나 여성운동, 3세계 문화운동 등에 동참하며 대안적이고 진보적인 세상을 만들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했던 미국의 국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전후 기축통화로서 달러화의 신용을 지탱해 온 미국의 금 보유고가 어느새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경제부흥에 돌입한 유럽과 일본의 제조업이 미국 업체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베트남전쟁에 그토록 큰 힘을 기울였건만 결국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점도 미국으로서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닉슨은 이제는 이념에 얽매여 있을 때가 아니며 필요하다면 과거의 적과도 손을 잡고 미국의 힘을 북돋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포린어페어스>에 쓴 기고문에서 세계 최대 인구를 가진 나라가 계속해서 고립 상태에 있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중국을 개방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중국이 공산화된 1949년부터 20년이 넘도록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은 중국과 아무런 교류를 하지 않고 있었고, 장제스의 대만과 손을 잡고 중국을 공격해야 한다는 게 공화당의 기본 노선이었다. 그러나 닉슨은 개인적으로 친구이기도 했던 장제스의 헛된 꿈에 미국이 동참하는 일은 어리석다고 못박았으며, 중국과 소련 사이에도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1969년에 닉슨이 대통령이 된 뒤,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한 헨리 키신저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을 방문하여 주언라이와 건배하는 닉슨

 

그래서 닉슨이 백악관 의자에 처음 앉자마자 곧바로 중국과의 국교 재개를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웠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했다. 핫라인조차 없는 상황이었기에 중국과 의사를 직접 소통할 방법이 없었으며, 미국이 중국에 먼저 화해를 제기했다가 중국이 거절하는 날이면 국가적 망신일 뿐 아니라 막 시작된 닉슨 행정부에 대해 야당은 물론 공화당 강경파 등까지 비난을 퍼부어, 자칫하면 조기 레임덕이 올 가능성까지 있었다.

 

그래서 닉슨은 매우 신중하게 이 문제에 접근했으며, 19697월 괌에서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해 아시아인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손으로라는 표현을 통해 미국이 베트남에서 발을 뺄 뿐 아니라 대만과 손잡고 중국과 맞서지는 않을 뜻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아직 미국의 대사관이 남아 있던 일부 동유럽 국가를 통해 비밀리에 중국에 교류 재개 의사를 알리고 긍정적 답변을 얻어냈다. 그리고 미국 및 세계적으로 긍정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핑퐁 외교를 추진했다. 1971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중국 팀이 참가하고, 함께했던 미국 팀을 중국에 초청했던 것이다. 양국간의 비밀 합의에 따라 성사된 이 친선 경기는 TV를 통해 미국과 중국 선수들이 웃으며 얼싸안는 모습을 전세계에 보여줌으로써 동서 화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만하면 때가 무르익었다고 본 닉슨은 마지막으로 키신저를 베이징에 보내 비밀회담을 갖게 한 다음, 마침내 1972221, 베이징 공항에 발을 디디고 주언라이 수상의 환영을 받았다.

 

마오쩌둥과의 회담에서 당장 구체적인 결실이 나오지는 않았다. 미국이 대만을 중국 영토로 보며 중국을 승인하고 국교를 맺는다는 원칙에 대략 합의가 있었으나 확정되지는 않았고, 베트남전도 당분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조만간 그렇게 일이 흘러가게 되어 있었고, 그것은 닉슨의 중국 방문이 성사되지 않았다면 아마 첫 단추를 채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여기 일주일 머물렀습니다. 세계를 뒤바꿀 일주일이었지요라고 베이징의 마지막 만찬장에서 남긴 닉슨의 발언은 충분히 타당했다. 이는 단기적으로 동서 데탕트의 흐름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중국이 소련과 별개의 국가로써 독자 노선을 걷던 끝에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가며, 수세에 몰린 소련이 자체 개혁에 나서는 실마리까지 마련했다.

