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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인물열전] 건국에서 19세기 초까지 미국을 만든 결정들(1)

풍월 사선암 2012. 8. 10. 10:54

 

미국이라는 배, 긴 항해에 나서다

 

이제 우리는 () 이 식민지 연합(United Colonies),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들(states)임을 엄숙하게 공표하고 선언한다. (...)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들로서, 연합은 전쟁을 선언하고, 종전을 결정하며, 동맹을 맺고, 무역을 개시하는 등등 독립 국가들이 당연히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할 권리를 지닌다.”

 

◀독립선언서를 쓰면서 토론하는 프랭클린, 존 애덤스, 제퍼슨(좌로부터)

 

177674, 토머스 제퍼슨이 쓴 이 [독립선언서](원제는 아메리카주연합 총회 선언문)13개 식민주 대표들이 모인 대륙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로써 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다.

 

열렬한 자유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였던 제퍼슨을 비롯해서, 벤저민 프랭클린, 제임스 매디슨, 존 애덤스, 로버트 리빙스턴, 조지 워싱턴, 제임스 먼로 등 건국의 아버지들은 당시 서구를 풍미하던 계몽사상에 따라 미국의 독립을 정당화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게 천부인권을 가지며, 그 인권은 생존권, 자유권, 행복 추구권이다. 정부란 이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그 목적에 맞지 않는 정부라면 인민은 언제든 이를 거부하고 타도할 수 있다. 그런데 영국은 식민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메리카인의 인권을 무시하고 침해해 왔다는 것이다. 식민지 대표의 동의 없는 과세, 식민지 의회의 입법권과 사법권 제한, 식민지인의 동의 없는 군대 주둔 등이었다. 그러므로 아메리카인은 본국의 부당한 간섭과 압제에서 벗어나 아메리카의 독자적 정부를 수립할 당연한 권리가 있고, 그 권리에 따라 13개 주의 독립을 선언한다고 했다.

 

이 선언은 이후 약 8년 동안의 전쟁을 거쳐 결실을 보게 된다. 이로써 사실상 세계 최초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표방하는 공화주의 국가가 세워졌으며, 또한 그 나라는 이후 2백년 동안 국력을 차차 키워가면서 마침내 20세기에는 옛 로마제국을 떠올리게 하는 초강대국으로서 세계를 호령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 번영의 길은 처음부터 명백한 운명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또한 많은 희생과 부조리를 낳으며 진행된 발전이었고, 그 주체들도 모순과 내분을 겪으며 갈등하는 일이 많았다. [독립선언서] 자체에 그런 갈등의 소지가 이미 나타나 있었다. 독립선언은 13개 주의 대표가 하나의 연합을 이루면서(United) 발표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각 식민주가 완전한 독립국가(States)로서 완전한 주권을 갖는다고 되어 있었다. 따라서 영국을 비롯한 외국과의 전쟁이나 경제적 번영을 위해서는 미국이 그야말로 하나의 미국으로 통합될 필요가 있었지만, 그것은 각 주의 독립 주권과 어긋난다고 하여 처음부터 논란과 대립이 그치지 않았다. 각 주들이 독립국가로서의 성격을 없애고 일정한 자치권을 갖는 한 국가의 지역들로 자리매김되는 과정은 이후 백 년 이상이 지난 19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완료되었다. 또한 이 선언은 아메리카(America)의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으나, 그 아메리카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13개 주의 행정구역에만 한정되는가? 북아메리카인가? 아니면 북남미 대륙 전체인가? 또한 흑인과 여성은 이 선언서에서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고 있었고, 인디언은 잔인무도한 야만인들이라며 적대적으로 언급되어 있었다. 자유와 정의의 깃발을 높이 올리고 이제 막 출항한 이 배는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이며, 누구를 태우고 갈 것인가?

 

◀[미국 독립선언서]

 

그 쉽지 않은 항로의 굽이굽이마다, 중요한 결정에 따른 방향 전환이 있었다. 미국의 영광은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눈물 덕분이지만, 중요한 결정의 주인공을 맡은 배의 선장들, 즉 대통령들의 고뇌에 찬 결단 덕분이기도 했다.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을 내린 미국의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초대, 재임 1789~1797), 왕위를 거절하고 대통령제의 초석을 세우다

 

자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우리 군대에 그런 되지도 않는 생각이 있다니, 정말 비통할 뿐일세! 이야말로 이 땅에서 일어난 일 중에 가장 불행한 일일세. 그런 헛된 생각은 냉큼 집어치우기 바라네.”

