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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36)] 비극의 역사 왕좌를 빼앗긴 왕자들

풍월 사선암 2012. 1. 8. 23:24

[이한우의 朝鮮이야기(36)] 비극의 역사 왕좌를 빼앗긴 왕자들

 

조선조 27명 국왕 중 세자로 책봉된 뒤 왕위 오른 국왕은 7명에 불과

이성계 아들 의안대군·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등 왕좌 대신 비참한 죽음

 

조선 왕실에는 태조에서부터 순종까지 모두 27명의 국왕이 있었다. 그런데 원자(元子)로 태어나 세자(世子)로 책봉된 뒤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국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숙종, 경종, 순종 등 7명뿐이다. 나머지 20명은 실은 왕위에 오를 수 없었던 지위에 있다가 왕위에 올랐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게 되는 것은 거꾸로 왕위에 오르게 돼 있다가 오르지 못한 인물의 비극이다. 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비정함에 몸서리치게 된다.

 

먼저 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돼 있던 인물은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서 난 둘째 아들 의안대군 이방석이었다. 이성계가 신의왕후 한씨와 사이에서 난 이방원을 제치고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석은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정변세력에 의해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앞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다. 이때 이방석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태종의 장남은 그 유명한 양녕대군이다. 태종이 즉위한 직후 세자로 책봉됐지만 계속되는 황음(荒淫)과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결국 동생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내주고 만다. 이후 양녕은 세종의 극진한 배려 속에 야인의 삶을 살았고 세조가 정변을 일으켰을 때는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나마 천수(天壽)를 누린 양녕은 행복한 경우에 속한다.

 

세조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었다. 의경세자와 해양대군이다. 그런데 의경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해양대군이 세자 자리를 이어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예종이다. 그러나 예종이 재위 12개월 만에 급서하는 바람에 왕위계승 문제가 복잡해진다. 의경세자에게는 월산대군과 잘산대군이 있었고 예종에게는 제안대군이 있었다. 왕위계승 서열만 놓고 본다면 원자인 제안대군이 0순위였다. 월산대군과 잘산대군은 실은 대군이 아니라 그냥 군이었다. 그러나 당시 세조의 비였던 정희왕후와 잘산군의 장인 한명회의 묘한 결탁으로 인해 왕위는 잘산군으로 돌아갔다. 그가 성종이다.

 

결국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은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남은 삶을 살아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성종 또한 세종 못지않게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을 깍듯이 대했다. 왕실의 중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두 형님을 모셨고 두 형님도 자신의 본분을 넘어서는 행태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왕위가 어긋났을 때 왕좌에 오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에 관한 하나의 모범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안대군이나 월산대군 모두 삶 자체는 평탄치 못했다. 제안대군의 경우 장차 자라나 야심을 품을 경우 왕실을 위협하는 화근(禍根)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정희왕후와 훈구세력은 제안대군을 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 이림의 양자로 입적시켜 버렸다. 적통(嫡統)의 명분마저 앗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제안대군은 어머니 안순왕후(예종 비)에 의해 첫 번째 부인 김씨와 강제이혼하는 개인적 어려움마저 겪어야 했다. 이유는 김씨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성종10년 때의 일이다. 그리고 2년 후 한명회의 심복인 박중선의 딸과 강제결혼을 한다. 행복할 수 없었다. 왕위를 빼앗긴 제안대군은 부인마저 빼앗길 수는 없었다. 박중선의 딸과는 불화가 심했다. 결국 성종16년 성종은 제안대군과 김씨의 재결합을 허락했다.

 

월산군의 경우 동생 성종의 즉위와 함께 궐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의 집은 현재의 덕수궁 자리에 있었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나 궁궐이 다 불타는 바람에 의주에서 돌아온 선조는 월산군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때 덕수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월산군은 시에 기대어 인생의 시름을 삭였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워도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오노라.

 

무욕(無慾)의 경지를 너무도 담담하게 노래해 더 서러움을 가져다 주는 시다.

 

연산군과 폐비 신씨 사이에는 원래 51녀가 있었는데 아들 셋은 일찍 죽고 폐세자된 이황과 창녕대군 두 아들이 있었다. 1506년 중종반정을 일으킨 반정세력은 장차 반란의 씨앗이 될 수 있는 폐세자 이황과 창녕대군을 사사해버렸다. 이때 이황의 나이 열 살쯤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567년 명종이 죽자 왕실의 대가 사실상 끊어졌다.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도 어려서 죽었고 그에 앞서 인종의 경우에는 후사가 없었다. 결국 중종의 후궁 자식 중에서 새로운 임금을 고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그때 선정된 인물이 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 사이에서 난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으로 그가 바로 선조다.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사이에 자식이 없자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됐다. 먼 훗날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가 영창대군을 낳았지만 광해군의 세자교체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것이 결국 영창대군 제거로 나타났고 광해군도 인조반정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광해군과 폐비 유씨 사이에는 3남이 있었는데 첫째와 막내는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죽었고 둘째 이질이 세자로 책봉됐다.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세자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아버지 광해군과 함께 강화도에 유폐되자 이질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인조에게는 소현세자가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대신해서 청나라에 인질로 다녀온 아들이 혹시 청나라를 등에 업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조의 묵인 속에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래서 인조의 왕위는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에게로 이어진다.

 

이후 현종이나 숙종은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왕위계승을 둘러싼 잡음은 생겨나지 않았다.

 

그러나 숙종이 생전에 우려한 대로 억울하게 죽어간 소현세자의 저주때문이었을까? 정비의 몸에서 아들은커녕 딸도 잘 생겨나지 않는 기현상이 조선왕실을 짓눌렀다. 숙종의 경우 3명의 정비를 맞아들였지만 아들을 낳지 못했다. 경종도 정비 둘을 맞았지만 자식이 없었고 영조도 정성왕후 서씨와 정순왕후 김씨 사이에서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결국 영조와 정빈 이씨 사이에서 난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지만 일찍 죽었고 다시 영빈 이씨와 사이에서 난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가 사도세자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대로 영조의 분노를 산 사도세자는 1762년 뒤주 속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정조도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효의왕후 김씨와 사이에 자식을 보지 못했고 의빈 성씨와 사이에서 난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지만 어려서 죽었고 결국 왕위는 수빈 박씨에게서 난 아들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순조다.

 

순조는 344개월을 재위하면서 두 아들을 두었지만 둘째는 어려서 죽었고 장남 효명세자도 대리청정을 하면서 백성의 기대를 모았으나 스물두 살 때 의문의 죽음을 하고 만다. 다행히 그에게 아들이 있어 순조에서 끊어진 왕위를 이으니 그가 헌종이다.

 

조선임금 중에서 최연소인 8살에 왕위에 오른 헌종은 23살 때 사망하는데 효현왕후 김씨와 효정왕후 홍씨 사이에 자식이 없었고 후궁들 중에도 아들이 없었다. 다시 사도세자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사도세자의 후궁 숙빈 임씨에게서 난 은언군의 손자 덕완군이 제25대 왕위에 오르니 철종이다. 그러나 철종은 낳는 아들마다 일찍 죽어 왕위는 다시 은언군의 동생 은신군의 손자인 흥선대원군의 아들 익성군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가 고종이다. 그나마 고종 때에 와서 명성왕후 민씨에게서 난 둘째 아들이 왕위를 이어 숙종 이후 근 200년 만에 정상적인 왕위계승이 이뤄졌지만 나라가 망해버렸다.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대우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