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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세계사] 다리우스 3세

풍월 사선암 2012. 7. 22. 11:00

BC 330년 이란 북부의 황량한 고원에서 벌어진 한 전투로 세계제국의 운명이 갈렸다.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제 다리우스 3세는 적에게 쫓기다 숨을 거두었고, 그로써 세계를 호령하던 대제국도 폐허 속으로 사라졌다. 페르시아는 정신사적으로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통합하고, 지리적으로는 동쪽으로 인더스 강과 서쪽으로 사하라 사막을 잇는 광대한 나라였다. 그들의 권력 중심지였던 페르세폴리스의 거대 건축물에는 주변의 신하국들이 페르시아의 왕좌를 향해 끝없이 조공을 드리러 가는 행렬이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영광과 부의 토대는 막강한 군대와 진보적인 행정 제도, 탁월한 사회기반 기설, 그리고 풍부한 수자원이었다. 다리우스 3세가 사신들을 맞았던 으리으리한 알현실의 규모만 보더라도 당시 이 제국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길이가 무려 100미터에 이르고, 20미터 높이의 기둥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이 전각은 한마디로 세계 건축사의 불가사의였다. 그런 제국이 200년의 존속 끝에 단 두 차례의 전투로 거짓말같이 사라져버렸고, 그 수수께끼의 중심에 다리우스 3세가 있다.

 

페르시아 제국, 사막 속의 파라다이스

 

페르시아의 기원은 이란 남서부 지역의 한 고원이었다. 그곳 주민들은 자기 지역을 파르스’(혹은 파르사’)라고 불렀는데, 그리스 역사가들은 자기들 말로 바꾸어 페르시아라 불렀다. 1934년 이란 팔레비 왕조의 레자 샤 왕은 전 세계를 향해 자신들의 나라를 더 이상 페르시아라 칭하지 말고 이란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서양식 이름을 버리고 원래의 자기 이름을 찾겠다는 것이다. ‘이란이라는 호칭에는 그 나라 사람들의 주체적 민족적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란아리아인의 나라라는 뜻으로, ‘아리아고귀하다는 의미이다. 아리아인은 BC 2천 년경부터 유라시아 대륙에서 남하하기 시작한 유목민 가운데 이란과 인도로 진출한 사람들이다. 때로는 이집트와 로마, 그리스, 서아시아로 진출한 백인 유목민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들은 각지에서 꽃피던 고대 문명을 정복하거나 흡수하면서 새로운 문명을 일으켰다. 이들 가운데 이란 민족은 그 이름처럼 아리아인의 원조를 자처하며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명을 일구어냈다.

 

사막과 황야가 주를 이루는 메마른 지대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푸른 숲과 비옥한 땅을 가꾸며 살았는지는 여전히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과 소금사막 속에 눈부신 건축물들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보면 찬란한 문화가 존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토대는 당연히 모든 문명의 발상지가 그러하듯 물의 관리였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은 페르시아 제국의 시조 키루스 1세가 스텝 지대 한가운데에 건설한 오아시스 도시를 가리켜 파라다이소스라 불렀다. 고대 페르시아어로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이라는 뜻인데, 이 말이 성서 번역 과정을 거쳐 파라다이스’, 낙원이라는 말로 유럽에 정착되었다. 이처럼 메마른 땅을 오아시스로 개발하려면 관개시설을 갖추고, 운하를 관리할 수준 높은 기술과 고도의 행정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탁월한 국가 체제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 궁전 벽에 조각된 부조. 주변 국가들이 페르시아 황제를 향해 조공을 드리러 가는 행렬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페르시아 제국은 막강한 군대와 진보적인 행정 제도, 탁월한 사회기반 시설, 풍부한 수자원을 기반으로 강력한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키루스 대왕 이후 캄비세스 2세의 등장과 함께 제국의 영토는 이집트로 확장되었고, 다리우스 1세에 이르러서는 그리스와 인더스 강 유역까지 확대되었다. 그런데 페르시아의 통치 원칙은 탄압과 배타가 아니라 포용과 통합이었다. 거기에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유목민적 문화와 다문화국가를 유지하려는 실용적 관점, 그리고 페르시아의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세상을 선과 악의 영원한 투쟁 공간으로 보는 조로아스터교의 입장에서는 을 배척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함께해야 할 세계의 두 기둥 중 하나로 본다. 그렇기에 그 세계관 안에서는 박해나 탄압, 폭력, 배타성은 낯선 언어다. 이런 측면에서 페르시아는 종교적 관용 국가였다. 페르세폴리스의 점토판에도 여러 민족의 많은 신들에게 봉헌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다리우스 1세는 처음부터 자신이 다문화국가의 통치자라는 것을 자각하고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다. 일례로 이오니아 지방을 정복한 뒤 그리스인들이 믿던 아폴론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예의를 다했다. 그 이전에 키루스 대왕도 바빌론을 정복한 뒤 현지의 마르두크 신에게 무릎을 꿇었고, 그곳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민족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처럼 페르시아 제국은 속주의 종교와 관습을 최대한 인정하면서 주변 문명을 하나의 용광로로 녹여낸 세계제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꼭두각시 왕으로 권좌에 오르다

