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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18)] 세종 때 간 큰 궁녀 ‘장미’…궐 밖에서 왕족과 스캔들

풍월 사선암 2012. 1. 8. 22:08

[이한우의 朝鮮이야기(18)] 세종 때 간 큰 궁녀 장미궐 밖에서 왕족과 스캔들

 

병을 핑계로 나가 왕실 사람과 함께 놀고 마시며 유숙결국 참형당해

태종이 조심성 없다며 안마 나무라자 분풀이로 마구 두드리는 당돌함도 보여

 

조선시대 궁녀는 일단 한번 궁궐에 들어오면 죽어서야 궐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중병이 들거나 늙으면 출궁되었고 나라에 큰 환란이 있으면 궁녀를 대거 궐 밖으로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게다가 나가서 결혼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유는 만의 하나 다른 씨가 섞일 것을 우려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 때 아주 당돌한 시녀가 있었다. 외모도 그만큼 아름다웠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름은 장미(薔薇)였다. 장미의 당돌함은 그 무시무시한 태종에게 앙탈을 부린 데서 일찍부터 드러났다.

 

세종 즉위년(1418) 12월 상왕 태종이 왕위를 물려주고 수강궁에 머물 때였다. 이런저런 걱정으로 자정이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던 태종은 시녀 장미를 불러서 무릎 안마를 시켰다. 그런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태종은 장미를 약간 나무란 다음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후 조심성 없이 두드리는 안마에 태종은 잠을 깼다. 화가 난 태종은 장미를 다그쳤고 마침내 장미는 꾸지람을 들어 분이 안풀려 마구 두드렸다고 답했다. 이에 태종은 창피하기도 해서 소문을 내지 않고 조용히 출궁조치를 시켰다. 사실 이 정도되면 목숨을 지킨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런데 장미는 수완이 좋은 여인이었던 것 같다. 다시 궁궐에 들어와 명빈궁의 시녀로 일하고 있었다. 세종849일의 일이다. 이때 수강궁의 내시인 임장수가 임금의 지시라고 거짓말을 해서 장미를 궐 밖으로 내보냈다가 참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감형되어 겨우 목숨은 구했다. 이를 보더라도 장미는 궁궐 내 핵심인사를 구워삶는 기술이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세종9720일에는 명나라 황제의 요구에 따라 공녀(貢女) 7명을 북경(北京·베이징)으로 보내게 되는데 이들을 시중할 여사(女使) 16명 중에도 장미라는 이름이 보인다. 시녀 중에서 보냈을 것이므로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명나라까지 보고 왔으니 거칠 게 없었는지 마침내 장미는 대형 스캔들을 터뜨린다. 세종17514일 머리끝까지 화가 난 세종은 도승지 신인손과 좌승지 정갑손에게 명을 내려 장미와 관련된 스캔들을 의금부에서 조사토록 하고 정갑손도 함께 조사에 참여토록 했다. 다른 경로를 통해 세종이 입수한 사건의 개요는 이랬다.

 

시녀 장미가 병이 났다고 하여 궐 밖에 나갔다. 신의군(愼宜君) 이인(李仁)이 함께 살고 있는 조모의 집으로 초청하여 혹 여러 날을 유숙하고, 여러 아우와 함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장미를 청하여 모여 마셨다. 또 그의 매부 김경재(金敬哉)를 끌어 와서 함께 놀았다. 김경재도 동서와 처남들을 불러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장미를 청하여 모여 마시고 놀았다.’

 

5일간의 조사가 끝났다. 궁녀를 데리고 놀았다는 것은 임금과 같은 지위에 있으려 한 것이기 때문에 역모(逆謀)에 준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 의금부에서는 이인의 할머니인 최씨를 포함한 모든 관련자에 대해 참형을 건의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인을 폐서인하여 변방으로 내치고 나머지 사람도 사형에서 감형하여 유배를 보낼 것을 명했다. 다만 할머니 최씨는 특별히 용서해주었다. 아마도 이때 장미도 목숨은 구했던 것 같다. 이후 신하들은 연일 이인과 김경재 등을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그렇게 되면 익안대군의 제사는 누가 지낼 수 있냐며 이인의 목숨만은 살려두었다. 익안대군이란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이방의로 세종에게는 큰 아버지였다.