 

닉슨은 워터게이트라는 대실패 때문에 미국 역사상 최초로 불명예 퇴진했으며, 따라서 오늘날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불명예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중국 방문과 국교 재개로 이룬 업적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의 경력 및 색깔과 모순되는 것이었기에 의의가 더 컸고, 또 그만큼 가능할 수 있었다. 진보적 색채가 뚜렷한 대통령이 동서화해에 나설 경우 보수파의 맹공격을 유발하고, 국론이 심하게 분열될 여지가 있었지만 다름 아닌 닉슨이기에 그 부담이 그만큼 덜했던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40, 1981~1989),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못박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미국인들은 한동안 암울함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대통령이 부정부패 혐의를 벗지 못하고 탄핵 직전에 사임하는 사태 앞에 사회주의권이나 제3세계에 비해 도덕적인 정부를 가졌다고 자랑하던 목소리는 기어들어갔고, 워싱턴의 정치꾼들에 넌더리가 난 나머지 가장 경력이 수수했고 그 때문에 남들보다 깨끗해 보였던 지미 카터를 뽑았으나, 그는 이란 인질 문제 과정에서 국민에게 실망을 주었다. 여기에 1973년과 1979년의 오일 쇼크로 처음으로 미국이 언제까지나 번영할지 알 수 없다, 대공황 때와 같은 어려운 시절이 다시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져나갔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장차 중동의 유전지대가 온통 소련의 손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여기에 한 몫 했다.

 

뛰어난 화술과 위트,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를 가졌던 레이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지칭하고 악과의 투쟁을 선언했다.

 

여기에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의 체제 저항의 물결이 크게 일고 나서, 그에 따라 보통 미국인들이 오랫동안 존중해온 가치들, 가령 기독교, 반공주의, 이성애, 가족애, 청교도 정신 등이 어느새 기피와 조소의 대상이 되는 추세를 보며 당혹과 분노의 반작용이 일어났다. 동정의 대상일지언정 대등한 대상일 수는 없었던 흑인이나 여성, 동성애자, 소수민족 출신 등이 연방정부의 우대정책으로 명문대학에 입학하고, 고위관료가 되는 상황도 속이 뒤집어질 일이었다. 그리하여 정부를 믿을 수 없다” “좌파 지식인들도 질색이다” “우리의 삶의 가치는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1970년대 말부터 점점 뚜렷해지면서 이른바 신우파 및 신보수파(네오콘)라 불리는 정치-사회세력이 중부와 남서부를 중심으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78년에 캘리포니아에서처럼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복지제도의 근간인 수정헌법 16조 폐지 운동, 인종분리 부활 운동 등을 벌이며 워싱턴이나 지방정부에 압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기독교애국방위연맹같은 자체 군사조직까지 출현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 출신인데다 역대 최고령(임기 첫해에 70)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백악관에 입성할 수 있었다. 미국이 자존심을 되찾기를 바라는 일반 대중의 염원과, 좌경화되었다고 여겨지는 중앙정치를 개혁해주기를 바라는 우파들의 열망이 지적 능력은 다소 떨어진다 싶지만 누구보다 뛰어난 화술과 위트,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던 레이건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레이건은 그 기대에 부응하여 경제 및 사회정책에서 대규모 감세와 규제 철폐, 노조 억제 등의 방침을 취했으며 1980년대 초반에는(꼭 그런 정책의 성과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한 경제 회복을 이뤄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성과를 뒤집을 암초는 레이건 스스로가 마련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다른 어떤 정치인보다도 순수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반공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선 후 첫 기자회견장에서부터 소련은 우리의 적이며, 공산주의의 음모를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는 언급을 분명히 했다. 우파들이라면 당연히 여길 말이었으나, 닉슨이 시작했던 데탕트 이래 막강한 소련과 화해는 아닐지라도 공존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음을 생각하면 당혹스러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레이건은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험담을 멈추지 않았다. 1982년 영국 의회 연설에서는 저는 공산주의에서 이 시대 악의 결정체를 보았습니다.”라고 발언하더니, 198338일에는 마침내 미국 복음주의협회 연설에서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지칭하고, “우리는 선과 악의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단언했다.

