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함 속에 돈 대신 편지 두장 보낸 시부모… "넌 우리의 축복"

풍월 사선암 2012. 7. 7. 07:39

함 속에 돈 대신 편지 두장 보낸 시부모"넌 우리의 축복"

 

20031129, 서울 시내 한 아파트에 예비 신랑 친구들이 함을 들고왔다. 당시 보건복지부 차관이었던 강윤구(62·사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이 사법연수원생 아들 강세빈(37·현직 판사)씨를 결혼시키면서, 사돈집으로 함을 보내는 날이었다.

 

예비 신부 김민정(36)씨도 사법연수원생이었고 지금은 판사로 일하고 있다. 예비 신부는 가족, 친척들이 보는 가운데 설레는 마음으로 함을 열었다. 함 속엔 딱 네 가지가 들어있었다. 여행가방 하나, 비싸지 않은 핸드백 하나, 두꺼운 봉투 한 장, 얇은 봉투 한 장이었다. 신부 가족들이 당황했다. '허례허식 생략하자고 하시더니, 물건 대신 그냥 현금을 보내왔구나. 높은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보다.'

 

신부 부모가 두꺼운 봉투를 열었다. 예비 시어머니가 예비 며느리에게 쓴 긴 편지가 나왔다.

 

'한 가족이 되는 것을 환영한다. 시어머니·며느리 사이라기보다는 인생 선배로서 네가 살아가면서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 주고 싶구나. 아들이 학교 다닐 때 '아버지를 보니 공직 생활은 고달파 보인다'면서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결국 아버지처럼 공직자가 됐구나. 너희 두 사람 모두 책임이 무거운 자리에 있으니, 힘겨울 때마다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고 이해하면서 오래오래 행복하거라.'

 

신부 가족들이 얇은 봉투를 열었다. 이번엔 예비 시아버지가 쓴 편지가 나왔다.

 

 

'민정아! 네가 우리 가족이 되는 것은 세빈이는 물론 우리 모두의 행운이요, 축복이다. 그동안 아들 하나 딸 하나 낳아 길러온 것은 또 다른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더 맞이하게 위함이었던가 보다. 네가 들어오게 됨으로써 비워두었던 큰딸 자리가 가득 채워지는구나. 믿음과 사랑으로 함께 하자꾸나.'

 

신부 가족들이 돌려가며 편지를 읽었다. 신부 외할머니가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 손녀가 이런 훌륭한 시부모님을 만났으니, 시집가서도 사랑받고 마음고생 안 하겠구나."

 

강 원장은 "아들을 결혼시키기 훨씬 전부터 '우리나라 결혼문화에 잘못된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해왔다"면서 "공직자라 모아둔 돈도 없으니 형편에 맞게 소신을 실천하자고 마음먹었지만, 망설임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고 했다.

 

"개혼(開婚)이니까 우리 부부는 몰라도 신부가 시할아버지에게는 와이셔츠라도 한 벌 사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어요. 하지만 시할머니도 사드려야 하고, 작은아버지, 고모, 이모 등 어디까지 해야 할지 끝이 없을 것 같았어요. 상견례 때 사돈께 '예물·예단·이바지 음식 하나도 보내지 마시라'고 했죠."

 

어차피 신혼여행 가려면 여행가방 하나는 필요하니까, 함 속에 번거로운 명품 대신 큼직한 여행가방과 비싸지 않은 핸드백을 하나씩 넣기로 했다. 하지만 가방 두 개 달랑 보내자니 어딘지 섭섭했다. 함은 원래 '귀한 따님 주셔서 감사하다'는 뜻이 깃든 절차인데, 이렇게 생략해도 되나 싶었다. 고민 끝에 강 원장 부부는 며칠간 고심해서 편지를 썼다. 함이 들어간 지 일주일 뒤, 젊은 부부는 법원 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다. 하객들에겐 1인당 13000원짜리 구내식당 갈비탕을 대접했다. 축의금은 받지 않았다.

 

3년 뒤 딸 혜원(34)씨를 결혼시킬 때도 강 원장은 사돈을 설득해 예물·예단·이바지 음식을 생략했다. 아들 장가보낼 때 사연을 이야기하자, 사돈도 "좋은 뜻이니 따르겠다"고 했다.

 

사위 황인성(36) 판사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저희 둘이 이미 보석일 텐데, 무슨 보석이 더 필요하겠어요? 저희는 커플링도 생략할래요."

 

강 원장은 "신혼부부가 느끼는 행복의 강도는 예물·예단이 얼마나 호화로우냐에 비례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깊이에 좌우되는데, 거꾸로 인줄 착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면서 "사회지도층부터 간소하게 결혼하면 좋겠다"고 했다.

 

<조선일보 / 입력 : 2012.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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