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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8)] 세조, 금강산으로 불심(佛心) 유람을 떠나다

풍월 사선암 2012. 1. 8. 12:48

[이한우의 朝鮮이야기(8)] 세조, 금강산으로 불심(佛心) 유람을 떠나다

 

1466년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해유학자에게 불경 내용 물어봐

장안사와 표훈사에서 시주하고 법회 열어간경도감 설치해 불경 간행도

 

조선 국왕 27명 중에서 숭불(崇佛)했거나 숭불한다는 이유로 유학을 신봉하는 신하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됐던 임금은 태조세종세조 그리고 명종 정도다. 특히 세조의 불교 신앙은 유난스러웠다. 흥미롭게도 이들 4명의 국왕은 모두 금강산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그것은 금강산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조선시대의 금강산은 그 자체가 바로 불교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풍악산개골산 어쩌고 하는 것은 다 산세나 외관을 염두에 둔 이름이지만 금강산은 말 그대로 금강(金剛)의 산이다.

 

금강이란 불교에서 불변의 진리이다. 다이아몬드 같은 견고한 부처의 가르침을 뜻한다. 특히 금강산은 화엄경에서 이야기하는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12000여 무리를 거느리고 사는 이상향에서 온 것이다. 12000봉도 실제 봉우리가 12000개여서가 아니라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한마디로 금강산은 곧 불국토(佛國土).

 

그래서일까? 성리학의 나라 조선시대 내내 금강산은 이단(異端)의 세계였다. 율곡 이이가 젊은 시절 금강산에 체류했던 이력 때문에 내내 이단에 물들었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어쩌면 금강은 꽉 짜인 성리학 체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사상의 도피처였는지 모른다.

   

아마 조선 국왕 27명 중에 금강산을 가장 많이 찾은 이는 태조 이성계일 것이다. 이성계가 재위 당시 금강산을 찾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금강산과 오대산의 절에 쌀 600석 등의 시주를 했다. 그리고 아들 이방원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인생무상을 달래기 위해 이성계는 여러 차례 금강산을 찾았다. 세종도 깊은 불심을 갖고 있었지만 금강산을 찾은 적은 없다. 명종의 경우에는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문정왕후 곁에는 보우라는 중이 있었는데 보우가 바로 금강산에서 나온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세조는 독보적이다. 독실한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유일하게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금강산 순행(巡行)을 감행한 임금이기 때문이다. 사실 유학자들에 둘러싸인 조선 조정에서 임금이 금강산을 둘러본다는 것은 엄청난 정치적 모험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조는 신하들의 불만을 일거에 제압하고 금강산 유람에 나선다. 이미 그 자신이 직접 능엄경(楞嚴經)’을 번역하고 간경도감을 설치해 각종 불경 간행사업을 진두지휘했던 세조다.

 

집권 12년을 맞아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던 1466316일 세조는 강원도 고성의 온천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선다. 부인인 정희왕후 윤씨와 세자인 둘째 아들(훗날의 예종)을 비롯해 친동생인 영응대군 이염과 이복형제인 밀성군 이침 등 종친과 영의정 신숙주, 좌의정 구치관 등 핵심 관리가 모두 행차를 수행했다. 한양 도성을 떠난 대가(大駕)가 이 날 양주에 이르니 경기도 관찰사 윤자와 절도사 김겸광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세조는 이 날 포천에서 1박을 한다.

 

다음날 대가는 철원을 향한다. 이어 사흘째인 318일 세조 일행은 김화의 소리천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며칠 사이에 환관들의 각종 횡포가 두드러진다. 아마도 궁궐 내부에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던 그들의 무소불위(無所不爲)한 권력이 대가 행차 때 적나라하게 표출된 때문으로 보인다. 환관의 권한이 컸다는 것은 세조의 권력이 그만큼 강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화에 도착하던 날 송중을 비롯한 7~8명의 환관이 시녀들이 늘어서 있는 곳을 난잡하게 출입하다가 세조의 명으로 의금부의 국문을 받게 된다. 다음날인 319일 대가는 금성의 궁천이란 곳에 머물게 되는데 이 날도 세조는 의금부에 명하여 왕명을 전하는 내시인 승전환관 안중경에게 태() 30대의 형을 내렸다. 또 같은 날에는 환관 이득수가 세조의 말 고삐를 담당한 견마배를 마음대로 매질하다가 의금부의 국문을 당한다. 음지에만 있던 환관들이 세조의 권세만 믿고 설치다가 연일 곤욕을 치른 것이다.