 

17825, 식민지 대륙군의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부하인 루이스 니콜라 대령이 보낸 편지를 읽고 이렇게 그를 꾸짖었다. 상관이 부하를 꾸짖는 일이야 흔한 일이겠지만, 이 질책은 역사적인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니콜라가 편지에서 저와 여러 동료 장교들, 그리고 군 전체의 뜻이라며 워싱턴에게 제안한 것은 다름아닌 아메리카의 왕위에 오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왕위에 오르라는 부하들의 편지에 화를 낸 조지 워싱턴.

 

독립전쟁은 178110,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군이 워싱턴에게 항복하면서 일단 끝난 셈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끝나지 않고 있었다. 평화조약이 아직 체결되지 않았고, 영국군은 철수를 미룬 채 아직도 만만찮은 전력을 가진 채로 아메리카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향에 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미국 군인들의 불만은 대륙회의가 약속한 봉급과 보급물자의 지급을 자꾸만 미룸에 따라 솟구치기만 했다. 1781년에서 이듬해까지의 겨울을 대부분의 병사는 스스로 식량과 옷가지를 해결해야 했고, 장교들도 맨땅에서 잠을 자다가 동상에 걸리거나 전염병에 걸리는 일이 속출했다. 문제의 핵심은 13개 주의 대표회의일 뿐이던 대륙회의가 각 주에 세금을 물리거나 물자를 징발할 실권이 없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대륙군에게 봉급과 물자를 지급하기로 아무리 결의를 해도, 저마다 먼 산을 보는 주들의 이기주의 때문에 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누구 때문에 우리가 목숨을 걸고 전쟁을 했는데?” 이런 불만의 목소리는 대륙회의를 쓸어버리고, 새로운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까지 이어졌다. 군사반란을 일으켜 지금처럼 각 주에 독립권을 줄 게 아니라 아메리카 전체를 지배하는 정부를 세워야 봉급도 나올 것이고, 전쟁도 제대로 치를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은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새로운 정부의 수반은? 당연히 워싱턴 총사령관이었다! 그가 왕위에 올라 새로운 제국을 수립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염원을 담아 올린 니콜라의 편지를 워싱턴은 분노와 비탄으로 물리쳐 버렸고, 병사들의 불만이 수그러들지 않자 그들을 소집하고는 직접 연설하여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호소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연설 자체에는 병사들이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 땅을 위해 싸우고 또 싸우다 보니, 어느새 머리는 하얘지고 눈은 침침해졌군요하면서 어떤 글을 읽기 위해 안경을 꺼내 쓰는 모습에 그만 눈물을 쏟으면서 반란의 뜻을 접었다고 한다. 워싱턴은 계속해서 1783124, 평화조약이 체결되고 영국군이 철수하자 대륙회의에 군사지휘관을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시민이 되었다.

 

물론 13개 주가 저마다 독립의 뜻을 굽히지 않고, 독립의 주역들이 왕정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공화주의자였다는 점을 볼 때 워싱턴이 왕위를 받아들였어도 순조롭게 새 왕조를 세웠을지는 의문이다. 여기에 미국이 내란에 빠지면 항복했던 영국이 생각을 바꿀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독립전쟁 내내 총사령관을 지낸 워싱턴이 군대에 갖고 있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으며, 대륙회의와 주들은 대륙군에게 맞설 무력이 없었다. 게다가 국가는 왕이 다스리기 마련이라는 인식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으므로, 워싱턴이 입헌군주를 표방하면서 혁명동지들을 설득하고, 반대파는 무력으로 진압하는 방법을 썼다면 적어도 한동안은 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조조나 카이사르처럼 내란을 진압한 군사지도자들은 곧 스스로 왕조를 세우는 게 보통이었고, 지난 세기 영국에서도 청교도 혁명 후 크롬웰이, 비록 공식적으로는 왕이 되지 않았으나 왕과 같은 권력을 휘두르다 자식에게 그 지위를 세습한 사례가 있었다. 그런데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최고권력을 스스로 물리치고 야인으로 돌아간 사례는 역사적으로 실로 드문 일이었다.

 

1783, 군지휘권을 반납하는 워싱턴

 

이런 워싱턴의 결정은 갓 태어난 공화국을 구했을 뿐 아니라, 그래도 중앙권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어 연방정부와 대통령제가 만들어질 수 있게 했다. 주정부의 독립권을 침해한다는 것에는 펄쩍 뛰던 사람들도 결국 워싱턴,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하며 수긍했던 것이다. 그가 국민 위에 군림하며 폭정을 자행하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1789년에 초대 대통령이 된 워싱턴은 헌법상 죽을 때까지 연임이 보장되어 있었고, 주변에서 그렇게 해달라는 목소리가 높았음에도 재선 뒤 퇴임함으로써 장기집권에 따른 독재의 출현을 막는 선례를 남겼다. 그는 천재도 아니었고, 영웅이라 부를 만큼 비범한 군사적 업적을 세우지도 못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자리에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면, 미국의 역사는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길로 들어섰을지도 모른다.