 

이는 미국 국내외의 지식인들은 물론 온건파 정치인들까지 펄쩍 뛰게 만들었다. 이 늙은 대통령은 지금 이 나라를 제3차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우파는 물론 상당수의 대중들은 갈채를 보냈다. 한동안 계속 수세에만 몰려 있는 듯했던 미국이 이제 다시 자유진영의 슈퍼히어로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레이건의 선과 악의 투쟁은 말뿐이 아니었다. 그는 대대적인 군비 강화를 추진했고, 그 중에는 소련의 탄도미사일을 공중에서 파괴한다는 전략방위구상(SDI)도 있었다. 언론은 드디어 별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면서 이 구상을 조롱했다.

 

영국 의회에서 공산주의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는 레이건

 

하지만 레이건의 람보같은 강경노선이 무모하지만은 않았다. 레이건은 미국과 자본주의의 경제력을 믿었으며, 그 힘으로 군비경쟁을 걸면 소련은 뱁새가 황새 따라오는 식이 되어 결국 경제적으로 파산하고 말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리고 현실은 그대로 되었다. 소비재와 식량 수급 면에서 이미 한계를 드러내었던 소련의 경제는 무리한 군비 경쟁 탓으로 거덜나 버렸으며, 결국 고르바초프에 이르러서 개혁-개방 노선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전략핵 감축에 순순히 동의한 것은 SDI가 실현되면 전력의 균형이 급격하게 기울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을 저지하는 조건으로 핵군축을 내세웠다고도 한다.

 

공존보다 대결을 선택하고, 그것을 거침없이 공언한 미국 대통령 때문에 냉전도 현실사회주의도 더 오랠 수도 있었을 생명이 1980년대를 마지막으로 끝났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승자에게도 대가는 따랐다. 대규모 감세를 실시하면서 동시에 국방예산을 대규모로 늘리는 모순된 정책으로, 늘고 있던 미국의 재정적자는 돌이킬 수 없을 수준까지 팽창했다. 그리고 최고에 달한 군산복합체의 힘은 냉전이 끝난 다음에도 그 힘을 쓸 곳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조지 W. 부시(43, 2001~2009), “테러와의 전쟁을 일으키다

   

어떤 이유에서든 정치에서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선과 악의 투쟁을 본질로 삼는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압살시키고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게 만들 위험이 있었다. 레이건 이후 펼쳐진 유일 초강대국의 시대, 미국은 그런 위험 속에서 불안한 영광의 나날을 보냈다.

 

41대 대통령이던 조지 H. 부시의 아들인 조지 W. 부시는 그런 불안한 영광의 끝자락에, 21세기에 들어선 미국이 과연 무엇을 꿈꾸며 무엇을 위해 애써야 할 것인지 불확실하던 시기에 가까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야말로 가까스로였던 것은 민주당의 엘 고어와 미국 대통령 선거 사상 최대의 접전을 벌이고, 결국에는 개표 시비 끝에 석연치 않음을 남긴 채로 백악관에 입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민은 클린턴 시대의 경제회복과 보보스적인 세련된 진보적 색채를 좋아했지만, 한편으로 그 경박함을 염려했다. 클린턴이 성추문에 휘말려 탄핵 직전까지 갔던 일과 닷컴 버블의 붕괴는 트루먼이나 레이건과 같은 지도자, 투박하고 우둔하지만 한편으로 성실하고 과단성 있는 지도자가 필요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부추겼다. 그러나 그런 확신은 없는 상태에서 두 번째의 부시 대통령이 탄생했다.

 

조지 W. 부시는 이처럼 국론이 분열된 가운데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지도자의 위치를 처음부터 포기했다. 진보 쪽에서 욕을 먹을지언정, 보수의 지지를 확실히 받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클린턴의 군축안을 사실상 폐기하고 교토 의정서 비준을 거부하는가 하면, 낙태 금지 캠페인을 후원하고 종교계의 청원에 응해 줄기세포 연구를 금지했다. 그리고 헌법을 고쳐 동성 결혼을 영구 불법화한다는 수정안을 냈는데, 그것은 누가 봐도 실현될 가능성이 없었을 뿐더러 진보주의자들의 비난과 저주를 촉발하는 조치였음에도 오직 보수 우파의 환심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추진한 조치였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부시

 

이뿐이었다면 조지 W. 부시의 이름이 21세기 미국사, 그리고 세계사에서 별로 비중을 차지하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001911, 미국인과 세계인들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뉴욕과 워싱턴에서 벌어진 테러와 그로 인한 세계 무역 센터의 붕괴는 진주만 이래 60년 만에 미국이 공격당한 일이었으며, 미국 본토이자 심장부가 공격을 당한 것으로는 미-영 전쟁 이래 210년 만의 일이었다.

