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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분쟁 4개 섬 이야기 / 중국 vs 일본 센카쿠열도

풍월 사선암 2012. 9. 6. 09:15

스페셜 리포트 동북아 분쟁 4개 섬 이야기

김용의 무협소설 녹정기가 중국인을 움직였다

 

중국 vs 일본 센카쿠열도

이동훈 기자

◀홍콩의 언론인 겸 소설가 김용

 

()나라 문왕에게는 강태공(姜太公)이 있었고, 후한(後漢)의 광무제에게는 엄자능(嚴子陵)이 있었습니다. 모든 성명천자(聖明天子)에게는 반드시 한 사람의 물고기() 낚시()’를 잘하는 충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황상(강희제)이 날 이곳으로 보내 낚시를 하라고 하셨으니, 우리 이 섬을 조어도(釣魚島·댜오위다오)’라고 부릅시다.”

 

홍콩 언론인 김용의 무협소설 녹정기(鹿鼎記)’의 한 대목이다.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내건 대만의 비밀결사 천지회(天地會)의 일원이자 만주족 청()나라 강희제의 총신인 꼬마 환관 위소보(衛小寶)는 얼떨결에 중국 강역을 확립한다. 현재 중국, 홍콩, 마카오, 대만 등을 들끓게 하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역시 위소보가 확보한 영토라고 소설은 쓰고 있다.

 

녹정기는 1969년부터 1972년까지 김용이 창간한 홍콩의 일간지 명보(明報)’211개월 동안 연재됐다. 김용은 명보의 사주 겸 주필로 무협소설까지 연재했다. 연재 후에도 녹정기는 소설, 만화, 드라마와 영화, 게임으로 해를 거듭해 만들어졌다. 양조위, 유덕화, 주성치 등 중화권 톱스타들은 돌아가며 녹정기의 주연을 맡았다.

 

녹정기는 김용의 대중화주의관점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녹정기는 전편에 걸쳐 강희제가 중국의 영토를 넓혀가는 과정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녹정기에는 센카쿠열도뿐만 아니라 대만, 티베트, 위구르, 러시아 문제까지 다뤄진다. 최근 센카쿠열도 등 영토문제를 둘러싸고 중화권이 공분하는 문화적 맥락을 녹정기에서 찾을 수 있는 셈이다.

 

중국인 불만을 소설로 달래다

 

김용이 녹정기를 연재할 때인 1969년부터 1972년까지는 조국의 영토주권을 둘러싼 중화권 전체의 근심걱정이 최고조에 달할 때였다. 연재를 시작한 1969, 중국군과 소련군은 북만주의 우수리강 전바오다오(珍寶島·러시아명 다만스키섬)에서 무력충돌을 벌였다. 중국군은 초반의 기습점령에도 불구하고 소련군 대대적 반격에 물러서야 했다.

 

녹정기 연재를 끝낼 즈음인 1972년에는 일본과 센카쿠열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1972년 중·일수교를 앞두고 센카쿠열도의 영토관할권 문제가 불거진 것.

 

앞서 미국은 태평양전쟁 때 점령한 오키나와섬을 1972년 일본에 반환하면서 센카쿠열도를 함께 넘겨버렸다. 센카쿠열도를 오키나와에 딸려 있는 부속도서로 판단한 것. 이에 중국과 대만, 홍콩, 마카오 등 중화권에서는 미국이 중국의 미()수복 영토인 댜오위다오를 양해도 없이 일본에 넘겼다며 불만이 자자했다. 이해당사자의 한 축인 미국은 1971년 오키나와 반환을 발표하며 센카쿠열도의 행정관할권은 1972년부터 오키나와와 함께 일본으로 반환한다면서도 단 주권문제는 쌍방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내팽개쳤다.

 

중국인들의 이 같은 불만을 무협소설로 호쾌하게 달래준 사람이 김용이다. 마침 미국의 일방적인 센카쿠열도 반환방침이 전해지면서 미국 뉴욕의 차이나타운에서부터 보조(保釣·댜오위다오 지키기)운동의 기운이 싹틀 때였다. 이때 김용은 녹정기 연재의 막바지인 197246회 연재분에서 댜오위다오란 섬의 유래와 관할이 중국에 있음을 위소보의 입을 빌려 밝힌 것이다.