 

10년 후인 세종261월 이 사건은 다시 조정의 쟁점으로 떠오른다. 평안도 여연에서 왕족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평민이 되어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이인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새로운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김경재가 시녀 장미와 가까이 지내면서 때로는 잔치를 베풀어 즐기며 마시고 유숙(留宿)하기도 하며, 때로는 서로 물건을 주고받기도 하고, 높은 산에 올라 소풍도 하여 아니하는 바가 없었으니, 실은 내가 범죄한 것이 아닌데, 전일 국문할 때에 겁이 나서 넋을 잃었고, 또는 처남 매부 사이의 화목하는 의리로 인하여 사실대로 진술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여 마지 않습니다. 청하건대, 다시 김경재와 대질하여서 명백한 것을 가려 주소서.”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여간 중대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김경재로서는 목이 열 번은 날아가고도 남음이 있는 중죄였다. 대궐을 잠시 나온 궁녀와 놀아난 것도 큰 죄인 데다가 왕실 사람을 주범으로 얽어 넣고 자신은 종범이 되어 살짝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관찰사의 이같은 보고가 올라오자 세종은 즉각 의금부에 재조사를 명했다.

 

최초의 재조사 결과가 나온 것은 34일이었다. 재조사 결과 이인의 말은 사실로 밝혀졌다. 김경재도 장미가 혼자서 내 집에 와서 잤다고 했고 장미도 김경재의 집에 가서 잤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쟁점은 김경재가 장미의 집에 가서 잤느냐의 여부였다. 관련자들은 모두 그렇다고 했지만 김경재와 장미 모두 그같은 사실은 없었다고 부인했다. 그렇게 될 경우 죄질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두 사람 모두 부인으로 일관하면서 재조사는 한 달 이상 걸렸던 것 같다. 그러고도 두 달 가까이 의금부의 추가조사가 이어졌다.

 

58일 의금부는 최종조사 결과와 형량을 올렸다. 그에 따르면 이인·김경재 및 김경재의 동서와 처남들은 모두 참형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사이, 즉 최초로 이인·김경재 사건이 터진 후 재조사가 이뤄지기까지 그 10년 사이에도 장미가 또 다른 남자와 어울려지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아마 그때도 병을 핑계로 일종의 보석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인과 김경재는 사형에서 감형되어 이인은 다시 평안도 여연으로 귀양을 가야 했고 김경재는 무창의 관노로 전락했다. 장미는 참형을 선고받았다.

 

당장 사헌부와 사간원이 들고일어났다. 장미는 참형에 처하면서 이인과 김경재를 살려두는 것은 법의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심지어 525일에는 영의정 황희까지 나서 사헌부와 사간원을 거들었다.

 

그런데 일이 엉뚱한 쪽으로 튀게 된다. 세종은 이인과 김경재는 그대로 두면서 장미의 경우에는 연좌제 적용까지 명한 것이다. 이유인즉 출가한 경우에는 부모가 연좌되지 않지만 장미는 일찍이 궁궐에 들어왔고 그 집으로 돌아가 있다가 이번 일을 당했으니 부모도 연좌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장미의 부모는 재산을 완전히 몰수당하고 아버지는 먼 곳으로 귀양을 가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모두 관노로 배속되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바로 다음날 사헌부 대사헌 권맹손과 사간원 지사 모순이 나서 다시 한 번 그렇게 될 경우 주범은 이인과 김경재 두 사람인데 종범 격인 장미만 죽게 되는 것 아니냐며 이인과 김경재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세종을 몰아세웠다.

 

이인을 태조의 후손이라고 용서하느냐는 직격탄까지 날렸다. 그에 대한 세종의 답은 이렇다. “장미가 사형에 처해지는 것은 병을 가장해 자기 집으로 돌아간 때문이지 두 사람과 관계를 맺은 때문은 아니다.” 결국 사흘 후 장미는 참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성군이라는 세종 때에도 이런 잔혹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