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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33)] 미로같은 조선중기의 권력지도

풍월 사선암 2012. 1. 8. 23:13

[이한우의 朝鮮이야기(33)] 미로같은 조선중기의 권력지도

 

혈연·학연으로 뭉치고 당쟁·야망으로 얽히고

숙종 후반기 김상헌과 최명길 손자들이

노론과 소론 대표로 정승 번갈아 맡아

 

정치는 내 손 안에조선 중후기의 역사를 보면 정말로 한 줌도 안 되는 몇몇 집안이 나랏일을 좌우했다. 그것은 문벌 중심, 당쟁의 격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게다가 예학(禮學)을 중심으로 혈연과 학연이 한데 어우러져 지도층의 범위를 더욱 협소하게 만들었다. 이런 현상은 인조반정으로 서인(西人)세력이 집권한 후 더욱 강화된다.

 

◀여주영릉(효종)

예를 들어 효종과 현종 때의 예학자이자 정치가인 송준길(宋浚吉, 선조 391606~현종 131672)에서 출발해보자. 그는 송시열보다 한 살 위로 멀지 않은 친척이었다. 그는 18세 때 정경세의 딸과 결혼하는데 정경세는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퇴계 이황의 1세대 제자인 서애 유성룡의 문인이다.

 

그의 어머니는 김은휘의 딸이다. 김은휘는 송준길의 스승인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의 아우다. 따라서 송준길의 어머니와 스승 김장생은 4촌간이었으니 송준길에게 김장생은 외당숙이다. 송준길과 김장생의 아들 김집은 6촌이 된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김장생과 김집 두 사람에게서 예학을 전수 받는다.

 

이제 우리는 김장생·김집의 집안으로 넘어왔다. 김장생(金長生, 명종 31548~인조 91631)은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예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의 학문은 아들 김집이 이어받는다. 원래 김장생에게는 아들 3형제가 있었다. 첫째 김은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변을 당했고 셋째 김반은 이조참판에 오르는데 그 아들들이 번성한다.

 

우리의 미로찾기는 여기서 김반의 셋째 아들 김익겸을 향해 간다. 김익겸 자신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생원에 그쳤다. 그러나 그의 아들 김만기(金萬基, 인조 111633~숙종 131687)의 딸은 숙종과 결혼해 인경왕후에 오른다. 임금의 장인인 국구(國舅)의 자리에 오른 김만기는 숙종 초 병조판서를 맡아 어린 숙종의 왕권을 확고하게 지켜낸다. 일단 여기까지 정리하면 송준길의 외6촌 김반은 숙종 장인의 조부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에서 척화파의 거두로 주화파 이조판서 최명길과 격론을 벌인 김상헌에게서 출발해보자. 김상헌(金尙憲, 선조 31570~효종 31652)은 김극효의 아들로 형 김상용(金尙容)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성으로 들어갔다가 장렬하게 순국했다. 김상헌 형제의 어머니는 좌의정을 지낸 정유길의 딸이다. 즉 김상헌 형제는 정유길의 외손자들이었다. 정유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종 때의 명재상 정광필에 이르게 된다.

 

김상헌에게는 김광찬·김광혁 등의 아들이 있었고 중추부 동지사를 지낸 김광찬에게는 김수증·김수흥·김수항 3형제가 있었다. 맏형 김수증은 동생들이 정치적 고초를 겪는 모습을 보며 은거생활을 한 반면 김수흥·김수항은 숙종 때 영의정까지 지내지만 환국이 일어날 때마다 시련을 겪어야 했다. 특히 김수항은 1689년 기사환국으로 영의정에서 쫓겨나 남인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 김창집도 훗날 영의정에 오른다. 이들은 처음부터 송시열과 정치노선을 같이해 일관되게 서인, 그 중에서도 노론의 길을 걸었다. 흥미로운 것은 김수항 3형제와는 6촌인 김상용의 손자가 남인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다. 복제논쟁이 일어났을 때도 1년상을 주장한 서인 송시열에 반대해 3년상의 남인·허목·윤휴 등에게 동조했다.