 

위소보는 주나라 문왕의 강태공과 후한 광무제의 엄자능을 거론하며 조어(釣魚)’란 말의 유래를 설명한다. ‘물고기를 낚다는 뜻의 조어란 단어는 강태공의 낚시고사 이래 글자 이상의 함의를 가졌다. 중국 베이징의 국빈관이 조어대(釣魚臺)’인 것과 같다. 중국 역사와 문사철에 해박한 지식을 과시한 김용의 설명에 중국인들의 고개를 끄덕였다.

 

김용이 창간한 홍콩신문 명보에 연재

 

러시아와의 영토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녹정기 주인공 위소보는 1689년 러시아군의 남하를 물리치고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해 오늘날 동북3성을 지켜낸 당사자로 그려진다. 또 꼬마 환관 위소보가 러시아의 소피아 황녀(표트르 대제의 누이)를 성()적으로 농락해 러시아 황위 계승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자 중국인들은 배꼽을 잡으며 열광했다.

 

더욱이 김용이 창간한 홍콩의 명보역시 영토문제에 있어서는 친중국적 입장을 강경하게 견지했다. 1959년 명보를 창간한 김용은 사주 겸 주필로 민족지를 자처하며 명보를 홍콩 최고신문으로 키웠다.

 

이 같은 영향으로 일부 홍콩 언론은 오키나와 전체의 반환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펴며 센카쿠열도 문제를 오키나와 문제로까지 확전시키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1972년 오키나와 행정권의 일본 반환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최소 센카쿠열도의 실효지배권을 일본으로부터 되찾아오겠다는 심산이다. 사실 과거 류큐(琉球)로 불린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지도 얼마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일각에서 일본의 독도영유권 제기에 맞서 대마도의 영유권 문제를 제기하자는 맞불론과 사실상 일맥상통한다.

 

게다가 센카쿠열도는 지리적으로도 다툴 여지가 제법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일본이 실효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고는 하나 지리적으로 대만 북부의 지룽(基隆)항에서 190, 오키나와의 나하(那覇)항에서는 420떨어져 있다. 지도에서 보면 센카쿠열도가 일본보다 중국과 대만에서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이 한눈에 드러난다.

 

녹정기끝으로 절필 선언

 

TV드라마로 제작된 녹정기의 주인공 위소보(가운데)와 일곱 명의 부인.

 

또 중국 측에서는 “‘센카쿠열도(尖閣列島)’란 이름 자체가 일본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과거 태평양으로 향하던 영국 해군이 이 일대 도서들을 발견한 뒤 피나클섬(Pinnacle island)’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단순 번역한 것이 센카쿠열도란 주장이다. ‘Pinnacle’은 교회의 뾰족한 첨탑을 일컫는 말로 첨각이란 말과 일맥상통한다.

 

김용은 1972녹정기를 마지막 작품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신필 김용의 절필은 무림고수의 강호 은퇴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녹정기에 대한 중국 독자들의 호불호는 크게 엇갈린다. 위소보는 무공은 형편없지만 오로지 세 치 혀로 승부하는 난봉꾼으로 그려진다. 기녀원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재물과 도박, 여자만 밝히는 호색한 그 자체다. 반면 만주족 강희제는 희대의 명군으로 그려져 한족 순혈주의가 농후했던 이전 작품과는 180도 달랐다.

 

하지만 호불호에도 불구, 녹정기는 중국 영토가 확립되는 과정을 야사적 관점에서 일반에 각인시켰다는 평가다. 녹정기 역시 강희제의 부친 순치제가 오대산에서 승려가 됐다청나라의 4대 의혹중 하나에 근거했다. 여기에 이자성, 오삼계, 강희제, 정성공, 시랑 등 명말청초의 실존인물을 곳곳에 배치해 실제 역사기록처럼 인식된 것이다. 더욱이 김용의 무협소설은 중화권 최고지도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해 장쩌민(江澤民), 장징궈(蔣經國), 천수이볜(陳水扁) 같은 양안의 최고지도자들은 김용의 팬을 자처했다.

 

중국의 한 개인 블로거는 김용의 댜오위다오에 대한 공헌이란 글을 통해 녹정기는 지난 세기 1960년대 후반에 발표된 작품으로 당시 대륙은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다. 지금과는 이미 반세기 이상 거리가 떨어졌지만 김용 선생의 시각은 독특하고, 사람을 탄복케 한다. 또한 댜오위다오 주권 확립에 대한 공은 이보다 더 클 수 없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