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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34)] 서인을 공포로 몰아넣은 상소 한 장 

풍월 사선암 2012. 1. 8. 23:16

[이한우의 朝鮮이야기(34)] 서인을 공포로 몰아넣은 상소 한 장

 

효종실록에 봉림대군(효종)이 뇌물 쓰고 세자 도모한 내용 있다

남인 노이익 상소에 조정 발칵거짓 판명되며 서인 득세 후 처형

 

1689(숙종 15)은 경신환국으로 집권했던 서인(西人)이 몰락하고 다시 남인(南人)이 권력을 장악한 기사환국이 일어난 기사년이다. 이때는 남인을 모질게 탄압했던 서인인사에 대한 역()탄압이 한창이었다. 서인들로서는 작은 꼬투리라도 걸리면 유배를 가야 했고 혹시라도 중한 죄를 범한 것이 드러나면 목숨을 부지할 길이 없었다.

 

이런 가운데 1010일 노이익이라는 안동 유생이 올린 상소가 조정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내용이 너무나도 충격적이라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피바람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야 할지 몰랐다. ‘효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사관이 뇌물로서 저위(儲位)를 도모하였다고 적어 넣었다는 것이었다. 저위란 세자 자리를 말한다. 따라서 인조가 소현세자를 내쫓아 죽인 다음 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인평대군 중에서 후사를 정하려고 할 때 봉림대군이 대신들에게 뇌물을 써서 인조에게 자신을 세자로 추천하도록 공작을 펼쳤다는 이야기였다. 효종은 숙종의 할아버지다. 노이익의 상소 내용이 사실이라면 효종은 하루아침에 뇌물로 왕위에 오른 임금이 되고 결과적으로 숙종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모독이 아닐 수 없었다.

 

안동 유생이면 노이익은 남인이다. 그가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도 이미 남인들 사이에 파다하게 그 이야기가 퍼진 때문이었다. 노이익이 밝힌 경위는 이랬다. 숙종 초 사관으로 있던 윤휴의 아들 윤의제가 효종실록을 포쇄(·고문서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 봄·가을 햇살에 책을 말리는 작업)하던 중 문제의 구절을 보게 됐고 이를 당시 남인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던 아버지에게 말했고 이어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털어놓은 바람에 남인들 사이에서는 말 그대로 공공연한 비밀처럼 되었다는 것이었다.

 

윤의제의 아버지 윤휴는 숙종 6년 경신환국이 일어난 직후 모호한 이유로 서인들에 의해 죽었는데 실은 그 진짜 이유도 바로 이와 관련돼 있었다는 것이 노이익의 주장이었다.

 

당시 3정승은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래선, 우의정 김덕원으로 모두 남인이었다. 그러나 남인이라고 해서 모두 서인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식의 극단론자는 아니었다. 특히 이들 3인은 남인 중에서는 온건한 편에 속했다. 그렇다고 불 같은 성격의 숙종이 일단 이 사건을 알게 된 이상 그냥 덮어버릴 수도 없었다.

 

중용의 지혜를 갖고 있던 목래선이 나섰다. 일단 윤휴와 윤의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윤의제의 동생 윤하제를 불러 전후 맥락을 알아보는 것이 일을 풀어가는 순서라고 말했고 숙종도 옳게 여겼다.

 

조정은 극도의 긴장에 휩싸였다. 다음날 장원(掌苑) 별검으로 일하고 있던 윤하제가 승정원에 불려와 조사를 받았다. 윤하제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문제의 대목을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자신의 형이 살아 있을 때 실록에 임금(효종)을 무고하는 말이 들어 있다면서 늘 분개했다고 한다. 실은 그 전에 이 문제를 임금에게 고할 생각도 했으나 망설이던 중에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유배를 가는 바람에 실상을 전할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보고를 받은 숙종은 즉각 실록에 임금을 무고하는 말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며 즉각 춘추관에 보관된 실록의 해당 대목을 확인하라고 명했다. 일이 곤란한 지경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영의정 권대운과 우의정 김덕원은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실록을 함부로 볼 수 없으니 실록을 확인하라는 명을 거둬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좌의정 목래선의 의견은 달랐다. “실록을 살펴보아 문제의 대목이 없으면 모든 의심은 풀어지는 것이고, 노이익의 말대로 임금을 무고한 대목이 있다면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그것은 숙종이 원하던 바였다.

