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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세계사] 명태조 주원장

풍월 사선암 2012. 7. 22. 10:29

 

워싱턴 대학교의 저명한 중국사학자인 패트리셔 에브리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 역사상 한 개인이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예로, 명태조 주원장보다 더 두드러진 예는 거의 없다.” 또한 그보다 2백 년 전쯤, 청나라의 학자 조익은 이렇게도 말했다. “명태조는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 도적의 성품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

   

난세의 거렁뱅이, 난세의 호걸

   

참으로 주원장은 도적과 같이 먹고 살아야 할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호걸처럼 살 기회를 잡음으로써 출세할 수 있었고, 마침내는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가 태어난 1328년은 칭기즈칸과 쿠빌라이를 이은 원나라 황실이 제위 계승을 놓고 혼란에 빠졌던 때였다. 이 해에 태정제(泰定帝) 예순 티무르가 병사하자 아들 아리바가가 상도에서 천순제(天順帝)로 즉위했으나, 대도에서 따로 즉위식을 가진 토그 티무르가 그를 폐위시키고 황제 자리를 차지하는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토그 티무르 역시 다음 해에 형인 쿠실라에게 제위를 빼앗기는데, 얼마 후에는 쿠실라를 없애고 다시 황제가 되는 등 황족끼리의 골육상잔으로 옥좌의 향방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원제국의 두 수도인 대도와 상도, 그리고 본래의 수도 카라코룸 사이에 흙바람과 피바람이 그칠 날이 없게 된다. 이렇게 제국의 중심이 불안정해지자 지방에서는 억눌려 있던 한족들의 반발이 점점 뚜렷해졌다.

 

특히 원나라 재정의 80퍼센트를 충당하면서도 남인이라 하여 정치적으로 가장 낮은 대우를 받고 있던 강남 지역의 한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마침내 지역민과 손잡은 양자강의 해적들이 강남에서 강북으로 가던 세금 운반선들을 차단해 버리자, 이로써 왕조의 재정은 급속도로 악화된다. 원왕조는 이를 진압하려고 토벌대를 계속 보냈으나, 문란해진 군 기강과 물싸움에는 약한 몽골군의 특성 때문에 성과가 신통치 않았다. 이렇게 정치와 경제가 모두 혼란에 빠진 원나라가 맥을 추지 못하게 되자, 각 지방은 무법천지가 되어갔다. 난세에는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힘든 법인데, 떠돌이 소작농의 막내아들이었던 주원장은 그야말로 참담한 유년 시대를 보내야 했다. 17세가 되던 1344년에는 기근까지 휩쓸었다. 이 바람에 주원장의 부모와 큰형이 영양실조 상태에서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형제는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마황후(효자고황후)의 초상

 

소년 주원장은 하루 한 끼도 먹기 어려운 생활을 견디다 못해 승려가 되기로 하고 황각사라는 절에 들어갔지만, 절이라고 끼니가 충분할 리 없었다. 두 달 만에 그는 탁발승이 되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데, 그런 사실상의 비렁뱅이 생활을 4년 더 하게 된다. 하지만 난세란 특별한 절망과 함께 특별한 희망도 주는 법. 1351년에 백련교도를 주축으로 한 홍건적이 봉기하고, 양자강 일대가 이들의 세력권이 되면서 망할 놈의 세상을 한 번 뒤집어 보자는 민중의 목소리가 결실을 보는 듯싶었다.

 

주원장도 이 시류에 동참하여 안휘성에서 봉기한 홍건적 곽자흥의 수하로 들어간다. 이후 별볼일 없는 탁발승인 줄만 알았던 주원장의 숨은 재능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서, 몇 년 안 되어 곽자흥 군의 2인자 위치까지 올라간다. 곽자흥의 양녀인 마()씨 처녀와 혼인도 치렀는데, 그녀는 후일 지혜롭기로 유명한 마황후로서 주원장의 정치에 많은 도움을 준다.

