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美 실리콘 밸리 한국인 女 신화 김태연 TYK그룹 회장

풍월 사선암 2012. 6. 29. 09:36

실리콘 밸리 한국인 신화 김태연 TYK그룹 회장

 

냉대 받던 유년시절 미국 이민길 / 청소원부터 IT 기업 사장님까지 / 근성 하나로 아메리칸 드림 실현

 

김태연이 말하는 인생과 비즈니스 성공을 위한 5가지 비법

 

자신을 명품화하라

30초 안에 승부하라

목적을 확실히 파악하라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펴라

매 순간을 감사하라

 

김천에서 나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뒤 스물세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뒤 태권도 사범을 하면서 기반을 닦은 끝에 6개 계열사를 거느린 실리콘밸리의 기업 총수가 된 김태연 TYK 그룹 회장(·62)이 최근 연거푸 한국을 찾았다. 지난 515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엄에서 예술과 강연이 결합된 '아트렉처'를 선보이더니, 613일에는 세계 한인들을 하나로 묶어 구심점 역할을 수행할 세계한인경제연구원(GKERI) 설립 준비위원회 참석차 인천을 방문한 것.

 

7년 전 TV프로를 통해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캔 두 스피릿-can do spirit·할 수 있다 정신)'라고 외치며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그 당찬 경상도 여성을 두 차례 만나 인터뷰 했다. 그는 "견디기 힘든 어려움에 직면하면 '나의 살던 고향을~ '을 부르며 극복해 냈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나도 할 수 있다'고 외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었던 근간에는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움과 아픔이 교차하는 고향, 조마면

 

그의 생가는 김천시 금릉군 조마면 강곡동. 그는 영남일보와의 인터뷰를 무척 반겼다. 그녀의 가족들조차도 '어머니의 고향 신문에서 취재왔다'며 기뻐했다. 김 회장은 고향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첫 질문에 "울고 싶지 않은데"라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내 고향을 그리자면. 감천 냇가가 있었습니다. 큰비가 오면 (몸에) 줄을 매고 내를 건너 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 마을에는 조마초등이 있었고, 마을 아이들은 모두 그 학교에 다녔습니다. 할아버지는 면장을 했습니다. 마을 입구에 우체국이 있었고, 전화가 귀해서 마을사람 누구에게 전화가 와도 내용은 모든 마을 사람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정이 철철 흘러 넘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참 힘든 고향이었습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문중 종손의 집에 정월 초하루 자시에 장녀로 태어나 '재수 없는 계집애'라며 천대를 받으며 자랐다는 것이다.

 

7살부터 태권도 배운 달맞이꽃 소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족들로부터 받은 싸늘한 시선은 상상할 수도 없는 구박과 냉대로 이어졌다. 술주정이 심했던 아버지에게는 무관심과 폭력을, 한 맺힌 어머니에게는 원망을 받아야만 했다.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도 그를 '재수 없는 아이'라고 부르며 무시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6·25가 다섯 살때 터졌어요. 근데 어머니는 나를 집에 다 두고 피란을 떠났습니다. 관심이 없었으니 아이가 있는 지 없는 지 신경도 안 쓰였던 것이지요. 엄마, 엄마 울고 있으니 옆집 아저씨가 데리고 갔습니다. 가는 도중 폭격을 받았는데 운 좋게 저만 용케 살아났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세상의 구박 속에서도 '김태연은 특별한 아이'라는 생각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고 한다. 7살때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원천인 태권도를 만나게 된 것도 또다른 행운이었다. 태권도 하는 외삼촌의 모습에 반해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고, 13살에 최고 유단자가 됐다고 한다.

 

동생의 죽음이민들국화 처녀

 

계속된 아버지의 나쁜 술버릇은 결국 화를 불렀다. 그보다 3살 아래였던 남동생은 술주정하는 아버지와 크게 부딪쳤고, 그만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동생이 떠나면서 남긴 편지는 '큰 누나, 김태연' 앞으로 되어 있었다.

 

"누나, 누나는 들국화처럼 강하니 내 몫까지 열심히 살아줘. 들에 핀 들국화처럼누나는 들국화야". 이후 그녀는 자신을 상징하는 꽃으로 '들국화'를 보탰다.

 

충격을 극복하기 어려웠던 그와 부모, 여동생은 1968년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게 학력의 전부인 그가 미국에 건너갔을 때 처음엔 할 수 있는 일이 청소원 일밖에 없었다. 그러다 청소 일을 하는 대신 7살 때부터 배운 태권도 실력을 써 먹을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궁리 끝에 인근 학교를 찾아다니며 태권도 사범으로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미국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고, 그렇게 번 돈을 밑천으로 1985년 실리콘밸리에 사무실을 열어 컴퓨터 한 대 달랑 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실리콘밸리에서 통한 경상도 여자의 오기

 

사업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보통 이민자들은 식당이나 세탁소, 미용실 등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에 뛰어들었다. 집까지 팔아 돈을 마련해 시작한 첫 사업에서 그는 쓰라린 실패를 맛봤다.

 

"성공의 시간을 기대하면서 고생과 동고동락했죠. 좌절과 시련은 누구나 겪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쓰러져버려요. 인생은 전쟁이니까요."

 

아픔을 겪었고 외롭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해 내야겠다'는 생각이 더 절실해졌다. 문제는 실리콘밸리의 업자들이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령 계약을 할 때도 다른 업체와는 100만달러에 체결하는 걸 그에게는 70만달러에 하자고 제안하는 식이었다.

 

"그들은 제가 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저는 '좋아, 이번은 내가 손해 보마'라는 생각으로 승낙해요. 그리고 최고의 기술과 정성, 믿음을 보여주는 거죠. 지금 당장 눈앞의 것만 계산해서는 사업을 할 수 없어요. 멀리 내다보고 판단한 뒤 공격적으로 움직였던 것이죠."

 

백색의 이방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오기와 배짱으로 일을 밀어붙이는 동시에 그는 자신을 브랜드로 만드는 작업도 병행했다. 한번 보면 누구나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 '튀는 외모'의 인생 전략은 그래서 나왔다.

 

대저택 '스타게이저'의 여주인

 

'한강을 채울 정도'의 눈물을 쏟은 끝에 그는 반도체 장비 회사인 라이트 하우스(Lighthouse Worldwide Solutions)를 비롯해 모닝 플라넷, 데이터 스토어X, 엔젤힐링 등 6개 회사를 소유한 TYK 그룹의 회장으로 거듭났다. 태권도 도장인 '정수원'을 운영하는 태권도 8단의 여성 최초 '그랜드마스터'인 그는 미국 위성방송 '태연 김 쇼'도 진행하고 있다. 아울러 사회봉사활동으로 '수잔 앤소니상' YWCA'TWIN'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래도 정()에 목말라

 

스타게이저(Stargazer, 금자백합꽃)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대지 396(12만평)의 대저택에서 살고 있는 그이지만 마음 한켠에는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앞으로 그는 한국 여성들의 발전에 힘을 보태고 싶어 했다. 그는 "한국의 엄마들이 자녀들을 너무 의존적으로 키우는 것 같습니다. 엄마들이 아이들을 독립적으로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