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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35)] "명나라 제주정탐 막아라" 불상 특별 수송작전

풍월 사선암 2012. 1. 8. 23:19

[이한우의 朝鮮이야기(35)] "명나라 제주정탐 막아라" 불상 특별 수송작전

 

태종 때 명 사신, 불상 핑계로 제주 방문 나서자 미리 나주로 불상 이송

전라도 관찰사 등 지연책에 사신 일행 제주도 구경도 못하고 돌아와

 

조선을 방문하는 명나라, 청나라의 사신을 우리는 천사(天使), 칙사(勅使)라고 불렀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중국에서는 일년에 한두 차례, 조선에서는 대여섯 차례씩 사신을 파견했다. 명나라 사신 중에서는 특히 조선 초 여러 차례 조선을 찾은 황엄(黃儼)이 독보적 존재였다. 그는 태종 34월 처음 조선을 찾은 이래 태종 때 모두 8차례, 세종 때 1차례 등 9번에 걸쳐 조선을 찾은 인물이다.

 

그는 철저하게 명나라의 국익을 추구하면서도 조선을 알고 배려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명나라 조정에서 얼마 안되는 친조파(親朝派) 인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황엄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태종과 적지 않은 긴장국면을 빚어냈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태종 6(1406) 4월 황엄 일행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다. 419일 한양에 들어온 사신 일행을 위해 태종은 태평관에서 연회를 열었다. 태평관은 당시 사신의 숙소였다.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황엄이 술에 취했다며 자리를 피하자 황엄의 부하인 한첩목아가 태종에게 은근히 말했다.

 

제주도 법화사에 있는 미타삼존불은 원나라 때 양공이 만든 것입니다. 원래 우리 것이니 우리가 가서 가져 가는 것이 온당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황엄이 자리를 피한 이유는 3년 전 처음 조선에 와서 위세를 부리다가 태종에게 봉변을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엄은 작은 나라의 임금이지만 태종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한첩목아의 말이 끝나자 태종은 맞장구를 쳤다.

 

, 마땅하고 말고요. 다만 배로 실어오다가 부처 귀에 물이나 들어가지 않을까 두렵구려!”

 

유머 섞인 태종의 대답에 주석(酒席)에서는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황엄이 빠진 그 자리의 명나라 사신은 뜻밖에 일이 쉽게 풀리게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태종을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는 순진한 판단이었다.

 

술자리가 파하자마자 측근 신하를 부른 태종은 아무래도 황엄이 불상보다는 제주의 사정을 정탐하려는 것 같다고 보고서 두 명의 신하로 하여금 당장 제주로 출발토록 명했다. 사신이 원하는 불상을 미리 제주에서 나주로 옮겨 놓으면 사신이 제주에 가야 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태종은 판단도 빨랐고 행동도 민첩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황엄 일행은 닷새 후인 425일 제주에 가기 위해 전라도를 향해 출발했다. 태종은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의정부지사 박석명으로 하여금 황엄 일행과 동행토록 했다. 말로는 길 안내였지만 실은 감시역할이었다. 실은 이날 떠날 때도 태종과 황엄은 신경전을 벌였다. 황엄은 태종이 직접 나와서 전송해줄 것을 청했고 태종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에 화가난 황엄 일행은 새벽녘에 말을 몰아 남행길에 나섰다. 그 바람에 지신사(비서실장) 황희는 태평관으로 황엄 일행을 전송하러 갔다가 허탕을 쳐야 했다.

 

한편 420일 태종의 특명을 받고 불상 운반을 위해 제주로 향한 박모와 김도생 두 사람은 불과 17일 만에 제주에 가서 동불(銅佛) 3구를 싣고 나주에 가져다 놓았다. 57일경 불상운반작전이 끝났다는 뜻이다.

 

황엄 일행이 나주에서 한양으로 돌아온 것은 716일이다. 황엄으로서는 본래의 목적, 즉 제주 정탐은 하지 못한 채 동불 3구만을 챙겨서 돌아왔으니 허탕을 친 셈이었다. 황엄 일행의 남행길이 멀어진 데는 전라도 관찰사 박은의 지연책도 크게 작용했다. 서둘러 바다를 건너려 하는 황엄 일행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40일 동안 붙잡아 놓았던 것이다.