 

패닉에 빠진 미국인들에게는 뭔가가 필요했다. 링컨이나 F. 루스벨트였다면 여기서 반성과 참회의 제안을 꺼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시는 달랐다. 분노와 당혹 속에서, 보수 우파의 환심을 사는 데 그쳤던 정책 목표가 레이건 시대의 선과 악의 투쟁수준으로 승화되었다. 그는 자신이 미국사의 여러 영웅적인 대통령들처럼 한 시대를 끝내고 다른 시대를 열어갈 소명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테러 다음날인 912, 그는 보좌관들을 은밀히 불러 이 공격과 이라크의 연관성을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알 카에다의 소행이며 이라크와는 무관한 듯하다는 보좌관들에게, “알고 있네. 하지만 알아보라고.”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는, 108일에 이슬람 과격파인 탈레반이 집권하고 있으며 알 카에다의 오사마 빈 라덴을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받던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함으로써 전쟁을 실천에 옮겼다.

 

그 다음 목표는 이라크였으며, 부시는 20021월에 악의 제국과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악의 축으로 이라크와 북한, 이란을 지목했다. 그리고 1년 동안 공들여 이라크 침공을 준비하면서, 이라크가 핵무기와 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을 근거로 내세웠다. 1990-1991년의 걸프전의 경험은 미국이 테러를 자행하는 비민주적 국가를 최소한의 희생만 치르고 신속히 공격할 때는 국내외의 지지와 찬양을 얻게 된다는 인식을 심었으며,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의 2단계로 오사마 빈 라덴은 아니라도 사담 후세인을 잡는다면 명분과 실리가 모두 확보된다고 믿었다. 전쟁 비용을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라크가 제한하고 있는 석유 공급량을 풀기만 해도 그 정도 비용은 순식간에 메워진다고 장담했다.

 

2003320일 시작된 전쟁은 예상대로 한 달도 되지 않아 일방적으로 끝났다. 후세인 정권은 무너졌으며, 후세인은 몇 달 뒤 체포되어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악몽의 시작이었다. 부시와 그의 자문역들은 독재정권 아래 이라크 국민도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미국이 정권을 쓰러트려 주면 그들은 환호하며 평화롭게 민주적 정부를 수립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간에 암이 발생했으니, 간을 모조리 잘라내 버리면 이 사람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과 비슷했다. 강력한 정권이 갑자기 사라지자 억눌려 있던 수니 파와 시아 파의 대립, 아랍계와 쿠르드계의 대립 등이 불거져 나왔으며, 미군을 사악한 점령군으로 여기는 집단들의 게릴라 공격과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2차 대전 후 일본과 독일을 통치했던 미군의 정책과는 달리, “선과 악의 투쟁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부시 행정부는 구 정권 부역자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구금하도록 했다. 그러자 행정 마비 사태가 벌어져 기본적 생필품의 유통이나 전기, 가스의 관리마저 중단됨으로써 이라크 전역은 원시 상태로 떨어져 버렸다. 게다가 장담과는 달리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고, 관타나모 수용소 등에서 미군이 이라크 포로들에게 가혹행위를 벌인 사실이 폭로되면서 미국 국내외의 여론은 급속히 나빠졌다. 전쟁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은 미군의 사상자가 전쟁 이후에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으며, 비용도 애초 예상을 훨씬 넘어 무섭게 확대되어 갔다. 이라크 민간인의 희생자는 100만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알 카에다는 여전히 건재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타도했다고 여긴 탈레반이 부활하여 다시 정권을 되찾았다.

 

테러와의 전쟁은 테러가 일어나게 만든 원인을 더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미국의 꿈과 이상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널리 심어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초강대국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힘이 과연 정당한 힘인지, 다음 시대에도 존중받으며 유지될 필요가 있는 힘인지, 많은 이들이 품고 있는 의문에 대해 이후의 대통령들은 진지하게 대답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글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