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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인물열전] 20세기의 첫 절반 미국을 만든 결정들(3)

풍월 사선암 2012. 8. 10. 11:36

 

 

미국, 세계를 위해 꿈을 꾸다

 

미국의 꿈이라는 말이 있다.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고,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최소한 미국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인디언의 피와 흑인의 눈물, 그리고 노동자의 구슬땀으로 얼룩진 미국 역사이기에 그런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많으리라. 그래도 오랫동안 엄격한 신분제와 전통, 종교의 굴레에 매여 스스로의 자유와 행복을 꿈꿀 권리가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으며, 그래서 전 세계에서 대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아메리카로 이민을 떠나곤 했다.

 

평등권, 자유권, 행복추구권을 규정한 미국 헌법 제정 이래로 이 미국의 꿈은 미국인들의 정서에 배어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이라 언급된 때는 1931년이었다. 역사학자 제임스 애덤스가 자신의 책 [미국의 서사시]에서 처음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당시는 미국도 대공황의 늪에 빠져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20세기 전반기라는 더 큰 시각에서 보면 미국의 꿈이라는 표현이 구체화되고 널리 퍼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번영을 누리며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945.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축하하는 타임스퀘어의 키스.

 

한편 19세기에 세계를 주름잡았던 유럽의 입장에서는 이 시기가 몰락과 환멸의 시기였다. 자멸적인 세계대전과 대공황, 사회주의 혁명. 유서 깊은 왕조는 쓰러지고, 세계 곳곳의 식민지들은 독립해 버리고, 왜소해진 국력은 미국, 소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으로 전락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주검이 묻혀 있었다. 여기에 미래까지 핵전쟁과 공산화라는 어두운 구름에 싸여 있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쓴 [서구의 몰락]이 장기 베스트셀러가 된 일은 당연했다.

 

이제 남은 의문은 이것이었다. 미국의 꿈은 서구의 몰락을 구원할 수 있는가? 유럽 대신 서구문명의 주도국이자 자유진영의 사령탑 역할을 맡은 미국, 이 나라의 거대한 부와 군사력, 그리고 낙천주의는 새로운 희망을 심어줄 것인가? 미국에서 단지 자동차와 비행기와 달러만이 아니라, 새 시대의 표준이 될 사상과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20세기 전반의 미국 대통령들은 이런 의문에 답변해야 했다. 그는 이미 한 국가의 대통령 이상의 존재로, 수십억 인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리는 입장에 서 있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을 내린 미국의 대통령들

 

우드로 윌슨(28, 재임 1913~1921), “14개조를 발표하다

 

백인의 사명을 짊어져라. 그대의 온 힘을 쏟을지어다. 가라, 그대의 자식들을 먼 나라로 보내라. 그대가 예속시킨 자들을 보살피게끔." 19세기가 저물던 1899, 영국의 문호 러드야드 키플링은 [백인의 사명]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서구의 과학기술, 계몽사상, 정치질서, 그리고 문학과 예술 등도 모두가 인류 발전의 정점에 서 있으며,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비서구 세계의 문명은 사실상 야만에 지나지 않는다. 재수 없게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야만스러운 통치와 비합리적인 미신, 낡은 관습에 묶여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백인은 유색인종의 땅에 진출하고 그들을 개화시킴으로써, 전 인류의 발전에 기여해야 할 숭고한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아니 20세기 중반만 되어도 미친 소리라 여겨졌을 이런 주장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대부분의 서구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주장이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미국이 일본에 한국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고 스스로는 필리핀 지배권을 보장받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등은 전혀 죄책감을 갖지 않았다. 그런 식민 지배는 자국의 국익과 자본가들의 이익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스스로는 통치할 능력이 없는미개인들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서구인의 입장에서 그것은 자신들의 땅을 빼앗을 뿐 아니라 오랜 전통과 신앙마저 모욕하는 만행일 따름이었고, 사명론 운운하면서도 정작 식민지에 교육을 보급하는 일에는 인색하고, 식민지 출신자의 참정권도 인정하지 않으며 차별과 멸시를 거듭하는 모습은 울분과 독립운동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유럽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나 투르크 같은 다민족 지배체제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운동은 결국 세계대전을 촉발했으며, 이로써 유럽의 영광도, 백인사명론의 깃발도 불길 속에 스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을 정리하는 시점에서, 앞으로의 국제질서를 어떻게 잡아 나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강력히 대두되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파리강화회의에, 그리고 전쟁을 연합국의 승리로 돌아가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행보에 관심을 집중했다.