 

그러나 실록을 상고(祥考)하는 일은 6개월이 지난 414일에야 이뤄진다. 그만큼 조정 대신들의 반론이 거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국을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꾼 첫 해였기 때문에 일도 많았고 사람도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의정 권대운과 춘추관 당상관들은 공동으로 인조·효종 양 실록을 검토한 결과 윤의제가 분개했다는 문제의 대목은 없다고 숙종에게 보고했다. 권대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숙종은 윤의제의 관작을 추탈(追奪·죽은 사람의 관직을 빼앗음)하고 노이익은 유배형에 처했다.

 

뭔가 이상했다. 노이익의 상소가 정말로 거짓임이 드러났다면 열 번 사형을 당하고도 남을 중한 범죄다. 그런데 유배로 끝나고 윤의제도 관작 추탈에 그쳤다. 사흘 후 성균관 전적 박권이 상소를 올려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실록에 문제의 구절이 없다면 노이익과 윤의제에게 중벌을 내려야 하는데 얼렁뚱땅 넘어가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 신하들은 숙종의 잘못된 판단에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데 침묵했으니 신하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통박이었다. 숙종은 박권도 유배토록 명한다. 대신들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423일 권대운은 다소 충격적인 말을 털어놓는다. 실은 인조실록을 열람했을 때 봉림대군이 돌아왔다는 문장 뒤 두 줄이 칼로 베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교정 차원이 아니라 뭔가 중대한 일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이에 숙종은 426일 한양 춘추관에 있는 실록뿐만 아니라 전국 사고(史庫)에 있는 실록 모두를 비교할 것을 명한다. 마침내 86일 춘추관 지사 민암 등이 강화도 정족산 실록을 보고 와서 실상을 보고했다. 노이익이 말한 바와 같은 무함하는 말은 없었고 거기에 칼로 40자를 베어낸 자국이 있었다고 했다. 이후 다른 사고의 실록들과 비교한 결과 칼로 베어진 40자의 내용은 이랬다. 해당 대목은 인조실록46권 을유년(인조31645) 33장이다.

 

봉림대군이 돌아왔다. 이때 세자가 아직 정하여지지 않았는데, 대군이 평소에 좋은 명성이 있으므로 임금이 자못 생각을 두었다 한다. 그러므로 숙배할 때에 궐내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바라보았다. 간원에서 아뢰기를, 근래(鳳林大君還 時國本未定 而大君素有令聞 上頗屬意云 故肅拜之際 禁中人皆爭覩之 諫院啓曰 近來).’

 

825일에는 오대산 실록을 상고하고 온 춘추관 동지사 유명견도 민암과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일단 실록 훼손사건은 이것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이미 사망선고를 당해 숨죽이고 있던 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노이익은 그냥 둘 수 없는 인물이었다. 만일 숙종이 정밀한 조사를 명하지 않고 윤의제가 했다는 말을 무턱대고 수용했다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던 사관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서인이 죽어야 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숙종 20년 다시 갑술환국으로 서인의 세상이 됐다. 서인은 5년 전의 그 일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 해 1224일 의금부에서는 노이익과 윤하제·윤융제 형제 등을 불러 대질심문했다. 노이익은 윤의제 형제에게 들었다고 둘러댔고, 윤하제는 노이익이 갑자기 찾아와 어디선가 형의 이야기를 들었다며 상소를 올리겠다고 해서 자신은 책임질 수 없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윤의제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고 노이익이 벼슬을 얻고 싶은 공명심에 그런 상소를 올렸을 수도 있다. 현재 전하는 실록만으로는 어느 쪽이 진실인지 명확히 가릴 수 없다. 사실(事實)보다 중요한 것이 당론(黨論)이던 시대였다. 서인의 시대에 그들이 발붙일 곳은 이미 없었는지 모른다. 결국 숙종 21117일 노이익은 처형당했고 윤하제는 극변으로 유배를 가야 했으며 윤융제는 혐의가 없어 풀려났다. 실록 훼손은 확인됐지만 실록 왜곡 여부는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게 됐다.

 

세계사 연표

 

1681 타이완, 청나라에 귀속됨

1684 버뮤다, 영국의 식민지됨

1688 영국, 명예혁명

1689 기사환국, 노론 실각·남인 집권

1690 장희빈 왕비로 책봉

1694 갑술옥사로 노론에 의해 남인 몰락

1699 중국, 처음으로 광둥 무역 허가

1701 미국, 예일대학 창립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대우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