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먼 곳을 향한 그리움 - 전혜린의 수필

풍월 사선암 2012. 6. 25. 18:54

[말들의 풍경] <33>먼 곳을 향한 그리움

 

-전혜린의 수필 "자유와 천재성 뒤의 불안·평범"

그러나 애특하고 아름다운 전혜린

 

전혜린(1934~1965)이 생전에 낸 책은 모두 번역서다. 에리히 케스트너, 루이제 린저, 이미륵(이의경), 에른스트 슈나벨, 하인리히 노바크 같은 독일어권 문인들이 전혜린의 손을 거쳐 한국 독자들을 만났다. 전혜린은 또 프랑수아즈 사강이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같은 독일어권 바깥 작가들도, 독일어 중역(重譯)을 통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그래서 생전의 전혜린은 번역문학가로 불렸다.

 

문단 한 귀퉁이를 저릿하게 만든 그의 자살 이후, 전혜린의 이름으로 두 권의 책이 나왔다.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와 일기 모음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1968)가 그것이다. 이 두 책을 통해 전혜린은 수필가가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전설이 되었다. 전혜린의 수필은 한 세대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그 젊은이들의 추앙을 통해 전혜린이라는 이름은 지적 독립성과 천재의 여성적 상징이 되었다.

 

전혜린의 짧은 삶은 먼 곳을 향한 그리움에 들려()있었다. 낭만주의의 한 연료라 할 이 정서적 오리엔테이션은, 거기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 Fernweh를 곁들여, 전혜린의 글에서 거듭 표출됐다. 전혜린이 수필의 소재로 삼은 것은 대개 먼 곳이었다. 그 먼 곳은 자신이 떠나온 곳이었다. 그러니까, 먼 곳을 향한 전혜린의 그리움은 고향을 향한 그리움(Heimweh)이기도 했다.

 

그 먼 곳, 그가 떠나온 곳은 유럽이었다. 그의 태가 묻힌 곳은 평남 순천이었고 그가 자란 곳은 서울이었지만, 그의 마음의 고향은 서유럽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그가 20대의 네 해를 보낸 독일 뮌헨이었다. 특히 뮌헨의 슈바빙 구역이었다. 뮌헨에 있을 때나 서울에 와서나, 전혜린은 이 도시의 슈바빙 구역을 지상의 이상적 공간으로 여겼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그렇다고 우겼다.

 

뮌헨대학에 다니던 1958년 한국일보가 공모한 해외 유학생 편지에서, 전혜린은 감수성 있는 사람들이 젊었을 때 누구나 가진 청춘과 보헴과 천재에의 꿈을 일상사로서 생활하고 있는 곳, ()보다는 두뇌가, 환상이 우선하는 곳, 이런 곳이 슈바빙인 것 같다. (중략) 이 곳에서는 아직도 가난이 수치 대신에 어떤 로맨틱을 품고 있고, 흩어진 머리는 정신적 변태가 아니라 자유를 표시한 것으로 간주되며, 면밀한 계산과 부지런한 노력 대신에 무료로 인류를 구제할 계획이 심각히 토론된다”(‘뮌헨의 몽마르트르’)고 썼다. 또 서울로 돌아와 대학 강사로 일하던 1963년에 쓴 글에서는 나는 편견 없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슈바빙 구역에서) 본 것 같다. 정신만이 결국 문제되는 유일의 것이라는 것도. 국적도 피부색도 거기서는 문제가 되고 있지 않았다. 영혼의 교통이 가능하여 정신이 일치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벗이냐 그렇지 않느냐만이 문제였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문제되지 않았다”(‘독일로 가는 길’)고도 말했다. 슈바빙 구역과 뮌헨을 향한 송가는 그의 다른 글에서도 여러 차례 되풀이됐다.

 

나라 바깥 경험이 일반화한 오늘날의 독자가 전혜린의 이런 판단에 선뜻 동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1950년대든 지금이든, 지상의 어딘가에 국적도 피부색도 문제가 되지 않는 공간이, 아무런 편견 없이 오직 영혼의 교통만이 문제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설령 슈바빙에선 영혼의 교통만이 문제된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또 다른 편견’(영혼 제일주의)의 소산이랄 수도 있을 테다. 전혜린은 (뮌헨의 슈바빙에) 설득된 사람이 아니라 매혹된 사람이었다. 홀린 사람이었다. 그 홀림은 장년의 김현이 제 청년기를 되돌아보며 명명한 정신의 불구비슷한 것이었다. 그 홀림은, 그 불구는 유럽을 향한 전혜린의 눈길을 부박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전혜린을 호린 것이 슈바빙만은 아니다. 눈으로 보았든 귀로만 들었든, 유럽 전체가 전혜린의 마음의 공간이었다. 프랑스가 그랬고, 오스트리아가 그랬고, 이탈리아가 그랬다. 유럽은 전혜린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지적 미적 준거이기도 했다. ‘1964년 여름, 만리포라는 글의 첫 부분은 이렇다.