 

◀우드로 윌슨. 14개조는 민족자결주의를 담은 선언으로 당시의 세계를 뒤흔들었다.

 

식민지에서 주권 문제를 결정할 때는, 관련 식민지 주민의 이해가 식민지를 통치하는 해당 정부의 요구와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엄격히 따르면서, 모든 식민지의 문제를 자유롭게, 어떤 사전 조건도 없이, 절대적으로 공평하게 해결해야 한다.”(5)

 

이탈리아 국경선의 재조정은 명백히 인식되는 민족간 경계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9)

 

현재의 오스만 제국에서 투르크인이 거주하는 영토의 주권은 확실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활의 확실한 안전과 결코 방해받지 않는 자율적 발전의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12)

   

우드로 윌슨이 191818일에 미국 의회에서 발표한 “14개조는 국제연맹이라는 다자안보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평화주의와 각 민족별로 스스로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담은 선언으로 당시의 세계를 뒤흔들었다. 특히 억압받고 있던 비서구 민족들에게 이는 복음과 같았으며, 한국에서도 이에 자극받아 3.1 운동이 일어날 만큼 영향이 컸다.

 

◀“14개조를 발표하는 윌슨

 

그러나 이 14개조에 민족자결주의가 나타나 있기는 해도, 그것은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투르크 등 전후 유럽의 국경선을 다시 그으면서 주로 패전국들이 지배하던 민족들을 승전국에게 전리품처럼 돌리기보다 자립하여 별도의 국가를 만들도록 하자는 원칙이 핵심이었다. 유럽의 비서구 식민지들, 특히 승전국들의 식민지들을 민족별로 독립시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물론 5조에서 식민지 주민의 이해가 식민지 정부의 요구와 동등하게 취급된다는 단서가 있었지만, 누가 그 이해를 판단할 것인가? 윌슨의 14개조는 비서구인들에게 사실상 오해된 복음이었다.

 

그렇지만 오해라도 좋았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승전국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전쟁 이전의 제국주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했으나, 이미 역사는 민족자결주의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 뒤에는 아무도 그 추세를 막을 수 없게 된다. 윌슨이 보다 비중을 두었던 국제평화주의 역시, 비록 국제연맹은 먼로주의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 미국 정치인들의 외면 때문에 실패로 끝나지만, 장기적으로 새로운 세계에서 누구나 공감하는(적어도 겉으로는) 원칙으로 서게 된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인류애와 합리주의를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약육강식을 당연하게 보던 제국주의 국제정치의 모순이 낳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쳐도, 정치철학자이자 대학 총장 출신으로 정치는 힘만이 아닌, 어떤 이상을 추구하는 정신으로 움직인다고 믿었던 강대국 지도자의 구상과 결단이 그 흐름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음은 틀림없다. 그리고 비록 윌슨 스스로는 그 벽을 넘지 못한 채 백악관을 떠나야 했지만, 먼로주의가 포함하던 미국의 고립 지향성은 더 이상 설 땅이 없었다. 이제 미국은 세계 속의 미국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32, 1933~1945), “뉴딜 정책을 펴다

 

◀경제대공황에 대응하여 뉴딜정책을 내놓은 루즈벨트

 

멕시코 만류는 미국 해안을 따라 북대서양으로 올라가지만, 돈의 흐름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끝없이 밀려들어오는군.” 192910월 초, 어느 기업가가 맨해튼의 빌딩 사무실에서 증권거래소를 내려다보며 유쾌하게 남긴 말이었다.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그 증권거래소에서 터져 나와 전 세계를 덮친 대공황의 역류에 휩쓸려 전 재산을 잃고, 자살의 위기에 내몰린다.

