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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27)] “선왕의 성은 입은 몸”… 광해군 광기에 맞선 상궁 응희

풍월 사선암 2012. 1. 8. 22:47

[이한우의 朝鮮이야기(27)] “선왕의 성은 입은 몸광해군 광기에 맞선 상궁 응희

 

단순 강도사건이 역모로 비화된 계축옥사 때 인목대비 향하던 칼끝에 희생

선조의 총애 입었다면난처해진 광해군, 국문 대신 엉뚱한 죄목 씌워

 

광해군5(1613) 5월 조선 한양 장안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그러나 너무나도 시시한 데서 시작됐다. 425일 포도대장 한희길이 문경새재를 넘던 은()상인이 살해당하고 은 수백 냥을 탈취당한 사실을 광해군에게 보고했다. 통상 이런 정도의 일이면 죄수를 잡은 후 수사기록을 형조에 넘기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직접 임금에게 보고했다는 것은 이미 사건 초기부터 누군가 개입해 이 사건을 키우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 실록 사관들의 판단이다. 하긴 은 탈취사건 자체는 한 달여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대목은 과연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은 수백 냥을 도적질했냐는 것이었다. 단순 강도나 산적이었다면 임금에게 비밀보고까지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주동자들이 아주 흥미로웠다. 박응서·서양갑·심우영·허홍민·박치의 등이 그들이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모두 명문가 서자(庶子)들이었다.

 

박응서의 경우 정승을 지낸 박순의 첩의 아들이었고 서양갑의 아버지 서익은 오늘날 시장에 해당하는 목사를 지냈고, 심우영의 아버지 심전은 관찰사를 역임했다. 서양갑과 심우영도 첩의 아들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글을 잘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어차피 과거 길은 막혀 있었고 세상을 즐기기로 합의한 이들은 경기도 여주 근처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실록은 그들의 생활은 남들이 볼 때 이상스러울 정도로 사치스러웠다고 적고 있다. 각자 집에서 돈을 들고 오기는 했지만 그것을 한순간에 탕진했다. 때로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벌기도 했지만 그들이 누리던 향락의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들이 택한 방법이 바로 도적질이었다. 실은 이게 전부였다.

 

가장 먼저 체포된 이는 박응서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예조판서를 지낸 광창부원군 이이첨은 정인홍과 함께 대북파를 이끄는 양대 실세 중 한 명이었다. 광해군의 큰 신임을 얻고 있던 그는 차제에 큰 건을 올려 광해군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려는 모략을 꾸민다. 광해군 집권 이후에도 대북파와 광해군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와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을 차제에 제거하는 기회를 삼는 구상을 세운 것이다.

 

이이첨은 포도대장 한희길, 제자 김개 등과 함께 시나리오를 마련했다. 이번 절도사건을 단순 강도가 아닌 거대한 역모(逆謀)로 몰아가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박응서를 설득했다. 김개는 가짜 격문까지 써서 박응서로 하여금 달달 외우게 한 뒤에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리도록 유도했다. 어차피 사형이 불가피했던 터라 혹시라도 목숨을 건질까 하여 박응서도 그들의 시나리오에 동의했다.

 

우리는 천한 도적들이 아니다. 은화(銀貨)를 모아 무사들과 결탁한 다음 반역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명을 재촉하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조정에서는 곧바로 박응서의 동료들에 대한 체포작전에 돌입했다. 얼마 안 돼 모두 체포되었다. 박응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전혀 무관한 친구들의 이름까지 마구 털어놓았다. 사건은 확대일로였다. 문제는 박응서와 나머지 사람들을 대질한 결과 박응서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번 일이 역모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무릎이 으스러지는 압슬형을 가해도, 벌건 인두로 살점을 지지는 낙형을 가해도 이들은 역모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었다. 서양갑의 경우에는 어머니와 누이까지 붙잡혀와서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역모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국 서양갑의 어머니와 형이 고문 끝에 사망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서양갑은 내가 앞으로 온 나라를 뒤흔들어 어머니와 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은 사실과 관계없이 영창대군의 이름을 실토하는 데로 나아갔다. 이후 불똥은 곧바로 인목대비와 그의 아버지 김제남에게로 튀었다.

