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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세계사] 스파르타쿠스

풍월 사선암 2012. 7. 22. 12:12

 

가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몇 백 년 만에 한 번 온 세상을 향해 외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몇 세기가 또 지나가고, 세상이 계속 돌아가도, 이 사람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바로 얼마 전 이 사람은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 지금 그는 거의 5만 명에 이르는 군대를 지휘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그 군대는 역사상 최강의 군대다.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의미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군대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군대가 있었다. 그 군대들은 국가, 도시, , 전리품, 권력 또는 어떤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싸웠다. 그러나 여기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싸우는 군대가 있다.” 1950, 미국의 작가 하워드 패스트는 매카시즘의 광풍에 휘말려 사상범으로 갇혀 있던 감옥에서 쓰던 소설, [스파르타쿠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마, 승자의 그늘

  

기원전 3세기, 로마는 수백 년의 전란 끝에 이탈리아 반도를 하나로 통일했다. 그리고 다시 백 년이 지나는 동안, 그 영토는 무려 다섯 배 이상 늘어났다. 동방에서는 헬레니즘 국가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발칸 반도를 차지하고 중동 지역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서방에서는 포에니 전쟁의 결과 카르타고를 무너뜨리고 에스파니아와 북부 아프리카를 손에 넣었다. 지중해의 거의 대부분의 해안선이 로마에게 장악된 것이다. 바야흐로 모든 길은 로마로통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전역에서 약탈한 보물, 강제하는 세금, 그리고 막대한 숫자의 전쟁포로, 즉 노예의 공급으로 로마는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부를 누리며 번영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어두운 그림자도 가져왔다. 경제성장이 급속할수록 빈부격차도 심해지기 마련인데, 노예무역을 포함한 지중해 무역에 뛰어들어 거액을 챙긴 졸부들은 다시 부동산을 널리 사들이기 시작했다.

 

소유주가 오랜 해외원정에 가 있느라 버려져 있던 소규모 자영농의 농지들이 이들에게 헐값으로 넘어갔으며, 정복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값싼 농산물도 자영농의 자립기반을 무너뜨렸다. 이로써 라티푼디움, 대농장이 로마 곳곳에 나타났다. 이 대농장의 소유주는 넓은 토지와 많은 노예들 위에 군림하며 작은 나라의 왕처럼 살았으며, 이들에게 농지를 잃은 참전용사들은 도시로 흘러들어 빈민이 되었다. 그들이나, 외국에서 끌려온 노예들의 불만과 원한이 심각했음은 당연하다.

   

사치풍조와 배금주의가 판을 치면서 검소함과 근면함을 숭상했던 로마 고유의 미덕도 사라졌다. 옛날에 세워진 법질서는 농업 위주의 도시국가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라, 새로운 세상에는 맞지 않았다. 이를 개혁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그 대표가 기원전 134년부터 기원전 122년까지 진행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었다. 이들은 민회를 중심으로 원로원의 보수계층과 신흥 부유층의 기득권을 억제하고 서민들의 복리를 증진하려고 했으나, 둘 다 처참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사람이 마리우스였는데, 전쟁영웅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기원전 100년에 집정관이 되고는 병제개혁을 실시했다. 스스로 군비를 마련할 수 있는 중산층 이상만이 군인이 되는 도시국가의 원칙을 깨고, 도시 빈민들도 군대에 자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정복전쟁으로 얻은 토지가 분배되었다. 이로써 도시 빈민의 살 길을 마련함은 물론 로마의 장기적인 병력 수요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빈민들을 모집, 무장시키고 토지를 분배해 주는 결정권자가 국가가 아닌 개별 장군이었으므로, 이로써 로마 군대는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개별 장군들의 사병처럼 되어버렸다. 이런 체제에 따라 마리우스, 술라, 그리고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등 거대한 군벌이 나타났고, 이들은 차츰 황제의 지위를 꿈꾸게 된다.

 

이렇게 공화정이 지나친 번영의 결과 역설적인 몰락의 길을 밟아가고 있을 때, 그나마 서민으로서의 대접도 받지 못했던 자들, 노예들의 반란이 터져나왔다. 그 중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대규모였던 것은 세 차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기원전 135년에 에우누스에 의해 시칠리아에서, 두 번째는 기원전 104년에 역시 시칠리아에서 아테니온과 트리폰에 의해 일어났다. 그러나 정말로 로마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전쟁은 기원전 73, 이탈리아 본토에서 일어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었다.