 

대공황은 미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위기였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시기였다. 매년 수 천 개의 은행이 문을 닫고, 매주 수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1929년에서 1932년 사이에 25퍼센트가 감소했으며, 1933년에는 실업자가 1500만에 이르러 실업률 30퍼센트를 기록했다. 거의 모든 집마다 실업자가 있었고, 생필품을 타기 위해 날마다 긴 줄을 서야 했다. 집집마다 저당에 잡혀 있었고, 농토는 내버려져 쑥대밭이 되었다. 대공황이 일어난 까닭에 대해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 연방지불준비위원회에서 금리 정책을 잘못 씀으로써 발생한 통화 경색이 원인이라는 설, 건설이나 자동차 같은 일부 산업에 너무 경제력이 편중된 상황에서 이들 산업이 불황에 빠지자 그 여파가 대규모로 확대되었다는 설, 실수요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지나친 공급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이윤 저하에 따라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자금 회수를 하려다가 파국을 빚었다는 설 등이 있다.

 

아무튼 뭔가 대책이 필요했고, 그 대책은 얼어붙은 투자 심리를 녹이고 쓰러진 경제를 붙들어 일으켜 다시 뛰도록 부추기는 것이어야 했다. 193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여러분을 위해, 나를 위해, 미국민 모두를 위해 새로운 정책(뉴딜)을 펴겠다고 외쳤을 때, 미국 국민은 그 목소리에 기대해 보기로 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경제위기가 은행가와 금융업자들의 지나친 탐욕에서, 나아가 맹목적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속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질타했다. 따라서 보다 공동체적인 접근이, 모두 힘을 합쳐 어려움을 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아직도 부강한 나라이며, 지금의 상황이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희망의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이 위대한 나라는 과거의 고난을 이겨냈듯, 이 고난 역시 이겨낼 것입니다. 힘을 되찾고, 번영해 나갈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무엇보다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고.”

 

그는 취임하자마자 뉴딜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공사, 컬럼비아 강의 그랜드쿨리 댐 건설을 비롯해 대규모 토목공사가 정부 주도로 추진되었다. 이로써 일자리를 늘리고, 기업이 움직이고, 시중에 돈이 돌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또 루스벨트는 민간자원관리공사를 세워서 일자리가 없는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국가재건공사에 노동자와 기업을 중재해서 서로 한 발짝씩 양보해 어려운 시절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게 하는 역할을 맡겼다. 협동 농업을 촉진하는 농업조정법과 농민에 대한 대출을 정부가 돕는 농업 대출법은 황폐해진 농촌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다. 여기에 은행법을 개정하여 부실 은행들을 퇴출시켜 우량은행이 덩달아 부실화되는 사태를 막았고, 은행과 증권거래소에서 전처럼 무절제한 투자가 성행하지 않도록 금융거래를 규제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이런 정책이 사회주의적이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루스벨트는 기본적으로 시장과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자였다. 다만 그는 우드로 윌슨의 신자유 정책을 계승하여, 대기업과 금융자본의 횡포를 규제하고 경제가 중소기업과 서민 투자자의 이익을 배려하는 쪽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목표를 이루려면 경제를 자유방임으로만 둘 것이 아니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다. 그것은 그가 1941년의 연두교서에서 밝힌 네 개의 자유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정부가 국민에게 반드시 보장해야 할 자유로 제시한 것에서도 나타나 있다.

   

◀뉴딜 시대 사회보장의 확대를 선전하는 포스터 

 

하지만 뉴딜에는 반발이 심했으며, 사실 그 효과도 의심스러웠다. 정부가 창출한 일자리는 임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근본적인 실업대책이 되지 못했고, 농촌 진흥책도 대부분의 소작농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 주요 입법이 위헌 심사 과정에서 좌초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금융자본의 반발뿐 아니라, 유진 뎁스 같은 사회주의자나 휴이 롱 같은 포퓰리스트가 보다 급진적인 체제개혁을 요구하며 한때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뉴딜을, 미국 경제를, 그리고 루스벨트를 구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으며, 전시체제를 빌미로 비로소 국가가 경제를 본격적으로 통제하고 확실한 수요에 맞춰 산업을 가동시킴으로써 비로소 경제가 회복 물결을 타게 되었다.