 

주원장은 곽자흥이 죽은 후 그 아들을 명목상 받들며 실질적인 대장 노릇을 했고, 송나라 황실의 후예를 자처하며 제일 먼저 봉기했던 홍건적 두목 한산동의 아들인 한림아가 소명왕(小明王)이라는 이름으로 송()을 세우자 이를 인정하여 부원수의 직함을 받았다. 어차피 정통성도 실권도 불분명한 나라였을지언정, 일정한 권위와 대의명분은 확보한 셈이다. 더욱 세력을 키운 주원장은 1356년에 집경(후의 남경)을 점령하고는 그곳을 응천부로 개명하고 본거지로 삼는다. 이로써 주원장은 당시 홍건적 군벌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3대 세력(장사성, 진우량, 주원장)의 하나로 발돋움한다.

 

중화의 회복을 위해 싸운다

 

하지만 나중에 주원장 스스로가 말했듯 장사성은 재정이 풍부하고 진우량은 병력이 강했다. 내게는 특별히 내세울 장점이 없었다.” 그래서 누구나 이미 원나라의 지배에서 사실상 벗어난 강남을 제패할 세력은 장사성 아니면 진우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주원장에게도 그만의 장점이 있었다. 원나라에서 천대받으며 묵묵히 학문에만 정진해온 강남의 선비들. 그들이 주원장의 응천부로 찾아와 힘을 보탰던 것이다. 장사성이나 진우량 등은 눈에 보이는 힘만 중시하며 선비들의 말과 글이 갖는 힘을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그 잠재력을 제대로 읽었으며, 결국 그 덕분에 천하쟁패의 싸움에서 최종적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송렴, 유기, 장일, 섭침 등 ‘4대 선생을 비롯한 선비들은 주원장에게 명분을 뚜렷이 내세우고 민심을 잡으라는 조언을 했다. 주원장은 이를 받아들여 명목상 송나라의 후예라는 소명왕 한림아를 떠받드는 한편, “절대로 백성들을 괴롭히지 마라. 백성을 괴롭히는 자는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처단하겠다는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북방 오랑캐의 압제를 물리치고 중화를 회복한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런데 선비들의 조언 중에는 당장 원나라 조정과 맞싸울 것이 아니라, 우선 강남을 평정해야 한다는 것도 있었다. 주원장은 이 조언을 받아들여 이후 10년이 넘도록 다른 홍건적들의 북벌에는 동참하지 않고 오직 강남에서 세력을 늘리는 데만 힘썼다. 그 사이에 홍건적 북벌군은 원나라에게 격파되고, 그러느라 원나라도 지칠 대로 지쳐서 주원장이 본격적으로 북벌에 나서자 막을 힘이 없었다. 그러므로 주원장이 말로만 중화 회복을 내세우면서 철저히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했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천하통일은커녕 목숨 보전도 힘들었을지 모른다. 다른 강남 군벌들도 먼저 강남부터 손에 넣는다는 전략을 썼기 때문이다. 당시 강남은 가장 동쪽(황해 연안)에 장사성, 가장 서쪽에 무창 지역의 서수휘, 그리고 북으로 한림아, 남으로 진우량의 세력권이 있고 그 가운데 주원장의 영역이 자리잡은 형태였다.

 

그런데 진우량이 서쪽의 서수휘를 무찌르고 그 땅을 차지하고는 장사성에게 힘을 합쳐서 주원장을 해치우자고 제의했다. 주원장과 친했던 북쪽의 한림아는 원나라의 공격으로 눈코 뜰 새 없는 상황. 잘못하면 사면초가가 되게 생긴 주원장은 서둘러 남쪽으로 전력을 집중시켜 진우량에게 선제공격을 했다. 허를 찔린 진우량은 패배했으나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역습, 두 군벌의 대함대가 파양호에서 세기의 결전을 벌인다. 적벽대전을 능가하는 규모의 이 전투에서 주원장은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었고, 다시 장사성에게로 창 끝을 돌려 1년 동안의 공방전을 거듭한 끝에 결국 승리했다. 1367년이었다. 이로써 강남을 평정하는 데 성공한 주원장은 얼마 후 소명왕 한림아가 죽자(주원장이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는 대명(大明), 연호는 홍무(洪武)라고 했다.

 

다음 순서는 북벌이었다. 서달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20만 대군이 북상하자, 원순제(元順帝) 토곤 티무르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대도, 즉 지금의 북경을 버리고 몽고 본토로 달아났다(1368). 칭기즈칸이 금나라를 격파하고 북경을 점령한 지(1215) 150여 년 만이었고, 일찍이 후당에게서 거란이 이 땅을 빼앗은 지(937)부터는 430여 년 만에 북경이 다시 한족의 땅이 된 것이다. 