 

트라키아에서 온 노예 검투사

 

문헌에 나타난 스파르타쿠스의 생애는 자세하지 않고 문헌마다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많은데, 트라키아 출신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이나 그 소설을 기본으로 해서 1960년에 만들어진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는 스파르타쿠스를 대대로 노예였으며 광산에서 일하다가 검투사로 뽑힌 것으로 그렸지만, 문헌에 따르면 그는 로마 군에 소속되었다가 탈영하고, 그 때문에 노예의 신분이 되었다. 그리고 특별히 무예가 뛰어났기에 검투사가 되어, 카푸아 근교에 바티아투스가 소유한 검투사 양성소에서 지내게 된다. 그가 본래는 트라키아의 왕족이었다는 문헌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쿠스가 여느 노예들과는 달리 유식했으며, 냉철하고 신중했다고 전한다.

 

검투사 경기 역시 로마가 포에니 전쟁 이후 급속도로 번영하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하지만(에트루리아의 장례 예식 중 하나였다는 설이 있다), ‘국민 오락이 될 정도로 널리 퍼진 것은 자극적인 오락거리를 찾는 부유층과 불만에 찬 서민층, 그리고 넘칠 만큼 많은 노예들 때문에 가능했다. 정치가나 장군들도 자신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 검투사 시합을 종종 개최했다.

 

검투사는 오늘날의 프로 격투기 선수라고도 볼 수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시합의 보수도, 가족도, 생명도 보장되지 않았다. 훈련을 마친 검투사는 나는 기꺼이 채찍으로 맞고, 불에 태워지고, 칼에 찔려 죽겠습니다.”라고 맹세해야 했다. 그리고 아무런 영광도 보답도 없는 싸움터로 나갔다. 그래도 검투사가 되면 잘 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검투사를 자원하는 노예도 없지 않았으나, 결국 동료의 손에 찔려 경기장에서 죽어갈 운명이었다. 일부 용맹한 검투사는 팬을 끌어모으기도 했지만, 죽고 나면 검투사 전용 공동묘지에 아무렇게나 매장될 뿐이었다.

 

검투사 시합의 상상도. 1875년의 그림. <출처: Wikipedia>

   

도망이 아닌 전쟁을 선택하다

 

스파르타쿠스는 약 70명의 검투사들과 함께 바티아투스의 양성소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면,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 일은 없었으리라. 스파르타쿠스는 도망이 아닌 전쟁을 선택했다. 카푸아 일대를 누비며 검투사들뿐 아니라 농장 노예, 광산 노예들에게도 합류를 권유했고, 그래서 수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이루었다.

 

당연히 로마가 그들을 내버려둘 리 없었다. 지방총독 가이우스 클라리우스가 이끄는 3천 명의 병력이 출동했으나 스파르타쿠스 군은 그들의 야영지를 야습, 진압군은 전투도 제대로 못 해보고 전멸한다. 로마는 다시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에게 12천의 병력을 맡겨 파병했으나, 이들 역시 스파르타쿠스에게 격파되고 만다. 이후 그의 군대는 세 차례의 큰 전투에서 승리하며 3년 동안 이탈리아를 휩쓸고 다녔다.

 

어떻게 인간 이하의노예들의 군대가 세계 최강의 로마군을 연거푸 쓰러뜨릴 수 있었을까? 당시 반란을 일으킨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느라, 로마군의 주력이 폼페이우스의 지휘 하에 에스파니아에 가 있었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검투사들은 일대 일의 전투라면 군인들보다도 전문가였고, 여기에 한때 로마군에 있었기에 로마군의 전법을 잘 알고 있었던 스파르타쿠스의 탁월한 전술과 지도력이 더해지면서 큰 효과를 보았을 것도 같다. 하지만 하워드 패스트의 말처럼 다른 어떤 군대보다 달랐던 이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쌓이고 쌓인 원한과 울분, 노예로 살기보다 전사로서 죽겠다는 결의, 그런 정신에 불타고 있던 이 노예군단에게, 사치에 찌든 귀족 자제들의 보병대나 돈을 바라고 군대에 들어간 군단병들은 사기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6천 개의 십자가

 

문제는 스파르타쿠스의 목표가 과연 무엇이었느냐는 점이다. 게르만족 출신이라는 동료 크릭수스는 로마로 쳐들어가자고 했으나, 스파르타쿠스는 거부했다고 한다. 결국 크릭수스는 3만의 병력과 함께 스파르타쿠스와 따로 행동하다가 로마군에게 패배한다.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는 카푸아에서 한동안 남하하다가, 방향을 돌려 이탈리아 반도를 타고 오르며 계속 북진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게르만의 땅으로 가려던 것이었을까? 그러나 알프스를 목전에 두고, 그는 다시 남하하기 시작한다. 오던 길을 되짚어 반도 서남단인 레기움까지 이르렀는데, 여기서 배를 타고 노예반란이 먼저 일어났던 시칠리아로 건너가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미리 돈을 주어 선박을 대기시키기로 했던 해적들이 더 많은 돈을 주겠다는 로마의 유혹에 넘어가 배반해 버린다. 발이 묶인 그를 향해 새로운 로마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처럼 3년이나 걸려 이탈리아를 남북으로 오르내린 까닭을 두고 역사가들의 해석은 분분하다. 단순히 지도부의 의견 통일이 되지 않았다거나,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움직인 것이라고도 한다. 한편 약 150년 전, 역시 이탈리아 반도를 오랫동안 종횡하며 로마에 반대하는 도시들의 봉기를 기다렸다는 한니발처럼 스파르타쿠스도 뭔가를 기다린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도 있다. 혹시 로마의 모든 노예들이 자신들처럼 복종을 거부하고, 무기를 들어 자신들의 주인에 맞서기를 기다린 게 아닐까? 그래서 로마라는 도시가 아니라 로마라는 거대한 세계를, 아니 노예의 희생에 기대는 체제 자체를 없애버리려 하지 않았을까?