 

한양을 떠난 지 나흘 만인 320일 대가는 금강산 초입(말휘리)에 도착했다. 이제 세조와 함께 금강산 유람에 나서 보자.

 

◀ 표훈사

먼저 장안사에서 하루를 묵은 세조 일행은 321일 정양사를 구경하고 표훈사로 간다. 불교 신자답게 세조는 이 날 표훈사에 도착해 간경도감으로 하여금 각종 잡귀를 공양하는 법회인 수륙재를 베풀도록 명하고 금강산 주요 사찰에 시주하도록 호조에 명했다.

 

내금강 일부를 돌아본 세조는 다음날 금강산에서 나와 서북 방향인 회양군 화천리로 향했다. 시계 방향으로 빙 돌아서 고성의 온정(지금의 온정리)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대가는 324일 통천을 거쳐 25일 마침내 목적지인 고성 온정의 행궁에 도착했다. 이 날 의금부에 구금돼 있던 환관 이득수의 석방을 명한다.

 

임금이 욕실에 나아갔다.” 326일 실록의 기록이다. 정확히 열흘 만에 세조는 온천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세조의 온정 체류가 길어지고 있었다. 열흘 후인 윤36일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유점사를 찾았다. 다음날 세조는 정효상어효첨유진 3인을 불러 능엄경을 논해 볼 것을 명했다. 유학자에게 불경이라니? 정효상은 제대로 외우고 있어 무사히 넘어간 반면 어효첨과 유진은 어물거리다가 장30대를 맞았다. 두 사람은 업무에 바빠서라고 변명했지만 세조는 다시 의금부에 장30대를 더 치도록 명했다.

 

세조는 신하들을 깔보고 있었다. 유학자로서 불경은 공부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 될 것을 당당하지 못하게 둘러대기만 한다고 본 것이었다. 다음날 두 사람을 석방하면서 동시에 파직시켰다. “너희들이 만약 부처를 섬기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임금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고 간하여 내가 고쳐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 너희들의 직책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외면으로는 복종하면서 마음으로는 그르게 여기느냐!”

 

311일 세조 일행은 동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간성의 명파역에 머물렀다. 갈 때와는 다른 귀경길을 택한 것이다. 이틀 후 대가는 속초 바로 아래 낙산사에 이른다. 세조는 요즘 식으로 말해 불교 성지 투어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세조 일행은 강릉에 도착한다.

 

하루를 강릉에서 보낸 대가는 윤316일 대관령을 넘어 오대산 입구에 이르렀다. 다음날 세조는 자신이 눈으로 확인한 강원도의 험준함과 백성의 어려움을 지적하면서 장차 강원도의 인구를 늘리고 백성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방안을 각자 진술토록 하라고 신하들에게 명한다. 이번 거둥(擧動)은 불교 성지 투어이자 민심 탐방 순행(巡行)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세조 일행은 상원사를 찾았다.

 

317일 거화를 거쳐 윤318일 대가는 횡성의 실미원에 도착했다. 요즘이야 고속도로가 있지만 당시에는 험준한 산길이었다. 이어 다음날에는 원주의 사기막동에 이른다. 길 떠난 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났다. 한양에서 사람을 보내 문안 인사를 올려왔다. 한양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음날에는 강원도 관찰사 이윤인이 하직 인사를 올렸다.

 

322일 대가가 지금의 양평인 양근군에 들어섰다. 세조는 수종했던 강순 등을 먼저 한양으로 보내 아차산에서 자신을 마중하는 행사를 준비토록 명했다. 다음날 묘적산에서 사냥 구경을 하고 평구역에서 잠을 잤다. 묘적산이나 평구역 모두 지금의 양주 팔당 근처로 한양 가까이에 왔다.

 

324일 마침내 40일 가까운 세조의 동순(東巡)’이 끝났다. 아차산에서 성대한 행사를 마친 대가는 충량포(현재의 중랑천)를 거쳐 흥인문(현재의 동대문)에 들어섰다.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 단 한 차례뿐인 재위 국왕의 금강산 순행은 이렇게 끝났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