 

얼마나 오랜만의 바다였는가? 그리고 자유! 아무것도 그 어느 것도 나는 다 털어버리고 훨훨 바다로 갔다. 리비에라와 똑같은 감색 바다가 그 곳에도 아무도 모르는 보석처럼 암석 틈에 차갑게 괴어 있었다.” 전혜린이 만리포 앞바다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것은 리비에라 해안의 (어쩌면 상상된) 기억에 기대서다. 말하자면 만리포 앞바다에서 전혜린이 리비에라를 향해 드러내는 감정은 향수다! 전혜린에 앞서 유럽 취향에 크게 휘둘렸던 시인 박인환조차 이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나 자란 사람으로서 전혜린에 맞먹는 정서적 수평에서 유럽을 제 고향으로 삼은 사람은 불문학자 김화영 정도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우연찮게도,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편집한 이는 대학 졸업을 앞둔 김화영이었다. “전설이나 신화 속으로 사라져가는 사람들이 있다. 전혜린, 그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어둠이 깔리는 박명의 층계 위에서 그 여자는 기다리듯이 서 있다로 시작하는 이 책 서문의 끝에는 이어령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으나, 그 서문 역시 김화영이 쓴 것이다. 김화영의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사였던 이어령은 이름을 빌려달라는 대학생 제자의 청을 받고는, 단 한 군데만 고치고 나서 자신의 서명을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한다.

 

그 일화를 털어놓은 글에서, 김화영은 나는 원고를 가지고 온 친구와 둘이서 원고정리(상당 부분은 아예 뜯어 고쳤다), 제목 달기, 에피그라프 첨가, 편집 등을 맡았다”(‘화전민의 달변과 침묵’)고 회고한 바 있다. 죽은 이의 유고를 뜯어고치는 것이 편집자의 권한에 속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미뤄 두자. 김화영의 이 고백은 전혜린의 (미정리 상태의) 원고가 그만큼 허술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허술함은 김화영의 손을 거치고도 말끔히 씻기지 않았다. 판을 거듭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악문의 전시장이다.

 

먼 곳을 향한 그리움과 함께 전혜린 수필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은 극심한 정서 불안이다. 전혜린은 자살 충동과 삶의 의지 사이에서, 열정과 허무 사이에서, 들뜸과 처짐 사이에서, 독립 욕구와 의존 욕구 사이에서, 독단과 회의 사이에서 끝없이 동요했다. 그가 영혼의 집시를 자처했을 때, 집시 됨, 그가 믿었던 것과 달리, 자유의 갈망에 있지 않고 불안의 일상성에 있었다. 이 불안은 생전에 활자화한 수필에선 그저 배음(背音)을 이룰 뿐이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을 일기 텍스트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에서는 날것 그대로 노출된다. 그 정직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정직을 일기장 바깥으로 끌어내 공개하기로 결정한 유족의 심사도 아름다울까? (나는 그 심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불안은 그 자체로 비범함이 아니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도 그 자체로는 비범함이 아니다. 전혜린의 수필들은 비범함을 열망했던 평범한 여성의 평범한 마음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를테면 문학소녀의 글이다. 최우등생으로 일관한 그의 학창 시절과 죽음을 선택한 방식의 과격함에 대한 이런 저런 상념이 독자들의 마음 속에서 버무려지며 그의 글을 터무니없이 매혹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전혜린의 텍스트와 불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다. 그는 내 어머니 세대의 여성이다. 그가 지닌 재능이 아무리 컸다 하더라도, 전혜린의 지적 정서적 지평에는 1950년대 한국 문화의 맥락이 깊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글의 한계는, 부분적으로는, 그의 시대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 시대 한국 문화의 궁핍함에서 잠시 풀려나 유럽의 한 가운데에 발을 들여놓은 젊은 여성이 유럽에 대한 환상과 허위의식을 만들어내고 그 곳을 제 고향으로 삼았다 해서, 그것을 무턱대고 비방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나중에 말하는 자의 유리함에 기대어 불공정한 게임을 했다. 더구나 나는 전혜린보다 16년을 더 살았다. 그러니까 나는 초로의 나이에 이르러 청년 전혜린의 글을 헐뜯었다. 16년이면 제 둔함을 감추고 날램을 가장하기에 넉넉한 세월이다. 그러니까 나는 나이든 자의 유리함에 기대어 불공정한 게임을 했다.

 

서른에 이른 전혜린이 삼십 세! 무서운 나이! 끔찍한 시간의 축적이다. 어리석음과 광년(狂年)의 금자탑이다”(‘긴 방황’)라고 말할 때, 오직 자살할 용기가 없어서 그 끔찍한 시간의 축적을 그보다 훨씬 오래 견디고 있는 나는 부끄럽다. 오로지 일상의 관성에 떠밀리며 내가 세우고 있는 어리석음과 광년의 금자탑이 혐오스럽다. 딸에 대한 애정과 우애를 끝없이 확인할 때, 어머니의 현실 감각으로 제 허영을 지워나갈 때, 전혜린은 애틋하고 아름답다. 그 때, 그의 마음은 내가 다다를 수 없는 균형과 높이에 이르러 있다. 그러니, 내가 앞에서 늘어놓은 전혜린 험담은 모두 무효다.

 

한국일보 / 고종석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