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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32)] 임금님의 치통은 허준도 못 고쳤다

풍월 사선암 2012. 1. 8. 23:11

[이한우의 朝鮮이야기(32)] 임금님의 치통은 허준도 못 고쳤다

 

성종·광해군 등 치료법 없어 왕실 행사도 차질

전국에 명의 동원령 내리기도

  

정확히 어원을 알 길은 없지만 임금이 양치질하는 것을 조선의 궁중에서는 수부수하오시다라고 표현했다. 아쉽게도 실록에는 임금이 수부수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일반 백성들이 소금을 손가락에 묻혀 이를 닦았다면 임금은 나무로 칫솔을 만들어 칫솔질을 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연산군 12228일 연산군은 봉상시(奉常寺)의 종에게 양치질하는 나무를 만들어 바치라고 명한다.

 

양치질하는 나무란 아마도 버드나무 가지를 뜻했을 것이다. 원래 양치질이라는 말의 어원이 버드나무 가지’, 즉 양지(楊枝). 옛날 사람들은 버드나무 가지에 소독 성분이 있다고 믿어 버드나무 가지를 이쑤시개처럼 깎아서 사용했다. 그래서 양지질이라고 하던 것이 이()와 관련됐다고 해서 어느 시점에 양치질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임금이라 하더라도 오늘날 같은 칫솔이나 치약이 없어 제대로 수부수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충치나 잇몸 염증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염증은 당시 의학으로서는 마땅히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조선의 임금들이 쉽게 걸린 질병이 안질·종기·치통 등이었다.

 

세종의 경우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 할 만큼 온갖 종류의 질병을 다 앓았다. 그러나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치통을 앓았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세조가 제주안무사에게 명을 내려 난산(難産)과 안질(眼疾), 치통을 치료할 수 있는 여의(女醫) 두세 명을 뽑아서 올리라 명했는데 이는 세조 자신의 치통보다는 왕실 내 왕비나 공주 등의 질병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치통으로 크게 고통 받은 조선의 임금은 성종·중종·광해군·현종이다. 성종 1178일 성종은 승정원에 하교한다. “내가 치통을 앓은 지 해가 넘었는데 널리 의약(醫藥)을 시험하였으나 효력이 없다.” 그러면서 명나라 사신에게 부탁해 약을 구하면 어떻겠냐고 신하들의 의견을 구했다. 그런데 도승지 김계창은 전하의 치통을 다른 나라 사람이 알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임금의 질병은 일종의 국가 기밀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옛날에 진()나라 임금도 병이 있어 적국인 진()나라에서 의원을 구한 적이 있는데 하물며 중국에 도움을 청하는 게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는가라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관반에게 알아볼 것을 명한다.

 

유감스럽게도 이후 성종의 치통에 관한 치료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치통에 관한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 치유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랬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명나라 의약의 도움을 받았거나 국내의 누군가에 의해 치료된 것이다. 성종 19928일의 기록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날 성종은 제주목사 허희에게 글을 내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잇병을 고치는 의녀 장덕은 이미 죽고 이제 그 일을 아는 자가 없으니 이··귀 등 여러 가지 아픈 곳에서 벌레를 잘 제거하는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추천하여 올려라.” 즉 성종의 치통은 장덕이 치료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눈여겨볼 대목은 제주도이다. 세조 때도 제주도에서 의녀를 뽑아 올리도록 명한 것을 보면, 제주도에 치통과 관련된 치료법이 전수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성종 23614일에는 이와 관련된 아주 흥미로운 기록이 눈에 띈다. 장덕의 의술 전수와 관련된 내용이다. 이날 우승지 권경희는 성종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제주도의 의녀 장덕은 치충(齒蟲)을 제거시키고 코와 눈 등 모든 부스럼을 제거할 수 있었는데 죽을 무렵에 그 기술을 자신의 몸종인 귀금(貴金)에게 전수하였습니다. 나라에서는 귀금을 천인에서 면하게 하여 여의(女醫)로 삼아 그 기술을 널리 전하고자 하여 두 여의로 하여금 따라다니게 하였는데 귀금이 숨기고 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귀금을 고문하여 물어보게 하소서.”

 

이는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장인이 자신의 노하우를 쉽게 가르쳐주지 않으려는 습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나라에서 명한 바를 어긴 것이기 때문에 귀금의 혐의는 대단히 중대했다. 더욱이 치통으로 너무나 고통을 받던 성종 아닌가? 성종은 직접 귀금을 불러 조사를 한다.

 

여의 두 사람을 붙여 따라다니게 했는데 네가 숨기고 전해주지 아니하니 반드시 그 이익을 독차지하려고 함이 아니냐? 네가 만약 끝까지 숨긴다면 마땅히 고문을 가하면서 국문(鞫問)하겠으니 다 말하여라!”

 

임금의 친국은 반역죄와 같은 중죄를 저지른 사람을 조사할 때만 행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충치 제거 기술을 숨기려 한 귀금을 친국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그만큼 중죄로 다스릴 수 있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귀금은 기술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제가 일곱 살 때부터 이 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열여섯 살이 되어서야 완성하였는데 지금 제가 마음을 다해 가르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익히지 못할 뿐입니다.”

 

이후 귀금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성종은 귀금의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러나 충치제거술이 제대로 전수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제대로 전수만 됐다면 그의 아들인 중종이 치통으로 고통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종의 경우 중종 245월에 계속해서 치통으로 고통 받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10년 후인 중종 348월에는 그 때문에 선대 임금들의 영정(影幀)을 모시는 중대한 왕실 행사에까지 참여하지 못했다.

 

본래 나에게 치통이 있어서 바람이 차면 문득 재발하는데 요새 일기가 쌀쌀해서 이 병이 다시 도지니 영정을 모시는 일을 행하지 못할 것 같다.”

 

결국 그 행사는 세자가 대신 거행했다. 광해군도 치통을 앓았던 것 같다. 영의정 이덕형이 고향의 아버지를 만나 뵙고 돌아와 광해군에게 문안인사를 하는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삼가 생각하건대 여러 부위의 열이 위에 모여들어 치통이 생겨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치통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발언이다. 물론 현대 의학에서 보자면 다소 황당한 소리이기는 하다. 그리고 광해군의 치통은 충치보다 잇몸의 염증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덕형의 진단이 이러했기 때문에 처방도 요즘 상식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무릇 위에서 생겨난 병은 침으로 쉽사리 효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마음을 맑게 하고 생각을 줄여서 일을 처리함에 있어 잘 조절하여야 상하가 서로 통해 열이 흩어질 것입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업무 스트레스를 줄이고 마음을 편하게 해야 치통이 나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 무렵 어의(御醫)는 바로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이었다. 이 무렵 광해군은 허준에게 침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허준의 침으로도 치통은 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좌의정 이항복이 광해군에게 치통 증세는 어떠하십니까?”라고 묻자 광해군은 이렇게 답한다. “잇몸의 좌우가 모두 부은 기운이 있는데 왼쪽이 더욱 심하다. 한 군데만이 아니라 여기저기 곪는 것처럼 아프고 물을 마시면 산초(山椒)맛이 난다.” 산초란 매운맛이 나는 일종의 약재다.

 

허준도 고치지 못한 고질병 치통을 현종도 앓았다. 현종 1578일 현종은 갑자기 치통이 심해져 가을에 지내야 하는 대제(大祭)를 영의정이 대행하도록 했다.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대우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