 

토머스 제퍼슨(3, 1801~1809), 루이지애나를 매입하다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제퍼슨만큼 대통령직을 꺼려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서 주정부의 자치권과 의회의 권위를 누구보다도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어떤 형태로든 최고지도자와 연방 행정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해치게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1796년과 1801년 두 차례 대통령직에 도전한 것은 그 위험한 자리에 위험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앉지 않도록하려는 뜻에서라고 풀이된다. 천성적으로 정치를 싫어하는 철학자가 정치를 하는 까닭은 자신보다 어리석은 자의 지배를 더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플라톤의 말처럼, 이 미국 최초의 정치철학자는 연방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존 애덤스나 알렉산더 해밀턴을 견제하기 위해 내키지 않던 권력을 잡았던 것이다.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매입을 결정한 제퍼슨

 

실제로 그는 부통령 재직 중에 정부 비판을 규제하는 법안에 반대해 대통령과 극렬히 대립했고, 자신의 묘비명에 ‘[독립선언서][버지니아 종교자유령]의 필자이자 버지니아 대학교의 설립자로 쓰게 할 만큼 대통령의 지위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러나 묘하게도 1803, 그는 스스로의 손으로 대통령과 연방정부의 권한을 크게 늘리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루이지애나를 프랑스에게서 매입하는 결정이었다.

 

그 일은 본래 방어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17세기에 프랑스인들이 개척하여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 루이지애나라고 부른 이 미시시피강 서부의 땅은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결과 스페인령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미시시피강의 항행권이 절실했던 미국은 스페인과 협의하여 그 요충지인 뉴올리언스의 자유통행권을 얻어놓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집권하고는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게서 다시 빼앗은 것이었다. 그리고 뉴올리언스에 대한 미국의 권리까지 무효로 하고, 미국을 카리브해와 미시시피강에서 압박해 들어가려는 태도를 보였다. 위기에 몰린 미국 정계에서는 전쟁의 목소리가 높았으나, 제퍼슨은 이를 무마하면서 뉴올리언스를 프랑스에게서 매입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천성의 정복자에게 이런 매입 제의는 본래 콧방귀를 뀔 만한 제의였다. 그러나 1802년에 반란을 일으킨 아이티를 진압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카리브해를 통해 미국을 압박하기 어려워졌으며, 영국과의 전쟁 비용 부담이 점점 늘면서 나폴레옹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뉴올리언스만이 아니라 루이지애나 전체를 팔겠다고 미국에 역제의를 했다. 미국 정부로서는 천오백만 달러에 이르는 매입 자금이 상당한 부담이었으나, 총 한 방 쏘지 않고 국토를 순식간에 두 배로 불릴 기회를 놓치기는 힘들었다. 다른 대통령이었다면 기쁨에 취해 곧바로 승낙했겠지만, 제퍼슨만은 고민을 거듭했다. 이로써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애써 줄여 놓은 연방정부의 부채가 삽시간에 늘게 생겼을 뿐 아니라, 대체 연방정부에게 이런 중대한 결정을 내릴 권한이 있는가? 기본적으로 13개주의 동의에 따라 이루어진 헌법을 준수해야 할 대통령이, 그 영토의 범위를 이렇게까지 늘리면서 헌법을 위반한다고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몇 달이나 고민한 끝에, 결국 제퍼슨은 이것은 헌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의 적용 범위를 넓히는 일이라는 친구이자 정치철학자인 토머스 페인의 말을 듣고 매입 결정을 내린다.

 

◀제퍼슨 기념관의 동상. 뒤로 보이는 것은 [독립선언서]의 발췌문이다.

 

제퍼슨 스스로는 마치 쓴 약을 먹는 기분으로 매입 협정서에 서명했으나, 역사는 이것을 그의 임기 중 내린 가장 중대하고 미국의 국익에 크게 이바지한 결정으로 여긴다. 이로써 미국은 아메리카의 한구석, 대서양 연안을 일부 차지한 나라에서 북아메리카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나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나폴레옹과 협상한 장본인인 로버트 리빙스턴이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 일류국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소리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철학자의 고뇌는 지나치면 국익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제퍼슨의 경우에는 지나침에 이르지 않았고, 그것으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 범위와 성격이 확연히 달라지게 되었다.