 

스파르타쿠스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거듭된 패배에 넋이 나간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에게 로마로 돌아오라고 요청하는 한편 크라수스에게 진압을 부탁했고, 그가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크라수스는 당시 로마에서도 굴지의 부자였다. 그가 원정군 사령관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엄청난 재력으로 순식간에 대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처음에는 스파르타쿠스에게 패했다. 그러나 패주한 병사들을 일렬로 세우고는 열 번째 줄에 서 있는 병사들을 본보기로 처형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의 군대는 공포감 때문에 열심히 싸우는 군대로 거듭났다. 그리하여 결사적인 노예군단과 맞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남하를 계속하던 스파르타쿠스가 레기움에 발이 묶이자, 크라수스는 이를 놓치지 않고 압도적인 병력을 집결시켰다. 스파르타쿠스는 접전 끝에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했지만 12천의 병력을 잃었다. 북쪽에서는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로 들어오고 있었고, 동쪽 해안으로 가는 길목은 루쿨루스가 철통 같이 지키고 있었다.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동쪽으로 가던 끝에 실라루스 강가에서 크라수스군을 맞아 최후의 전투를 치렀다. 스파르타쿠스의 시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마지막 순간 그는 혼자서 황금빛 독수리의 깃발을 향해, 사령관의 표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십 명의 로마 병사가 그를 둘러쌌다. 그는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싸웠다.”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을 돈으로 사는 일을 혐오하여 일어섰던 자가, 돈으로 가장 많은 인간을 살 수 있었던 자에게 패했다.

 

◀스파르타쿠스 최후의 모습을 담은 그림.

 

로마에서 인기가 좋았던 폼페이우스는 실라루스에서 패배해 달아나던 스파르타쿠스군의 잔당을 처리했을 뿐이었는데, 승리의 주역인양 화려하게 개선식을 했다. 분통이 터진 크라수스는 나름대로 분풀이를 했다. 포로가 된 노예군 6천 명을 반란의 시작지인 카푸아에서 로마에 이르는 길목에다 줄줄이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이다. 인간이 되고자 했던 노예들은 극심한 고통 끝에 숨지고, 시체는 독수리의 밥이 되었다.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스파르타쿠스는 사상가나 웅변가가 아니었다. 진승은 왕후장상에 어찌 따로 씨가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겼고, 존 볼은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베를 짤 때, 귀족이 어디 있었겠는가.”라는 말을 남겼지만, 그에 걸맞은 스파르타쿠스의 말은 남아 있지 않다. 아니, 아마 그도 그와 비슷한 말을 했을 법하다. 그러나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노예들은 글을 몰랐고, 말을 전하기 전에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래도 스파르타쿠스의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뚜렷한 말로, 거대한 외침으로 남았고, 그들의 마비된 양심을 뒤흔들었다. 고전고대의 모든 사상은 인간은 어째서 평등하지 않은가를 설명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의 본성을 가진 사람과 귀족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했고, 공자와 맹자는 소수의 군자를 다수의 소인이 먹여살리는 일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노예로 태어난 것도 신의 뜻이므로 불평하지 말라고 했으며,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귀족이든 노예든 모두 덧없는 환상이므로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외침은 비로소 이 모든 가르침에 거대한 의문 부호를 던졌던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지 않느냐는.

 

스파르타쿠스를 죽인 크라수스는 대표적인 군벌의 하나로 성장해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삼두정치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이후 제국으로 바뀐 로마도, 검투사 시합도, 노예제도도 모두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기억은 더 오래 살아남았다. 18세기 말 아이티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노예 출신의 투생루베르튀르는 검은 스파르타쿠스라고 불렸고, 20세기 초 독일에서는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혁명가들이 스파르타쿠스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칼 마르크스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스파르타쿠스를 꼽았다. 체 게바라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도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다. 인간은 영원히 평등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스파르타쿠스의 이름도 영원할 것이다. 칼릴 지브란의 말을 비틀면, 또 다른 여인이 스파르타쿠스를 낳을 것이다.

 

글 함규진 / 역사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