 

◀BC 500년경의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페르시아는 종교적 관용을 바탕으로 주변 문명을 흡수하여 거대 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갖은 도전과 시련을 극복하며 200년 이상 굳건히 버텨온 페르시아 제국도 BC 4세기 중반에 이르러 위기에 처한다. 당시 왕좌에 앉아 있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와 그의 아들 아르세스는 속주의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사소한 저항도 잔학하게 탄압함으로써 곳곳에서 원성이 자자했다. 백성의 신망을 잃은 군왕은 늘 안위가 위태로운 법, 궁궐 안에서는 권력을 둘러싸고 음모와 암투가 난무한다. 그런 가운데 간교한 환관 바고아스가 왕과 아들을 암살하고, 그 자리에 왕가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배경과 권세가 없는 인물을 앉히려고 했다. 그래야 배후에서 쉽게 조종할 수 있을 터였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인물이 나중에 다리우스 3세가 되는 코도마노스였다.

 

BC 380년경에 태어난 코도마노스는 왕위 계승권을 가진 적자가 아니었다. 다리우스 2세의 증손자이기는 했지만 혈통으로 따지면 권력 승계 서열에서는 한참 뒤처졌다. 바빌론의 궁전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진 다리우스 3세는 젊은 시절, 장수의 신분임에도 전투에 불같이 뛰어들어 직접 창칼을 휘두른 용맹스런 전사였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는 두 군대가 격돌하면 우선 양 진영에서 각각 장수가 한 명씩 나와 검술을 겨루었는데, BC 360년 무렵 다리우스는 반역을 꾀한 페르시아의 부족장과 결투를 벌여 몇 시각 만에 적장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런 용맹스런 인물이라면 아무리 남에 의해 왕좌에 앉았다고 하더라도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리우스는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환관 바고아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했다. 그래서 선왕들의 실정을 바로잡아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민심을 다독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당연히 환관 바고아스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바고아스는 또다시 독살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상대가 적의 간계를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여름날, 페르시아 궁전의 수풀 우거진 정원에서 향연이 열렸는데, 바고아스는 보석으로 장식된 잔을 다리우스에게 건넸다. 다리우스는 미소를 지으며 건배를 할 것처럼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속임수였다. 다리우스는 번개같이 바고아스의 머리채를 틀어쥐고는 그의 입에다 잔을 털어 넣었다. 바고아스는 피를 흘리며 다리우스의 발아래에 쓰러졌다. 막후에서 국정을 농단하던 세력이 제거되자 다리우스는 그제야 세계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우뚝 섰다. 왕좌의 불안을 틈타 분열을 노리는 총독들을 제압함으로써 중앙 권력의 힘을 과시했고,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제국의 토대를 굳건히 다졌다. 그러나 이렇게 제국이 안정을 되찾아갈 무렵, 서쪽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엄청난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등장

   

먹구름의 진원지는 마케도니아였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내에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처럼 선진적인 폴리스 체제로 발전하지 못한 변방의 작은 왕국이었는데,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4년마다 개최하는 올림픽에도 자격 미달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참가 신청이 거부될 정도로 낙후한 나라 취급을 받았다. 이런 도시가 찬란한 문명국들의 모임인 그리스 동맹에 들어가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군사력을 키워 그리스 전체를 수중에 넣는 것이다. 이런 꿈을 가진 사람이 필리포스 2(Philippos , BC 382~BC 336)였다. 그는 국가를 병영 체제로 바꾸고, 모든 시민을 군인으로 만들었다. 특히 창과 방패로 중무장한 보병들이 어깨를 맞대고 8열 종대로 늘어선 방진(팔랑크스)의 위력은 천하무적이었다. 필리포스 2세의 계획에 가장 큰 장애는 아테네였다. 결국 BC 338년 필리포스와 반대 세력 간에 결전이 벌어졌고, 마케도니아군은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BC 356~BC 323)의 눈부신 활약으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필리포스는 마침내 숙원을 풀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공수 동맹인 코린트 동맹의 맹주 자리에 오른 것이다.

