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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세계사] 잔 다르크

풍월 사선암 2012. 7. 22. 18:03

 

 

1337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프랑스 왕위계승권분쟁으로 시작한 백년전쟁은 1453년까지 116년 동안 계속되었다. 주요한 전장터가 프랑스지역이었던 만큼, 100여 년간 거듭된 전쟁은 프랑스 땅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전시대 국가보다는 종교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람들도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 편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는 자연스럽게 근대적 국가의식과 애국심이 생겨났고 백년전쟁 후기에는 마침내 이러한 의식의 변화 속에서 프랑스를 구원한 소녀 잔 다르크가 탄생하였다.

   

천사의 계시를 받은 소녀

 

잔 다르크는 프랑스 동레미에서 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다. 동레미는 프랑스 북동부지역의 작은 마을로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접경지역이고 백년전쟁시기 잉글랜드 편을 들던 부르고뉴 공국과도 경계를 맞대고 있어 국가간 분쟁 시기에 환란이 심했던 지역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이 독실했던 잔 다르크는 16살 즈음 천사의 계시를 들었다.

 

그녀는 대천사 미카엘, 성 카테리나, 성 마르가리타로부터 발루아 왕가의 샤를 왕세자를 도와 프랑스에 침범한 잉글랜드군과 그들을 돕는 부르고뉴를 몰아내고 프랑스를 구하라는 음성을 들었다.

 

당시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는 백년전쟁 기간 동안 가장 불리한 입장에 처해있었다. 샤를 6세의 아들 샤를 왕세자는 프랑스 북부 지역을 잃어버리고,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동맹군에 밀려 프랑스 남부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게다가 일부 프랑스 귀족들은 샤를 왕세자의 출생이 의심스럽다며(모후인 이자보 왕비가 시동생인 오를레앙 공작과 관계를 맺고 샤를 왕세자를 낳았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프랑스 카트린 공주의 결혼으로 잉글랜드에 프랑스 왕위를 넘겨주려 하고 있었다.

 

동레미의 평범하고 작은 소녀, 잔 다르크는 자신이 받은 계시를 실천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 왕세자에게 충성하고 있는 보쿨뢰르의 사령관에게 왕세자를 알현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 사령관은 잔 다르크의 계시를 믿지 않았지만 거듭된 간청에 설득되어 6명의 기사를 내어주었다. 기사들은 잔 다르크가 왕세자가 있는 시농성으로 가는 길에 호위를 맡았다. 적진을 통과해야 하는 위험한 여정이었지만 과연 천사의 계시를 받은 소녀답게 잔 다르크는 무사히 시농성에 도착했다. 잔 다르크의 이야기를 들은 샤를 왕세자는 접견을 허락하면서 처음에는 그녀를 의심하여 낡은 옷을 입고 신하들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접견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짜로 왕세자 자리에 앉은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샤를 왕세자 앞에 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천사의 계시를 받아 잉글랜드 세력을 축출하고 샤를 왕세자가 왕으로 즉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왔다고 엄숙하게 말하였다.

 

프랑스 왕위계승권과 영토 분쟁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무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전쟁의 시발은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왕가와 프랑스의 발루아왕가 사이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다툼이었다. 프랑스 카페왕가의 11대 왕이며 아비뇽 유수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한 필리프 4세에게는 많은 아들과 딸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왕가로 시집 가 에드워드 1세의 며느리가 되었다. 그녀가 일명 프랑스의 암늑대로 불리는 이자벨 왕비이다. 이자벨 왕비는 유약한 남편 에드워드 2세를 몰아내고 일찌감치 아들 에드워드 3세를 왕위에 앉히는 등 상당히 정치적이며 행동파인 여인이었다. 그녀의 아들 에드워드 3세도 어머니를 닮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남자였다.

 

◀샤를 왕세자. 잔 다르크의 도움을 받아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샤를 7세로 즉위했다.

