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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37)] 억세게도 여복(女福) 없었던 문종

풍월 사선암 2012. 1. 8. 23:27

[이한우의 朝鮮이야기(37)] 억세게도 여복(女福) 없었던 문종

 

첫째 부인, 시기심에 비책 쓰다 쫓겨나고 둘째 부인은 동성애로 폐출

셋째 부인은 단종 낳은 후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 떠나

 

조선 27명 임금 중에서 여복이 가장 없었던 임금은 누가 뭐래도 세종의 장남 문종이다. 세종에 버금갈 만큼 학문과 인격이 출중했지만 여복, 특히 부인복은 억세게도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단종의 비극적 죽음으로 연결됐는지도 모른다. 

 

문종은 세자로 있을 때인 세종 9(1427) 4월 명문세족 집안의 딸인 김씨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원래는 권문세족이 아니고 평범한 집안의 김구덕이 딸을 태종의 후궁으로 집어넣으면서 돈녕부 판사에 오르는 등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김구덕에게는 김오덕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세자빈 김씨는 김오덕의 딸이었다.

 

그러나 문종과 세자빈 김씨의 결혼은 불과 2년 만에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끝났다. 세자가 자신은 챙기지 않고 다른 궁녀에게 관심을 두자 김씨는 압승술(壓勝術)을 썼다가 세종에게 발각돼 폐출된 것이다. 압승술이란 음양가에서 쓰는 비술로 남을 저주하거나 사랑을 얻기 위해 각종 비책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김씨는 남편이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효동과 덕금 두 여인에게만 사랑을 쏟자 시녀 호초에게 사랑받는 술법을 알아오도록 재촉했다. 이에 호초는 사랑받는 여인의 신의 일부를 베어 불에 태운 다음 가루를 만들어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압승술을 권했다. 그러나 아예 자리를 함께 하기를 꺼리는 바람에 김씨는 이 압승술을 사용해보지도 못했다. 애가 탄 김씨는 다시 호초를 다그쳤고 이에 호초는 여기저기 물어서 교접하는 뱀에게서 흘러나온 액을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다니면 남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제2의 압승술을 권했다.

 

이런 사실을 김씨를 모시던 종 순덕이 세종에게 아뢰었고 세종은 진노했다. “결혼한 지 두어 해도 못되었는데 그 꾀하는 것이 감히 요망하고 사특함이 이와 같을 수 있는가?” 점잖은 세종의 입에서는 좀처럼 나오기 힘든 말이었다. 결국 김씨는 세종 11720일 폐빈되어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이날 호초는 참형을 당했다.

 

3개월 후인 1015일 세자는 봉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아버지 봉여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중하위직 관리였다. 그러나 세자의 장인, 앞으로는 국구(國舅·임금의 장인)가 될 봉여는 이때부터 초고속 승진을 계속한다. 2년 후인 세종 13년 이조참의, 세종 14년 형조참판을 지내고 세종 15년에는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당시 명나라 사신으로 간다는 것은 국왕의 큰 총애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해 말 돈녕부 동지사로 자리를 옮긴 봉여는 이후 호조 공조 등의 참판도 역임한다. 대우는 하되 중요 직책은 맡기지 않으려는 세종의 계산된 배려였다. 봉여는 세종 18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문제의 사건이 터지기 석 달 전이다.

 

같은 해 1026일 세종은 도승지 신인손과 동부승지 권채를 부르고 나머지 신하는 모두 나가도록 명한다. 어쩌면 세종의 생애 가운데 이날이 가장 수치스러운 날인지도 몰랐다. 폐빈된 김씨의 경우는 그나마 나았다. “근년에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실로 편치 않았다. 그런데 요사이 또 한 가지 괴이한 일이 있는데 이를 말하는 것조차 수치스럽다.”

 

어렵사리 말을 돌리다가 겨우 시작한 세종의 실토는 두 사람으로서도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세자와 세자빈 봉씨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후사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세종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신하들과 의논해 승휘 3인을 들였다. 승휘란 임금의 후궁에 해당하는 세자의 첩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승휘 권씨가 임신을 하자 봉씨는 원망과 앙심을 품게 됐다. 세종은 이런 봉씨를 직접 불러 타이르기도 하고 야단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먼저 봉씨는 거짓 임신 해프닝을 벌였다. 스스로 태기(胎氣)가 있다 하여 거처를 왕비가 머무는 곳으로 옮겼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자 낙태를 했다고 말했다.