 

결국 뉴딜이 대공황에서 미국을 구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로써 미국은 확실히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허버트 스타인은 재정정책으로 총수요를 적절히 유지하려는 태도, 저소득층에 대한 소득 재분배, 경제의 특정 부문에 대한 정부 규제의 강화를 뉴딜의 유산으로 꼽았다. 이는 이후 1970년대 말부터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의문과 도전의 대상이 되지만, 전체적으로는 미국, 그리고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노선으로 남았다. 아직 소득세조차 확립되지 못하고 있었으며, 정부는 경제보다 치안과 외교 국방에 몰두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던 1920년대. 그러나 대공황이라는 위기와 그 극복 과정에서 오랫동안 비범한 카리스마를 보이며 집권한 루스벨트라는 지도자가 있었기에, 1930년대부터는 전혀 다른 국가관과 경제관이 현대인의 상식처럼 자리잡게 된다.

 

린든 존슨(36, 1963~1969), 민권법에 서명하다

   

교활하고 권력욕으로 가득 찬 정치꾼이 숭고한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까? 야당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는 집권당이 자신의 텃밭을 송두리째 포기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대부분의 정치학자들은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도 있었다. 1960년대 중반의 미국에서, 주인공은 워싱턴도 아니고 링컨도 아닌, 그리고 케네디조차 아닌 린든 존슨이었다.

 

어느 나라나 오직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태어난 듯한 인간이 있기 마련인데, 당시 미국에서 존슨만큼 권력욕이 강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농담 삼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하루 종일 정치 생각만 한다는데, 사실이 아니야. 매일 18시간 이상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잠은 자야 하잖아.” 그는 누군가와 밥을 먹고 야구장에 가고 술을 마시는 일상적인 행동까지도 전부 일정한 정치적 이익을 노리고 했고, 마주치는 모든 것을 정치적 기회로 삼으려 했다. 상대의 능력과 자신의 필요에 따라 뼈가 없는 듯 굽실대기도 하고, 위풍당당하게 큰소리치기도 했으며, 보수적인 사람 앞에서는 천하의 고집불통 보수인 듯이, 진보적인 사람과 있을 때는 진보의 기수인 듯이 이야기했다.

 

그런 그가 정치에 입문한 1930년대 후반부터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1960년대까지 미국은 점점 더 번영하고 풍요를 누리게 되었으며, 초강대국의 자리에 올랐다. 이른바 정치인들이 통상적으로 고민하는 과제인 부국과 강병은 굳이 크게 애쓰지 않아도 잘 되어갔다. 그러나 정말 큰 정치인이라면 외면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그처럼 부강한 미국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즉 유색인종과 빈민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문제였다. 노예해방이 이루어진지 백 년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미국 내 흑인의 지위는 열악했다. 특히 남북전쟁 후 남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남부인들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짐 크로 법'에 따라, 흑인은 학교, 식당, 공원, 버스 등 모든 공공장소에서 백인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성서조차 백인용과 흑인용이 있었다. 흑인의 투표권도 1870년의 수정헌법으로 명목상 인정되었지만, 학력과 재산 등에 제한을 두는 방식에 따라 사실상 1960년대까지 인정되지 않았다. "(노예해방 후)백 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들은 분리주의의 수갑과 차별의 사슬에 묶여 비참한 처지를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 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들은 이 풍요로운 나라의 한가운데에서 가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백 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들은 미국사회의 한 구석에서 시들어가며, 자신의 조국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이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에서 부르짖은 그대로였다.

 

◀린든 존슨. 권력욕이 가득 찬 정치꾼이 숭고한 이상을 실현한, 정치의 아이러닉함을 보여준 대통령이다.

 

존슨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적임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진보인지 보수인지 알 수 없는 색깔에다, 무엇보다 그가 남부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윌슨과 F. 루스벨트 이래 진보적인 정책에 앞장서는 편이었지만, 남부를 기반으로 하는 탓에 인종문제만은 유독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윌슨조차 흑인들을 불법적으로 폭행, 살해하는 일을 일삼던 큐 클랙스 클랜(KKK)을 찬양했을 정도로, 민주당에서 행세하려면 인종차별을 지지하거나 최소한 묵인해야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번영기를 맞이해 흑인의 의식은 꾸준히 높아졌고, 마틴 루터 킹처럼 백인 중산층에 비해 지식이나 재산에서 밀리지 않는 흑인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평등을 요구하는 흑인들의 목소리는 1954년의 브라운 판결(학교에서의 인종분리 위헌 판결), 1955년 로자 파크스의 버스 승차 거부 운동, 1960년 루비 브리지스의 백인 초등학교 시도 등 계속해서 커지고 절실해져갔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이기는 하지만 북부 출신에 젊고 진보적 이미지가 뚜렷한 존 F.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면서 흑인 민권법 제정 가능성은 높아지는 듯했다.