 

◀주원장의 라이벌이었던 오왕 장사성(왼쪽), 최후의 원나라 황제, 토곤 티무르

  

북방민족의 잔재를 말끔히 털어버리자!

 

중화의 회복은 단지 군사적, 정치적인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게 명태조가 된 주원장의 신념이었다. 그는 수백 년 동안 북방민족의 지배가 남긴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말끔히 청소하려 했으며, 그래서 먼저 북방민족 특유의 호복변발을 일체 금지하고 한족 고유의 옷차림과 머리모양을 하도록 했다. 또한 유교의 가르침을 장려하고, 과거제를 실시해 사대부들이 다시 관료로서 국가를 경영하도록 했다. 다만 시문을 짓는 것을 위주로 했던 송나라 때의 과거 방식은 팔고문(八股文)이라고 하는 특별한 형식에 따라 답안을 작성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국가 관료에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인재보다 기본적 교양과 일정한 재치를 갖춘 사람이 적합하며, 글자 하나 구절 하나를 놓고 고민하기 마련인 시문 짓기로 과거를 보다 보니 엘리트 계급이 지나치게 소심, 유약해졌고, 결과적으로 북방민족의 도전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는 반성에 따른 선택이었다.

 

또한 정부의 권위와 기본적 국민윤리에 대한 인식이 사대부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에까지 퍼져 있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에서 [육유(六諭)]라는 것을 반포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 웃어른을 공경하라, 자식들을 바로 가르쳐라, 이웃끼리 화목하라, 각자의 직무에 충실하라, 옳지 않은 일을 옳다고 하지 마라는 이 교훈은 훗날 일제의 [교육칙어],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 등이 본받은 것이기도 했는데, 이를 각 동네()마다 매월 여섯 번씩 전체 동민들이 모여 낭독하도록 했다. 한편으론 상인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원나라의 시대상을 뒤집고자 농본억상(農本抑商)’이라는 유교적인 산업정책을 도입, 이를 위해 먼저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작성된 토지대장은 물고기 비늘(魚鱗)이 촘촘히 늘어선 것처럼 보인다 하여 어린도책(魚鱗圖冊)’이라 불렸는데, 송나라 때에도 있었지만 어린도책을 명태조처럼 꼼꼼하고 철저하게 작성한 일은 없었다. 동시에 인구조사 또한 행해졌고, 이 자료를 기초로 세금을 거두었다.

 

그리고 국가가 나서서 개간과 둔전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이고, 치수와 관개 사업 역시 힘썼다. 이렇게 농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농업을 기반으로 국가를 운영하도록 했으며, 상업은 최소한으로만 허용한다는 뜻에서 화폐 유통을 대부분 금지시키고 대외무역 역시 금지해 한 조각의 널빤지조차 바다에 띄우지 마라는 엄명을 내렸다. 몽골제국 시절 유럽에서 극동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바닷길과 초원길을 각국의 상인들이 바쁘게 오가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내실을 기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도래했다.

 

공포와 불신만이 가득한 군신관계

 

명태조는 정부조직과 법령 역시 새롭게 바꾸었다. 승상 제도를 폐지하고 육부를 황제에게 직속시켰으며, 군사행정의 핵심인 대도독부를 다섯으로 나눈 다음 육부와 마찬가지로 황제에게 직속되도록 해서 문, 무의 최고통치권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지방에는 아들들을 포함한 황족들을 왕으로 봉하여 두루 파견했는데(그 중 연왕은 나중에 쿠데타를 거쳐 성조 영락제가 된다), 겉으로는 황족들을 각 행성에 파견했던 원나라와 비슷해 보였지만 명나라의 분봉왕들은 원나라 때와는 달리 독자적인 행정권, 조세 징수권을 일체 갖지 못했고, 단지 그 지역의 군사지휘권만을 가졌다. 말하자면 아직 국가적 통합이 덜 된 변방을 잠시 군사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의미일 뿐, 사실상 모든 권력은 황제에게, 명태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명대조가 수도로 삼았던 남경에 남아있는 명대의 성벽

   