 

단단한 물건이 나왔는데 지금 이불 속에 있다.” 늙은 여종을 시켜 확인해 보자 이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임신했다는 말은 애당초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동성애였다. 봉씨는 여종 소쌍을 사랑했다. 봉씨는 소쌍이 승휘 권씨의 몸종인 단지와 친하게 지내자 그것조차 질투했다. 이 정도 되다 보니 궐내에도 소문이 파다했고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세종은 소쌍을 불러 다그쳤다. “지난 동짓날 빈께서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마지못해 옷을 반쯤 벗고 누웠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희롱하였습니다.”

 

당시 이런 동성애는 궐내의 궁녀와 시녀들 사이에 유행했던 것 같다. 세종은 그래서 금지령을 선포하고 곤장 100대를 치는 벌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세자빈이 동성애를 했던 것이다. 세종은 당장 세자빈을 불렀다. 봉씨는 딱 잡아뗐다. 자신은 동숙한 적이 없고 소쌍과 단지가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여 밤낮 없이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아댔다고 듣기 민망한 말까지 스스럼없이 했다. 세종은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따져 물었다. 자기가 했던 짓을 단지가 한 것인 양 둘러대는 것을 세종이 모를 리 없었다. 결국 봉씨는 이날 폐출됐다.

 

그러나 두 번째 폐빈 조치를 내린 세종으로서는 신하들 볼 면목이 없었다. 혹시 자신과 세자를 탓하는 여론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봉씨를 내쫓은 지 열흘쯤 지난 117일 세종은 다시 한 번 봉씨를 내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상세하게 밝힌다.

 

첫째, 글을 아는 여성으로 하여금 봉씨에게 열녀전을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봉씨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며칠 만에 못 배우겠다고 책을 뜰에다 내던져버렸다. 둘째, 내가 어렵사리 설득해 세자가 봉씨를 찾도록 했는데 봉씨는 매일 밤 세자에게 그것을 요구했다. 셋째, 술을 즐겨 방 안에 술을 준비해두고서 늘상 큰 그릇으로 술을 취하도록 마셨다. 술이 취하면 봉씨는 여종들로 하여금 남성을 사모하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아버지 봉여가 죽어 한동안 술을 먹을 수 없게 되자 봉씨는 그 술을 어머니 집으로 보냈다. 세자가 이를 알고 금지하자 봉씨는 그 술을 다 갖고 오게 해서 자기가 마셔버렸다.”

 

봉씨는 시골 여자였다. 게다가 조선 초의 여성은 실은 고려의 여성이다. 자유분방할 수밖에 없었다. 궁궐 내에 여성의 동성애가 만연했던 것도 고려의 문화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여성봉씨가 쫓겨나자 참판에까지 올랐다가 죽은 아버지의 관작도 추탈됐다. 딸의 행실은 죽은 아버지에게까지 화()를 가져다 주었다.

 

봉씨를 폐한 지 두 달 만인 12283인의 승휘 중에서 행실이 뛰어났던 권씨가 세자빈으로 뽑혔다. 새로 뽑을 경우 김씨나 봉씨 같은 폐단을 반복하게 될 것을 우려한 결정이었다. 세자와 권씨의 금실은 좋았다. 5년 후인 세종 23(1441) 723일 권씨는 아들을 낳아 세종의 기대에 부응했다. 훗날의 단종이다. 그러나 권씨는 바로 다음날 출산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왕비에 오르지도 못한 것이다. 훗날 문종이 즉위한 후 현덕왕후로 추존됐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가정을 해봐야 한다. 만일 문종이 김씨나 봉씨와 사이가 좋아 아들을 낳았다면 이후 역사의 전개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단종은 13살 때 삼촌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겪게 되는데 김씨나 봉씨가 아들을 낳았을 경우 20대에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에 수양이 쉽게 거사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부질없는 가정이다.

 

세계사 연표

 

1405 , 정화의 해외 원정 시작

1450 문종 즉위

1452 단종 즉위, 비잔틴 제국 멸망

1455 영국, 장미전쟁 발발, 세조,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

1457 세조,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 영월에 유배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대우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