 

제임스 먼로(5, 1817~1825), “먼로 선언을 하다

 

건국의 아버지들 중 막내뻘인 제임스 먼로는 외교 부문에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1794년에 프랑스 대사가 되었으며 바야흐로 혁명의 소용돌이에 밀려들어가던 프랑스와 미국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워싱턴 행정부가 친영국적인 태도로 바뀌면서 대사직에서 해임되었다가, 제퍼슨 정부 때는 그의 프랑스 인사들과의 친분 덕분에 리빙스턴과 함께 파리로 가서 나폴레옹과 협상하는 역할을 맡았다. 여기서 루이지애나 매입 협정의 공을 세운 그는 뒤이은 매디슨 정부에서는 국무장관이 되었으며, 1812년의 미영 전쟁 때는 전쟁장관(육군장관)까지 겸직하며 미국 외교국방 업무를 총괄했다.

 

먼로 선언은 나폴레옹이 패망한 1815년 이후의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유럽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들이 저마다 독립과 공화국 건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들의 선배격인 미국은 이를 원칙적으로 환영했으나, 자칫하면 식민지 재점령을 노리는 유럽 열강과 적대하게 될 위험이 있었다. 한편 알렉산드르 1세의 러시아는 알래스카에서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태평양 연안 북아메리카를 러시아 영토로 선언하며 영토 확장의 야심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미국의 안보를 든든히 하고 국익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을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여기서 영국이 새로운 변수가 되었다. 당시의 영국은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러시아처럼 아메리카에서 새로 영토를 확장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 때 스페인과 협상하여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의 무역권을 확보했었는데, 정부가 바뀐 스페인과 러시아가 이끄는 신성동맹이 라틴아메리카에 개입할 경우 그 이권이 위협받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래서 영국은 미국과 동맹을 맺고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정책을 취했다.

 

◀제임스 먼로. 먼로선언은 미국이 유럽과 다른 문명이며 그 자체의 논리와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영국이 동맹 제의를 해오자 먼로 행정부는 고민에 빠졌다. 퇴임 대통령들인 제퍼슨과 매디슨은 영국과의 동맹에 찬성했다. 그러나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는 강력히 반대했다. 유럽에서 대사 생활을 오래 해본 그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고 마키아벨리즘이 횡행하는 유럽의 정치에 미국은 관여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퇴임 연설에서 워싱턴이 가능하면 유럽과는 깊은 관련을 맺지 않는 게 좋으며, 어느 한쪽을 계속해서 편드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언급한 이래 미국 외교 정책은 기본적으로 중립지향적이기도 했다.

 

먼로 대통령 스스로는 영국과의 동맹에 솔깃해 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를 미국처럼 공화국 체제로 만드는 일을 열렬히 지지해 왔으며, 매디슨 정부 말기에는 국무장관으로서 은밀히 그런 나라들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반대하는 유럽 제국들과 한꺼번에 맞설 힘은 없는 상황에서, 라틴아메리카를 직접 지배하려 하지는 않는 영국과 동맹을 맺고 함께 행동하는 일은 합리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쿠바가 걸림돌이 되었다. 먼로와 애덤스는 모두 미국의 코앞에 있는 쿠바가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거나 장기적으로 미국 영토가 되어야 안보 면에서 안심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영국은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현상유지를 선호하고 있었다.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같은 유럽 국가끼리의 전쟁에 말려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결국 1823122, 먼로는 의회에서 연례교서를 발표하며 먼로 선언, 또는 먼로 독트린이라고 알려지게 될 외교 원칙을 천명했다. 그것은 첫째, 앞으로 남북 아메리카의 어느 지역도 유럽의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비식민지화의 원칙). 둘째, 아메리카의 문제는 아메리카인끼리 해결해야 한다(불간섭의 원칙). 셋째, 미국은 유럽의 분쟁에 일체 개입하지 않는다(고립주의의 원칙), 로 요약되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러시아의 북아메리카 영토확장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남아메리카의 재식민지화도 반대하며, 그러기 위해 영국이나 다른 어떤 나라와도 손잡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한편으로 러시아령 알래스카나 프랑스령 기아나 등 현재 유럽이 보유하고 있는 아메리카 식민지를 해방하는 일에 나서지는 않을 것임을 나타냄으로써, 유럽과의 정면 충돌은 피하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선언은 이처럼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뉘앙스를 담고 나왔으며, 국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이상 공허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한동안 유럽 각국은 이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아메리카에서 영향력을 높이려 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국력을 한껏 키운 미국은 이를 공세적으로 해석하여 남북 아메리카 전체에서 제국주의를 추구하게 된다. 반대로 20세기에 들어서는 미국이 아메리카에서 벗어나 세계 경찰로서 역할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오늘날에는 아무도 먼로주의를 미국의 외교 원칙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선언은 미국이 비록 유럽에서 비롯되었을지언정 유럽과는 다른 별도의 문명이며, 그 자체의 논리와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선언으로서 항구적인 의의를 지닌다.

 

글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