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朝鮮이야기(19)] 명필 한석봉을 알아본 선조… 최고의 후원자가 되다
“군수 직무 태만·몸가짐 제멋대로”
사헌부의 잇단 파직 건의에도 한 번도 처벌하지 않아
명나라에서 석봉체 최고 인기…
“목마른 말이 냇가로 달려가고 사자가 돌을 내려치는 형세” 호평
떡장수 홀어머니와의 일화로 유명한 조선시대 4대 명필(名筆) 중 한 명인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년 중종38년~1605년 선조38년)의 이름이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선조16년 윤2월 1일자에서다. 관리의 기강을 감찰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사헌부에서 “와서별제(瓦署別提) 한호는 용심(用心)이 거칠고 비루한 데다 몸가짐이나 일 처리하는 것이 이서(吏胥·이방)와 같아, 의관(衣冠)을 갖춘 사람이 그와 동렬(同列)이 되기를 부끄러워하니 체직하소서”라며 상소를 올렸다.
여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을 요한다. 먼저 ‘와서’라는 기관은 공조 소속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기와를 굽던 곳이었다. 별제는 종6품으로 실무자 중에서는 최고위직이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실제로 사헌부가 상소한 대로 한호라는 사람의 됨됨이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다. 또 하나는 명종22년(1567년) 진사시에 급제한 것이 전부인 한호가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만으로 선조가 ‘발탁’하자 중앙관리들이 격(格)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거부감을 표시했을 가능성이다. 특별한 잘못보다는 용심, 비루, 몸가짐 등을 언급한 데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실은 둘 다였다. 그러나 선조는 단호하게 사헌부의 상소를 물리쳤다. 그 자신이 명필의 수준에 이르렀던 선조는 누구보다 한호의 글씨를 아꼈기 때문이다.
진사시에 급제한 후 한호는 사자원(寫字員), 즉 글씨를 쓰는 요원으로 일하면서 명성을 날렸다. 여말선초에는 선비들이 주로 조맹부의 송설체를 즐겨 썼다. 한호, 윤순, 김정희와 함께 흔히 조선 4대 명필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안평대군이 잘 썼던 글씨가 바로 조맹부의 송설체였다. 반면 한호는 조맹부체보다는 왕희지체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 꿈에 왕희지가 글씨를 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왕희지체를 기본으로 하여 자신의 색깔을 가미했다는 평을 듣는다. 그것이 바로 석봉체다.
선조 이상으로 한호의 글씨를 좋아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임진왜란 때 조선을 찾은 명나라 장수와 사신이었다. 특히 명 조정 내의 고위직 인사들이 한호의 글씨를 좋아했기 때문에 조선에 온 장수나 사신은 상납을 위해 한호의 글씨를 구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한호는 명나라에 가는 사신단에 필사요원, 즉 사자관으로 수행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도 글을 많이 남겼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한호가 북경(北京·베이징)에 갈 때 어느 중국 사람 집에서 이백의 시 하나를 흰 벽에 써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24년이 지나고 나서 마침 그 집에 들렀는데 먹 기운이 새것과 같았다. 이는 중국 사람이 한호의 글씨를 매우 소중히 여겨 아끼고 보호했던 까닭이다”라고 적고 있다.
특히 당시 명나라 최고의 문학가였던 왕세정 같은 인물은 한호의 글씨를 보고서 “목마른 말이 냇가로 달려가고 성난 사자가 돌을 내려치는 형세”라고 평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영의정 이항복으로부터 왕세정의 이 같은 극찬을 전해들은 선조의 반응이다.
“모든 일은 다 마음에서 이루어지는데 왕세정의 병통은 진실하지 못한 데가 있다. 한호는 액자(額字·현판에 쓰는 큰 글씨)는 잘 쓰지만 초서와 예서는 그의 특장이 아니다. 아마 왕세정이 그렇게 말했다면 다른 뜻이 있어서일 게다.”
실제로 한호는 초서나 예서보다는 실용서체인 해서나 행서 등에 능했다. 한호의 장단점을 선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대 첫손 꼽히는 명나라 문인이 극찬을 했다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보내는 외교문서를 석봉체로 써 달라고 요구할 만큼 한호의 글씨를 아끼는 사람이 많았다.
◀ 한석봉 금강산 기행 서첩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한호를 가평군수로 임명했다
. 경치 좋은 곳에서 맘껏 글씨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서였다. 대신 한호는 관리로서 재능은 없었던 듯하다. 사헌부에서는 연일 한호가 수령으로서 직무를 태만히 하는 바람에 백성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며 그를 파직할 것을 건의했다. 선조는 조사해볼 것을 명하면서도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았다.
선조의 한호에 대한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선조37년(1604년) 3월 대마도 도주가 편액을 요청하자 예조에서는 당시 흡곡현령으로 있던 한호에게 쓰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선조에게 물었다. 이에 대한 선조의 답이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쓸 수 있겠는가? 서울에 있는 아무나 보고 쓰도록 해서 보내주어라.” 대명외교문서에만 한호의 글씨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선조로서는 아직 강화(講和)도 맺지 않은 대마도 도주에게 글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이 무렵 선조는 임진왜란 때 자신을 의주까지 호종했던 호종공신과 왜적을 맞아 전공(戰功)을 세웠던 선무공신을 책봉했다. 공신도감에서는 공신의 등급을 정하고 이들에게 일종의 인증서인 교서(敎書)를 내렸다. 당연히 한호는 교서를 쓰는 일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한호는 빼어난 글씨와 달리 행실에는 실제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때도 사헌부에서 한호를 파직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교서를 쓰기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는가 하면 일부러 글씨를 잘못 쓰는 등 일종의 태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역시 선조의 답변은 단호했다.
“한호가 글씨를 쓰기 싫어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고의로 오서까지 했다는 것은 더욱 이해가 안 간다. 이번에 교서를 한호 혼자 쓰게 했어도 한 번에 쓸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아마도 잘못 전해진 것일 듯싶다.”
이후 일종의 공신증이라고 할 수 있는 녹권을 쓰는 일에도 한호는 동원되었는데 이 때도 한호는 천재로서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가 다시 사헌부의 탄핵을 받는다. 결국 한호는 흡곡현령에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조는 공신 녹권을 쓰느라 고생한 인물들에게 어린 말 한 필씩을 포상으로 내리는데 거기에 한호의 이름도 포함돼 있었다.
한호는 이런 논란이 있은 다음해 1605년(선조38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난 1606년 8월 6일 선조는 명나라 사신을 한양에서 의주까지 접대하는 원접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대제학 유근을 위로차 불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한호에 대해 언급한다. 당시 대제학이 원접사를 맡은 이유는 조선을 찾는 사신 중에는 시를 좋아하는 인물이 많아 이 쪽에서도 시문에 능한 사람을 뽑아서 보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선조가 묻는다. “사신이 한양에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유람할 때 우리 재상이 지은 시는 모두 직접 지은 것인가?” 이에 유근은 직접 지은 것도 있고 자신이 대신 지어준 것도 있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선조는 “우리나라 사람은 글씨 획이 매우 약하고 중국은 필력이 강하다. 우리나라에서 글씨에 능통한 사람으로는 한호만한 사람이 없었으나 그도 미진한 점이 많았다.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은 작은 부채에 난정기(蘭亭記)를 썼는데 작은 글씨가 매우 정묘하였다. 우리나라의 글씨에 능통한 자라도 어찌 그에 미치겠는가?”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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