 

같은 해에 코린트 동맹은 페르시아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페르시아군이 최근에 두 번이나 그리스 땅으로 쳐들어와 막대한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아크로폴리스까지 활활 불타올랐다.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치욕적인 패배였다. 이렇게 해서 코린트 동맹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설욕의 기회를 노렸다. 그런데 목표를 두고 동맹국들 간에 의견이 엇갈렸다. 마케도니아를 뺀 나머지 동맹국은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고 페르시아가 앞으로 이 지역에 발을 못 붙이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반면에 필리포스는 페르시아 제국 자체를 절멸시킬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전쟁은 시작되었고, 그리스 동맹군은 소아시아 해안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승리를 기념하는 향연에서 필리포스는 자신의 경호원 중 한 명에게 불의의 기습을 받고 허무하게 삶을 마감했다. 누가 사주한 것일까? 페르시아의 소행이라는 소문도 있고, 아버지의 반복되는 결혼으로 왕위 계승에 불안을 느낀 아들의 짓이라는 소문도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동시대인들이 아들을 아버지 살해범으로 지목한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수스 전투에서 적을 몰아치는 알렉산드로스. 그는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물게 정복욕에 사로잡힌 군주였다.

 

필리포스가 갑작스레 죽고 난 후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뿐 아니라 다른 그리스 동맹국들이 지도자 없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단호히 권력을 접수했다. 그는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고, 필리포스의 상속인으로서 마케도니아의 왕위와 코린트 동맹 맹주직을 순식간에 차지했다. 그런 다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원대한 꿈을 실행에 옮길 채비를 갖추었다. 바로 페르시아 원정이었다. BC 334년 코린트 동맹의 총사령관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그리스 동맹군을 소집했다. 기병 5천에 보병 32, 거기다 상당 규모의 함대까지 합치면 4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이 대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에 당한 수모를 갚고 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페르시아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라는 것이 코린트 동맹의 지도부가 내린 지상과업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생각은 달랐다. 이번 기회에 아예 아시아 전역을 정복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완전히 분쇄해버릴 계획이었다. 그는 이때 벌써 자신이 찬란한 빛을 받으며 올림포스 산으로 올라가 인간 신의 모습으로 영원히 우뚝 서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대결전

 

알렉산드로스의 침략을 보고받은 다리우스 3세는 즉시 그리스 로도스 섬 출신의 멤논 장군을 불러들여 대책을 물었다. 멤논이 내놓은 것은 적의 진격 루트에 보급 자원이 될 만한 것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퇴각해서 적이 제풀에 지쳐 쓰러지도록 하자는 초토화 전략이었다. 그러나 다리우스와 귀족들은 소아시아의 막대한 영토가 그런 식으로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세계제국 지존으로서의 자존심도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두 지배자가 이수스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맞붙었다. 그리스군 4만에 페르시아군 75천이었다. 그리스군이 빗발같이 쏟아질 적의 창과 화살을 맞으면서까지 강을 건너는 것은 무리로 보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모두가 불가능이라 여기는 것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그리스군은 비 오듯 쏟아지는 적의 화살과 창을 뚫고 반대편 강둑을 넘었고, 아울러 중무장한 팔랑크스 부대가 종횡무진 적진을 무너뜨리는 사이 그리스 정예군은 흐트러진 적진을 가로질러 곧장 다리우스의 본진으로 치고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다리우스는 갑자기 도주를 결정한다. 왕의 안위를 염려한 참모진의 간언에 따른 것일 수도 있고, 마음의 평정을 잃은 상태에서 내린 충동적인 결정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으로 승패는 결정되었다. 총사령관이 도주한 페르시아군은 지리멸렬했고, 제대로 반격 한 번 못해보고 궤멸되었다.

 

이수스 전투의 패배로 다리우스는 소아시아의 영토를 빼앗겼지만, 여전히 제국의 반 이상을 통치하는 황제였다. 알렉산드로스의 힘을 깨달은 그가 선택한 것은 협상이었다. 그는 적장에게 편지를 보내, 동맹을 맺어준다면 포로로 붙잡혀 있는 가족의 몸값으로 막대한 재물을 지불하고,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페르시아 영토를 마케도니아에 넘겨주겠으며, 자기 딸까지 줄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이 제의를 거절하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했다. 이제 남은 것은 운명을 건 단판의 승부뿐이었다.

 

◀순간에 전차를 톨려 퇴각을 결정한 다리우스 3. 그의 눈이 경악에 차있는 듯하다.