 

속으로 괘씸해하고 있는 황엄에게 태종은 다시 한 번 불을 지른다. 그들 일행이 한양으로 들어올 때 환영행사에 나가보지 않은 것이다. 몸이 불편하다고 핑계를 댔다. 그리고 이조판서 이직을 내보냈다. 황엄은 더욱 화가 났다. ‘정승도 아니고 판서를 내보내 명나라 사신을 맞는단 말인가?’

 

쉽게 물러날 황엄이 아니었다. 명나라 황제가 불교를 숭상하니 동불을 맞이할 때 태종이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해야 할 것이라고 조선 조정에 통보를 한 것이다. 태종은 격노했다.

 

황엄이 나를 욕보임이 어찌 여기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태종이 황엄 일행을 찾아간 것은 이틀 후였다. 태종이 태평관으로 황엄을 찾아가자 황엄은 불상에 예를 행할 것을 청했다. 곧바로 태종의 논리정연한 반박이 이어졌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천사(天使)를 위한 것이지 불상을 위한 것이 아니오. 만약 불상이 중국에서 왔다면 내가 마땅히 절하여 공경의 뜻을 표해야 옳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한데 절할 필요가 있겠소?”

 

태종으로서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궐로 돌아온 태종은 정승들을 불러 다시 한 번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도록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부분의 정승은 황제가 불교를 숭상하는 데다 황엄은 난폭하니 임시방편으로 예불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태종은 진노했다. 정승을 믿고서 불상에 절을 하지 않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는데 정작 두 정승 하륜과 조영무가 절을 해야 한다고 말하니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황엄 한 사람을 두려워함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의를 지켜 임금의 어려움을 구할 수 있겠는가? 고려의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 갔을 때 고려 신하 중에서 충혜왕을 구원하려 드는 자가 없었다. 내가 위태롭고 어려움을 당해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다.”

 

태종은 홀로 결단을 내린다. 태평관으로 행차한 태종은 국왕의 동시통역을 맡은 어전통사 이현을 시켜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 조선의 화복이야 천자의 손에 달려 있지 불상에 있는 것은 아니오.”

 

이현의 말을 전해 들은 황엄은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이 없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마음속으로 내가 당신에게 졌소이다라고 되뇌었을지 모른다.

 

전하를 만나 보겠소.” 이렇게 해서 태종은 태평관 안으로 들어가 황엄과 만났다. 옆에 있던 불상에 예를 행하지 않았다. 한 고비를 넘긴 태종은 이곳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한가운데 불상이 있으니 함부로 할 수가 없소. 곧바로 내 궁으로 와주기를 바라오!”라며 황엄을 대궐로 초청했다.

 

겉으로야 웃고 있었지만 황엄의 속은 무척이나 쓰렸다. 태종이 대궐로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황엄 일행은 꼼짝도 않고 태평관에 머물고 있었다. 태종은 대언(세종 때 승지로 명칭이 바뀐다) 윤사수를 시켜 황엄에게 뛰어난 말 한 마리를 선사했다. 그러자 마침내 황엄도 화를 풀고 창덕궁에 들어왔다. 이날 광연루에서는 거나한 술판이 벌어졌다.

 

나흘 후인 722일 황엄은 불상 3구를 안고 일행과 함께 명나라로 돌아갔다. 신하들은 이것으로 불상파동은 일단락됐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물론 그랬다.

그러나 전혀 다른 파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7월이 끼어 있으니 황엄 일행이 돌아간 지 두 달여 만인 818일 선위(禪位)파동이 일어나 조정 안팎은 발칵 뒤집어진다. 결국 철회되기는 하지만 선위파동의 충격파는 대단했다. 처남 민씨 형제들이 그 여파로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당시의 선위파동은 대단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임금의 자리를 불안하게 여긴 태종이 신하들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 일으킨 주도면밀한 계획이었다. 당시 태종이 불안감을 갖게 된 여러 가지 이유 중에 불상에 예를 하는 게 좋다는 정승의 건의도 포함된다. 어쩌면 그것이 선위파동을 일으킨 결정적 이유인지도 모른다.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대우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