 

한편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아들들은 모두 후사가 없이 사망하여 샤를 4세를 끝으로 카페왕조는 직계가 끊어졌다. 프랑크왕국 시절부터 정해진 살리카 법전에 의하면 여성은 왕위계승권에서 제외된다. 필리프 4세의 남자직계가 끊어진 상황에서 프랑스 왕위는 필리프 4세의 조카 발루아의 필리프 6세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비록 여성으로 이어진 핏줄이지만 에드워드 3세로 말하자면 필리프 4세의 외손자이니만큼 카페왕조의 직계와 더 가까웠다. 프랑스 왕위를 넘보던 에드워드 3세가 발루아가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면서 분쟁이 일어났고 한차례 승복과 번복과정을 거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다. 거기에다가 필리프 4세 때부터 분쟁거리였던 프랑스 내 잉글랜드 소유의 영토문제도 다시금 수면에 떠올랐다. 이렇게 시작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과 영토 분쟁은 프랑스 왕이 인질이 되기도 하고 잉글랜드의 왕조가 헨리 4세에 이르러 랭커스터가로 바뀌고서도 휴전과 개전을 거듭하며 계속되었다.

 

거의 100년을 지속하던 이 전쟁은 잔 다르크가 나타날 즈음 새로운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프랑스 발루아왕가의 샤를 6세가 정신질환을 앓고 권력의 뒷자리로 물러나자 프랑스 내 오를레앙 공작과 부르고뉴 공작의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샤를 6세의 사망 이후 왕세자와 결탁한 오를레앙 공작과 이들에 반대하고 나선 부르고뉴 공작의 갈등은 부르고뉴 공작이 잉글랜드군과 동맹함으로써 한동안 휴전 상태였던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을 재개하게 하였다. 이번에는 샤를 왕세자의 출생을 꼬투리 삼아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공주를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결혼 시켜 왕위를 잉글랜드로 넘기려는 세력과 왕세자를 끼고도는 세력의 싸움이었다.

   

왕가와 귀족간의 싸움이었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면 피해를 입는 것은 아무 상관없는 일반 백성들이다. 프랑스 왕위 계승권 전쟁이었던 만큼 모든 전쟁은 프랑스 내에서 치러졌고 100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프랑스는 초토화되었다. 백성들은 왕가의 다툼에 병사로 동원되어 의미도 없이 죽어갔다. 누가 이기든 한편이 이겨야 끝날 전쟁이었고 프랑스 사람들은 도버해협을 건너온 잉글랜드군의 횡포에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함께 극복해야 할 적이 생기면 사람들은 똘똘 뭉치게 된다. 중세시대 국가보다는 종교적 테두리 안에서 움직였던 일반 백성들은 100년간에 걸친 전쟁을 통해 국가에 대해 어렴풋이 의식하게 되었고 뚜렷하지는 않으나 일말의 애국심마저 품게 되었다. 누군가 강한 구심점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은 큰 힘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그때 나타난 것이 바로 잔 다르크였다.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고 샤를 7세를 즉위 시키다

   

당시 프랑스를 이끌고 있던 샤를 왕세자는 출생의 문제에 충격을 받아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그는 전의를 상실한 채 시농성에 거의 도피상태로 머물고 있었다. 역대 왕들의 즉위식이 치러지던 랭스지역을 잃은 탓에 선왕 샤를 6세가 죽은 후, 왕으로 즉위하지도 못한 채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부르고뉴와 화평조약을 맺은 그의 어머니 이자보 왕비마저 그를 왕위계승권에서 제외시킨 상태였고 잉글랜드 측에 섰던 부르고뉴에 점령되어 있던 파리의 고등법원과 대학도 샤를 왕세자의 왕위계승권을 부정하였다.

 

이미 프랑스의 왕권은 잉글랜드에 넘어간 상태로 보였다. 그러나 헨리 5세의 급서로 태어난 지 수개월밖에 안된 헨리 6세가 미처 즉위식을 치르지 못한 것과 샤를 왕세자를 지지하는 아르마냐크파의 항전, 프랑스에서 잉글랜드군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염원은 그에게 왕권으로 가는 일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소녀 잔 다르크가 샤를 왕세자를 절망으로부터 끌어올렸다. 그녀는 샤를 왕세자에게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프랑스를 구원하겠노라고 맹세하였다. 샤를 왕세자의 마지막 보루가 된 잔 다르크는 오랫동안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오를레앙 지역으로 병사를 몰고 달려갔다.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던 프랑스 병사들이었지만 그들 또한 잉글랜드군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었기에 천사의 계시를 듣고 왔다는 어린 소녀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하였다. 잔 다르크는 그들 마음속에 쌓여있던 애국심에 불을 질렀고 빨리 전쟁을 끝내고 나라와 가족을 구하겠다는 사명감으로 프랑스 군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프랑스군의 맨 앞에 서서 전투를 지휘하는 잔 다르크