 

다리우스는 마지막 결전지를 두고 심사숙고했다. 바퀴에 날을 단 페르시아 전차가 종횡무진 활약할 수 있고, 수적 우세가 전략적 우위로 발현되려면 어떤 장애물도 없는 평원이 최상이었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곳이 이라크 북부의 가우가멜라 평원이었다. BC 331929, 결전의 날이 밝았다. 그리스 동맹군은 4, 페르시아군은 25만이었다. 그런데 다리우스는 전차에서 적의 전열을 내려다보면서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적이 페르시아군을 정면으로 보고 진을 친 것이 아니라 좌측면을 향해 정렬해 있었기 때문이다. 더 기이한 것은 그리스군의 접근 방식이었다. 팔랑크스 부대는 장창의 끝을 바깥으로 내민 채 다이아몬드 대형을 유지했고, 전체 그리스군은 페르시아의 좌측을 향해 사선으로 접근했다. 알렉산드로스가 간밤에 만들어낸 새로운 대형이었다. 다리우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우측 기병대로 그리스의 좌측 진영을 치도록 했다. 그러자 전선 중앙의 팔랑크스 부대가 페르시아 진영으로 출격했고, 다리우스는 제국의 자랑인 전차 부대로 맞서게 했다. 그러나 그런 전차 부대도 막강한 전술과 전투력을 갖춘 최강의 팔랑크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팔랑크스의 진격으로 상대 중앙 진영에 구멍이 뚫리자 알렉산드로스는 즉각 기병대를 쐐기 대형으로 적의 심장부를 향해 돌진시켰다. 그리스의 최정예 부대가 다리우스의 호위대까지 접근하고, 황제의 전차를 몰던 병사까지 창에 찔려 전사하자 다리우스는 이수스 전투 때처럼 다시 전차를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아직 전투는 초기 단계라 수적으로 월등한 페르시아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불굴의 투지로 밀어붙였다면 전세를 뒤집을 가능성은 충분했는데도 말이다. 결국 장수를 잃은 페르시아군은 금세 사기가 꺾여 도망치기에 바빴고, 이어진 퇴각전에서도 그리스군에 무참히 도륙 당했다.

 

전투 중 지휘관의 도주라는 판단 착오가 개인의 성격적 결함 때문인지, 아니면 제국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 황제의 안위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다리우스는 전술 전략 면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단 두 번의 전투로 세계제국을 잃고 말았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추격을 피해 엑바타나를 거쳐 박트리아로 도주했지만, 그곳의 총독 베수스에 의해 폐위당한 뒤 살해되었다. 물론 베수스 역시 알렉산드로스에게 사로잡혀 왕을 시해한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비록 적장이지만, 왕을 죽일 권리는 오직 왕에게만 있다는 이유였다.

 

좋은 그리스, 나쁜 페르시아

 

◀시체.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 덮어주고 있다. 운명의 라이벌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을까?

 

역사가 승자의 역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알려진 모든 기록에 승자의 시각이 개입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유독 페르시아를 향한 서구의 편견과 무시는 단순히 패자이기에 겪어야 할 수준 이상으로 심하고 집요했다. 서구 문화의 두 축은 기독교와 헬레니즘이다. 서구인들은 오랫동안 고대 그리스 문화를 이상으로 여겼고, 그리스 작가와 학자들이 쓴 저술을 만물의 척도로 받들었다. 그런 그리스인들에게 페르시아는 야만족이었다. 물론 처음엔 페르시아 왕들의 위대한 업적과 성취에 감탄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기원전 490년 이후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략한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인들의 시선은 180도로 바뀌었다. 그리스 작가들은 페르시아를 철저한 악의 제국으로, 잔인한 폭군이 백성과 신하를 노예처럼 학대하는 상극의 세계로, 폭력과 야만이 판치는 불의의 국가로 묘사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붕괴를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페르시아가 한때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리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을 유지하고 감당할 능력이 없었기에 몰락은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 많은 서양학자들의 견해였다. 유명한 고대사학자 헤르만 벵촌(Hermann Bengtson)은 페르시아가 강력한 확장 정책과 무한한 인적 자원, 엄청난 물질적 자원을 토대로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지만, 무능한 군주와 행정제도의 미비로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는 허약한 국가라고 진단 내렸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가들도 같은 견해였다. 그러나 이는 현대에 들어 치밀한 고증과 유적 발굴을 통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밝혀졌다. 페르시아인들이 직접 쓴 역사서나 문학작품이 없어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서구의 일부 역사가들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페르시아제국을 그리스 문화의 대척점으로 간주하길 좋아한다. 페르시아는 찬란한 그리스 문화와 상극을 이루는, 삭막하고 차갑고 잔인한 나라라는 것이다.

 

좋은그리스와 나쁜페르시아라는 자기중심적 이분법은 오늘날에도 서양과 동양을 그런 식으로 나누길 좋아하는 일부 서구인들의 의식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그리스가 페르시아라는 공동의 사악한 적을 상정함으로써 하나로 뭉쳤던 것처럼, 정치적 목적을 위해 특정 세력에 대해 편견을 키우고 적개심을 조장하는 것이 인류 역사에서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지금도 그런 식의 자기중심적 편 가르기가 버젓이 반복되는 게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글 박종대 / 번역가,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