 

서양갑의 복수심은 이이첨에게 놀아나 엉뚱하게 일을 만든 박응서에게도 향했다. 박응서가 친하게 지냈던 인물들을 가리지 않고 불어버린 것이다. 즉시 서양갑은 철물거리에서 환형(:죄인의 다리를 두 대의 수레에 한쪽씩 묶어서 몸을 두 갈래로 찢어 죽이던 형벌)을 당했다. 56일의 일이다. 그리고 이 날 역모 시 군사지휘권을 맡으려 했다는 모함을 받은 김제남도 붙잡혀와서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박응서와 서양갑이 마구잡이로 이름을 털어놓자 광해군은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였다. 누가 우군이고 누가 적인지 가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음날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보호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은 일곱 신하를 처벌하라는 명을 내린 데서도 그의 불안심리를 읽을 수 있다. 사실 그것은 아버지를 부정하는 행위였다. 또 이번 일은 일곱 신하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이때부터 박응서와 서양갑의 입에서 나온 인물들이 하나 둘 저잣거리에서 사형을 당해 내걸렸다.

 

이제 칼끝은 인목대비를 향하고 있었다. 그 신호탄은 한때 선조를 모셨고 당시에는 대비를 가까이에서 모시던 대비전 상궁 응희(應希)의 체포였다. 518일 응희는 의금부에서 자신을 체포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소주를 마신 다음 후원(後苑)에서 목을 매려다가 내시에게 발각되어 결국 투옥되었다. 응희는 단순한 상궁이 아니라 성은(聖恩)을 입은 상궁이었다.

 

옥 안에서 응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동안 선왕을 모셔온 몸이다. 임진년 난리 때 김빈(金嬪) 등 여섯 명과 함께 늘 대가(大駕) 앞에서 시중을 들었다. 당시의 대신 윤두수???이항복?鵑爰?등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너희들이 어찌 지금 임금의 녹만 먹고 선왕의 녹은 받아먹지 않았겠느냐? 그런데 어찌 나를 이렇게 속박하여 모욕줄 수 있단 말이냐?” 당시 성은의 힘은 이렇게 컸다. 어찌나 민망했던지 당시 이 소리를 듣던 사람은 너나 없이 귀를 가렸다고 한다.

 

광해군 입장에서도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선조의 성은을 입었다면 자신에게는 잠재적인 어머니였다. 그렇다고 응희가 주장하는 대로 정말 선조의 성은을 입었는지 여부를 가릴 방법도 없었다. 응희를 잡아들인 지 6일이 지난 524일 광해군이 내린 전교에 그 같은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참으로 가까이 총애를 받은 일정 수의 후궁(後宮)에 대해서는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만은, 그래도 혹 한두 번 총애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단정하기가 어려운데, 그럴 경우 그대로 국문한다면 의리에 손상됨이 어찌 없겠는가.”

 

고심 끝에 응희에게 가해진 죄목은 선조의 첫 번째 정부인이었던 의인왕후 박씨의 능에 저주를 했다는 혐의였다. 물론 그것은 조작이었다. 결국 이 날 응희는 사약을 받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응희의 죽음을 신호탄으로 대비를 모시던 궁인과 내시도 모두 잡혀들어와 죽거나 모진 고문을 당했고 뒤이어 영창대군을 모시던 궁인과 내시도 비슷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후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가야 했던 영창대군은 그곳에서 8살의 어린 나이에 비극적 최후를 맞았고 인목대비도 서궁으로 유폐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까지 암울한 세월을 보낸 것은 역사책에서 읽은 바다.

 

응희의 경우 일개 상궁이지만 조정의 음모에 정면으로 맞서는 기개를 보여준 당찬 여인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해 둘 만한 인물이다. 사실 광해군의 살기에 내로라하던 정승판서들도 숨죽이지 않을 수 없었던 잔인한 5월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