 

잔 다르크는 프랑스 병사들에게 승리의 여신, 행운의 여신, 전투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잔 다르크는 흰 갑옷을 입고 병사들 앞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했고 그녀가 이끄는 프랑스 병사들은 치솟은 사기로 영국군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잔 다르크의 무모한 전투를 때로 반대하는 귀족세력들도 있었지만. 진실로 천사의 계시를 받은 탓인지 어려운 상황을 기적 같은 승리로 이끌어 내어 열세에 몰려있던 프랑스군을 단숨에 우위로 끌어 올렸다. 전쟁의 승리로 랭스지역을 차지하자 잔 다르크는 샤를 왕세자의 대관식을 적극 추진하였다. 샤를 왕세자의 프랑스 왕 즉위식은 영국의 헨리 6세보다 앞섰다. 이로써 샤를 왕세자는 샤를 7세로 프랑스 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신의 계시를 받고 온 한 명의 소녀가 이루어낸 일이었다.

 

마녀로 몰려 19세 꽃다운 나이에 화형 당해

   

◀마녀로 몰려 화형 당하는 잔 다르크

 

샤를 7세는 즉위 후 안이해졌다. 파리탈환을 통해 잉글랜드군의 완전 축출을 주장하는 잔 다르크의 말을 무시한 채 1년을 보내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잉글랜드군의 재 공격을 받게 된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 덕에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지만 오히려 그녀의 치솟는 인기를 질투했다. 거기에다가 샤를 7세를 지지하던 귀족들도 갑자기 부상한 잔 다르크를 시기하였다. 그들은 잉글랜드군의 재공격에 소극적으로 나섰고 잔 다르크는 다시 한번 왕과 프랑스를 위해 갑옷을 입었다.

 

아무리 천사의 계시를 받은 소녀라 한들, 주변의 도움 없이 혼자 치르는 전투는 무리를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잔 다르크는 결국 콩피에뉴 전투에서 패하고 잉글랜드와 동맹한 부르고뉴 군대에 사로잡혔다. 부르고뉴는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 군대에 몸값을 받고 팔아 넘겼고 잉글랜드는 다시 샤를 7세에게 잔 다르크의 몸값으로 엄청난 금액을 불렀다. 그러나 샤를 7세는 몸값을 받고 잔 다르크를 풀어주겠다는 잉글랜드의 제안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잔 다르크가 적진에서 죽어가도록 내버려둔 것이다. 이미 왕위에 오른 샤를 7세에게 잔 다르크는 신의 계시만을 부르짖는 성가신 존재였던 것이다.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일곱 번의 재판 끝에 마녀, 이교도, 우상숭배의 죄를 뒤집어썼다. 중세 기독교는 신성한 신의 중계자인 사제를 거치지 않고는 신의 계시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이단으로 몰았다. 잔 다르크는 끝내 자신에게 내린 신의 계시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루앙의 광장에서 화형으로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인생을 마쳤다.

 

백년전쟁이 끝나고 3년 뒤에야 마녀 혐의를 벗고 명예회복

 

백년전쟁은 1453년에야 프랑스 왕가와 부르고뉴가의 극적인 화해로 프랑스에서 잉글랜드군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끝났다. 백년전쟁의 종결로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의 영토 대부분을 잃었고 이 전쟁을 계기로 다시는 유럽 대륙의 영토를 넘보지 않게 되었다. 이후 잉글랜드는 대륙과는 다른 독자적인 역사를 만들어갔다. 프랑스 또한 잉글랜드 세력을 몰아낸 뒤 통일된 영토 내에서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인 국가체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샤를 7세는 백년전쟁이 끝난 후 1456년에 가서야 잔 다르크의 마녀 혐의를 풀어주고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살아 있을 때 그녀를 버리고 죽어서야 복권시킨 것이다. 또한 잔 다르크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교회는 1920년에 가서야 그녀를 성녀로 시성 했다. 귀족도 아니었고, 남자도 아니었던 핍박 받는 민중의 딸, 잔 다르크는 오늘날까지 그 죽음의 비장미와 함께 열세한 입장에서도 일어나 세상을 바꾼 강인한 여성의 대명사로 자리잡고 있다.

   

글 김정미 / 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