명태조가 많은 업적을 이룩하고서도 후대의 평판이 별로 좋지 않은 까닭은 이처럼 독재체제를 구축하고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훼손될까 두려워 끊임없이 피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1380, 개국공신이던 승상 호유용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처형되었다. 명태조는 이를 승상제도 폐지의 빌미로 삼았는데, 문제는 호유용의 역모라는 것이 이렇다 할 증거가 전혀 없이 고문에 의한 자백만으로 확정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연루되어 함께 처형된 사람이 무려 15천에 달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1384년에는 역시 개국공신인 이문충이 독살당했고, 그 다음 해에는 강남 평정과 북벌 통일의 전쟁에서 둘도 없는 공헌을 했던 노장 서달이 독살되었다. 그리고 1390년에는 이선장 등 15천명이 호유용 역모에 연루된 혐의를 다시 받아 처형되고, 1393년에는 남옥이 호유용처럼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운 역모 혐의를 받고 2만 여명의 연루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강남 군벌 시절일 때 천하제패의 계책을 들려주었던 ‘4대 선생역시 뒤끝이 좋지 못했다. 유기는 낙향해 있다가 독살되고, 송렴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한 마디로 명태조는 개국공신을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을 생각이었고, 그 생각대로 되었다. 공신만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권세를 가진 신하는 항상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명태조는 검교라고 하는 첩보조직을 키워 그런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살펴보게 했다. 송렴이 어느 날 손님을 초대해 식사를 하자, 다음 날 명태조가 그를 불러 그 일을 물었는데 송렴이 보니 누구를 불러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슨 음식을 어떻게 먹었는지, 명태조가 직접 옆에서 본 듯 훤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공포와 불신만이 가득한 군신관계는 문제가 있다고 여긴 사람 중에는 황태자인 주표(朱標)도 있었다. 그가 신하들을 의심하고 죽이는 일을 그만두라고 청하자, 명태조는 가시가 잔뜩 박힌 막대기를 가져오게 해서 주표에게 집어보라고 했다고 한다. 주표가 가시 때문에 잡을 수 없습니다고 하자, 명태조는 그러면 내가 너를 위해 가시를 말끔히 잘라내 주겠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이니라. 어째서 그 뜻을 몰라주느냐?”라고 말했다. 사실 애써 세운 왕조가 강력한 공신들 때문에 힘을 잃고 결국 멸망하는 예는 중국사에 흔하다. 명태조는 자신의 숙청에 왕조의 기반을 다진다는 정치적 의의를 찾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신뿐 아니라 그 관계자들까지 수만 명씩 살해하는 일은 아무래도 정당화될 수 없으리라. 아울러 명태조는 문자의 옥이라는 것까지 일으켰다. 누가 자신을 비웃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고, 불우했던 옛 시절을 부끄러워했던 그는 상소문이나 공문서 등에 ()’ ‘()’, ‘()’ 자가 들어가 있으면 그것을 쓴 사람을 가차없이 처형했다. 광은 승려였던 자신의 깎은 머리를 연상시키며, 승은 승려를, 적은 도적을 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검열은 갈수록 심해져서 (, 과 발음이 비슷하므로)’, ‘(, 와 발음이 같으므로)’, ‘(, 과 발음이 같으므로)’ 자 등이 계속 금기어가 되었을 뿐 아니라 조금만 삐딱하게 읽으면 황제를 거스르는 듯한 글을 쓰면 모두 처형장으로 보냈다. 법률 자체도 엄해져서, 그가 집대성해 반포한 대명률(大明律)은 과거의 법률에 비해 한층 엄격했으며 잔인한 처형 방식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명태조는 30년 동안의 치세를 끝내고 1398, 70세로 숨을 거두었다. 죽기 직전 그는 짐은 그 동안 모든 것을 오직 혼자서 담당해 왔다. 돌이켜 보면 이는 너무 괴로운 일이니, 다음 대를 이을 사람은 좀 더 신하를 믿고 일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는 분명 북방민족의 천하를 중화의 천하로 바꿔놓았다. 그러나 애써 과거제를 부활시켜 지식인을 우대하는 세상을 만들었지만, 그 지식인들은 형식화된 시험제도와 글자 한 자 잘못쓰면 목숨을 잃는 정치 때문에 마음껏 기를 펴지 못하고 기회주의적인 소인배가 되어갔다. 그가 만든 세상에서 중국인들은 몽골인이나 색목인들에게 날 때부터 차별 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동시에 도처에서 사슬에 묶여 있어야 했다.

 

함규진 / 역사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