 

흑인민권운동 시위가 일부 폭력적 진압 때문에 도리어 최고조에 달했던 1963, 케네디는 마침내 민권법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는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불만스러웠다. 내용은 엉성하고, 약점투성이였던 것이다. 결국 그 통과는 상원에서 부결된다. 그리고 케네디는 얼마 뒤 댈러스에서 암살된다. 그러나 이는 린든 존슨이 그토록 꿈꿔온 최고권력의 자리를, 그리고 이제야말로 민권법이 통과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민권법에 서명하는 존슨. 바로 뒤에 마틴 루터 킹이 서 있다.

   

사실 존슨은 1957년과 1960년에도 민권법을 추진했었다. 하지만 당혹스러워 하는 남부의 지지자들에게 "검둥이들이 하도 시끄러우니 별 거 아닌 떡밥으로 입을 다물게 하려는 것"이라고 둘러대었고, 사실 그 법안들은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했었다. 하지만 존슨은 케네디보다도 더 오래 전부터 흑인과 빈민의 민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갈수록 가열되는 민권투쟁을 보며 자신과 민주당이 남부와 인종차별이라는 끈을 끊지 못하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없음을 확신했다. 케네디 암살에 따른 전국적인 충격과 애도의 분위기가 민권법 통과라는 점에서는 절호의 기회라는 점도 포착했다. 그래서 그는 케네디의 민권법을 더 세심히 손질하고 보완한 다음 다시 통과를 추진했다.

 

이는 공화당보다 같은 민주당 내에서, 즉 완고한 남부 출신들에게서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존슨의 오랜 후원자 역할을 해온 남부의 터주대감, 딕 러셀은 그를 배신자라고 부르며 "이걸로 민주당은 남부의 지지기반을 영영 잃게 될 걸세!"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존슨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러라죠. ,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라고 대꾸했다. 결국 러셀 등은 73일이라는 미국 사상 최장기간의 의사진행 방해(필리버스팅)를 하며 민권법 통과를 막으려 했으나, 존슨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공화당 의원들과 손을 잡고 끝내 법안 통과를 이루어냈다. 196472, 존슨은 짐 크로 법을 비롯한 모든 인종차별법을 무효화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존슨은 이듬해에는 다시 마틴 루터 킹의 암살로 조성된 분위기를 틈타 투표법을 개정해 흑인에게 명실공히 투표권을 주었다. 1966년에는 최초의 흑인 장관으로 로버트 위버를 임명하고, 1967년에는 최초의 흑인 연방대법관으로 서굿 마샬을 임명하기도 했다. 흑인의 인권뿐이 아니었다. 존슨은 취임하자마자 대대적인 사회복지 강화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1965년의 노인 의료보험(메디케어)1966년의 빈민의료보조(메디케이드)2010년에 오바마 대통령이 종합 의료보험 개혁을 추진하기까지 미국 의료보험의 근간이었다. 1965년의 이민법으로 이민자 출신에 따른 차별 대우를 없앴으며, 저소득층 주택 구입을 지원하고 공립학교 재정지원을 늘리는 등 사회 전반적으로 복지 수준을 크게 높였다. 이는 존슨이 19651월 연두교서에서 표현한 "위대한 사회"의 실체였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부강해진 미국, 그렇다면 미국민인 이상 누구나 일정 수준의 복지를 누려야 하지 않느냐, 그렇게 두루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진정 위대한 사회가 아니겠느냐는 뜻이었다. 이런 노력으로, 1959년에 21퍼센트에 달했던 빈민의 비율이 1969년에는 12퍼센트로 떨어졌다.

 

케네디의 이미지에 덮이고, 베트남 전쟁이라는 실책으로 널리 비난의 대상이 된 존슨은 오늘날 가장 위대한 미국 대통령의 반열에는 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재임 중 내린 결정들만큼 위대한 결정들도 별로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그 자신의 영광과 정치권력 강화를 위해, 오랜 동지들을 배신하고 당의 주요 지지기반을 잘라내 버린 행동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마키아벨리즘에 따른 것이었을지라도, 역사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정치인이 기여할 수 있는 최선의 기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글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