 

김상헌과 최명길,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은 후손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최명길(崔鳴吉)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당시 이조판서로서 수종하였다. 그리고 청나라의 항복 요구가 거세지자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으며 이로 인해 예조판서 김상헌이 강화문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리자 조정에는 이처럼 찢어버리는 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 나처럼 다시 이어 붙이는 사람도 꼭 있어야 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최명길에게는 최후량·최후상 등의 아들이 있었다. 최후량의 경우 한성좌윤에 임명된 바 있었지만 사실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마에만 힘썼으며 그의 아들 최석정(崔錫鼎)은 숙종 후반 영의정에까지 올라 남구만과 함께 소론의 지도자로 활동한다. 즉 숙종 후반기의 정치는 김상헌의 손자들과 최명길의 손자들이 각각 노론과 소론을 대표해 정승을 번갈아 가면서 맡는 양상이 이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의 경우 이이의 학통을 이어받은 반면 소론의 경우 주로 혼맥·학맥이 뒤얽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송시열과 자기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 문제로 싸워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윤증의 할아버지 윤황은 바로 성혼의 사위였다. 최명길의 아버지 최기남은 성혼의 제자였다. 그 밖에 성혼의 제자 중에는 신흠·이항복 등이 있었다. 남구만·최석정과 함께 흔히 소론 트리오로 꼽히는 박세채는 신흠의 외손자이며, 윤증의 숙부인 윤순거에게서 배웠다. 최명길도 신흠과 이항복에게서 배웠고 최석정은 박세채로부터 사사하기도 했다. 숙종 때 김장생 집안 못지 않게 숙종에게 큰 영향을 미친 집안은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의 집안이다. 명성왕후의 할아버지 김육(金堉, 선조131580효종91658)은 조광조와 함께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김식(金湜)3대손으로 어려서는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광해군 때는 좌의정 정인홍의 미움을 받아 뜻을 펴지 못했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아가 관찰사에 올랐다. 이때 그는 대동법 시행을 건의했고 탁월한 실무능력을 발휘해 효종 2년 영의정에 올랐다.

 

원래 그는 효종 즉위년에 대동법 실시 상소문을 올렸으나 김집·송시열 등이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영의정에 오른 후 충청도 지방을 중심으로 시험실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또 그는 일찍부터 화폐 유통에 관심을 쏟아 일부 지방에 상평통보를 보급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김좌명과 김우명 두 아들이 있었다. 특히 김좌명은 김육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대동법 실시에 뜻을 두고 전라도·경상도·황해도 등에서 차례로 시행하여 백성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병조판서에 오른 김좌명에게는 김석주라는 뛰어난 아들이 있었다. 김석주도 숙종 즉위 초 병조판서 등을 맡아 김만기와 함께 숙종의 보위를 튼튼히 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러나 남인 제거를 위한 공작정치를 주도했다 해서 남인들의 원성의 대상이 된다. 김우명은 별다른 출세를 하지 못했지만 딸이 현종과 혼인함으로써 국구가 되었다. 김육의 집안은 전통적으로 서인 집안이지만 당파성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김육은 김집·송시열 등과 대동법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으며 한당(漢黨)과 산당(山黨)으로 갈리어 극심한 대립을 빚기도 했다.

 

어린 숙종이 즉위하자마자 김석주와 김우명 등이 오히려 서인을 배척하고 남인의 집권을 도운 것은 이 같은 집안의 구원(舊怨) 때문이었다. 때로는 집안 간 갈등이 당파를 뛰어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당파의 힘은 셌다.

 

송시열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인이 제거된 상태에서 서인 김석주와 김우명이 설 자리는 거의 없었다. 김우명은 숙종 1년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김석주는 숙종의 장인이어서 겨우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김만기 등과 손잡고 집권 6년째인 1680(숙종 6) 경신환국 때 일순간에 남인을 숙청하고 서인 세상을 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남인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할아버지 때의 원한을 털고 김육의 손자 김석주와 김집의 동생 김반의 손자 김만기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김석주나 김만기나 서인이었기 때문이다.

 

숙종(1674~1720)시대 주요 사건과 세계사

 

1644 , 중국 통일

1665 뉴턴, 만유인력 법칙 발견

1677 대동법 경상도에서 실시

1680 경신환국,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 장악

1688 영국, 명예혁명

1689 기사환국, 세자 책봉 문제로 노론 실각·남인 집권 / ·러시아 국경 정한 네르친스크조약 체결

1690 장희빈 왕비로 책봉

1697 장길산이 이끈 농민군 봉기

1701 장희빈, 사약 받음 / 프로이센왕국 성립

1707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병합으로 대브리튼왕국 설립

1710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완성

1712 백두산 정계비 세움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대우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