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朝鮮이야기(10)] 선정 펼친 왕일수록 신하의 대안에 귀 기울여
세종·세조 때는 오랑캐 침입,
숙종 때는 과거시험 유출 사건 처리 위해 왕과 신하가 논의
상책(上策)ㆍ중책(中策)ㆍ하책(下策)으로 3단계 대책 세워
당시 상황을 고려해 문제 해결
고대 중국 전한(前漢)시대 때 복생(伏生)이라는 사람이 저술했다고 하는 역사서 ‘상서대전(尙書大傳)’에는 ‘“古者, 天子必有四, 前曰疑, 後曰丞, 左曰輔, 右曰弼(고자, 천자필유사, 전왈의, 후왈승, 좌왈보, 우왈필)’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번역하자면 ‘옛날 황제에게는 네 가지 기능이 반드시 필요했다. 앞은 의(疑), 뒤는 승(丞), 좌는 보(輔), 우는 필(弼)이다’이다. 고려 때 승상(丞相)이라 하고 조선 초에 정승(政丞)이라고 하는 말에 승(丞)의 잔재가 남아 있고 지금도 보(輔)와 필(弼)을 합쳐 보필(輔弼)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의(疑)는 의심이라는 뜻보다는 이리저리 살피고 헤아려 본다는 뜻으로 봐야 할 것이다. 승(丞)은 원래 돕다, 받들다의 뜻이 있다. 보(輔)나 필(弼)도 돕다의 뜻을 갖고 있다.
이 같은 의승보필(疑丞輔弼)의 중요성을 강조한 조선의 학자이자 정치가는 다름 아닌 퇴계 이황이다. 이황은 선조가 즉위한 직후 성리학적 제왕학을 익히고 실천하기를 바라는 바람을 담아 ‘성학십도(聖學十道)’라는 책을 지어올렸다. 한마디로 성리학의 기본이념과 철학을 열 개의 그림으로 요약 정리하여 올린 책이다. 그 책을 지어 올리는 이유를 담은 서문에서 이황은 ‘前有疑 後有丞 左有輔 右有弼(전유의 후유승 좌유보 우유필)’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노(老)학자가 17세 소년 국왕에게 바친 충정(衷情)이었다.
아마도 의(疑)는 임금의 스승을 정하여 늘 현실과 학문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세계와 인간에 관한 국왕의 이해를 넓히는 일과 관련된 것 같다. 일단 국왕이 자신의 방향을 정하고 나면 승(丞)은 뒤에서 최선을 다해 밀어야 했다. 오늘날의 총리나 부총리에 해당하는 승상이나 정승에 ‘승(丞)’자가 포함된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보(輔)나 필(弼)은 특히 간하는 임무를 맡은 사헌부나 사간원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국가 지도자의 성패(成敗)를 판가름할 때 우리 조상은 ‘의승보필’이 제대로 작동했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 국민이 직접 대통령이나 총리를 뽑는 민주정 시대라고 하지만 ‘의승보필의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 점에서 보필의 올바른 방법과 관련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우리 조상이 즐겨 사용했던 상책(上策)·중책(中策)·하책(下策)의 3단계 대안 제시법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하들이 어떤 국정 문제에 대한 진단을 제시할 때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3가지 가능한 대안을 단계적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에는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라는 식의 저속화된 용법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 상책·중책·하책의 대안제시법이 주로 활용된 분야는 국방이었다. 세종 15년 2월 15일 세종은 북방의 파저강 오랑캐를 토벌하는 문제를 의정부와 육조 관리와 논의한다. 이 자리에서 공조 우참판 이긍(李兢)은 “군사를 보내서 오랑캐들이 굴복하거든 대의(大義)로써 꾸짖고 군사를 돌이켜 돌아오는 것이 상책, 군사를 보냈을 때 오랑캐들이 놀라서 숲 속으로 숨더라도 끝까지 쫓지 말고 가볍게 토벌하고 돌아오는 것이 중책, 그들과 끝까지 대결하여 승부를 겨루는 것이 하책입니다”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상책이 반드시 최선의 방법을 뜻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긍은 “저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중책에서 답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당시 상황을 고려해 절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세종 18년 윤6월 18일에는 4품 이상 관리로부터 외적(外敵)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써서 올리도록 명했는데 그때 올라온 글 중 하나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오랑캐를 막는 방책으로는 강토를 신중히 굳게 지켜 적으로 하여금 침입, 모만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요, 침입해 오는 것을 기다려서 싸움에 이기고 적을 죽이는 것이 중책이며, 군사를 일으켜 적지 깊이 들어가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경로를 밟는 것은 부득이한 데서 나오는 것으로서 하책입니다.” 이 말과 이긍의 말을 연결해서 생각한다면 적진으로 군사를 몰고 가서 끝까지 승부를 겨루는 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 되는 셈이다.
상·중·하책은 신하가 국왕에게 건의할 때만 사용하던 대안제시법이 아니었다. 늘 신하를 가르치려 했던 세조는 신하에게 명령을 내릴 때 그것을 사용했다. 세조 7년 4월 10일 함경도 방어를 위해 임지로 떠나는 함길도 도체찰사 구치관에게 준 어찰(御札)에서 세조는 이렇게 당부한다.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상책이요, 빨리 움직여서 위엄(威嚴)으로 이기는 것이 중책이요, 이긴다고 믿고서 방비하지 않는 것이 하책이다.”
이듬해인 세조 8년 세조는 직접 병법서를 지은 적이 있는데 그 중에 장수의 덕목과 관련해서도 ‘상·중·하책’을 이야기한다. 오늘날로 보자면 대통령학이나 리더십론이 될 수 있는 대목이다.
“칭찬을 듣고도 기뻐하지 아니하고, 욕을 먹어도 노하지 아니하고, 두루 아랫사람에게 자문하여 유화(柔和)로써 일을 처리하는 것이 상책이요, 지혜를 쌓았으면서도 지혜를 구하고, 재주를 온축(蘊蓄)하였으면서도 재주를 구하고, 과감히 결단하고, 능력있는 이를 임명하여서 강력히 일을 추진하는 것이 중책이요, 하늘을 우러러보고도 고개를 숙이지 아니하고, 어진이를 보고도 공경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마음대로 독판(獨辦)하여 망령되게 일을 망치는 것이 하책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그 글을 끝맺고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 상책(上策)을 얻으면 그 임금을 요순(堯舜)과 같이 만들 것이요, 그 중책(中策)을 얻으면 백성을 편안히 하고 적을 제어할 것이요, 그 하책(下策)을 얻으면 집안을 망치고 나라를 망칠 것이니 신중하게 아니할 수 있겠는가?”
‘상·중·하책’은 국방 이외에 내치를 논할 때도 원용되었다. 숙종 3년 10월 22일 어린 숙종은 과거시험에서 문제가 유출된 사건에 대해 대신과 논의를 한다. 오늘날 식으로 하자면 사법시험 2차 주관식 문제가 유출된 것인데 아예 1차 때부터 무효로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실시할 것인지 아니면 2차 시험만 다시 치를 것인지를 놓고 신하 사이에도 격론이 벌어졌다.
이때 대사헌 윤휴가 나서 일체의 방(榜)을 전부 파하는 것을 상책으로 하고, 다시 증광시를 실시하는 것을 중책으로 하고, 단지 유생의 정시만 실시하는 것을 하책으로 하였다. 요즘식으로 풀어서 말하자면 사법고시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실시된 입법 행정고시 합격까지 모두 취소하는 것을 상책으로 내놓았고 사법고시만을 다시 실시하는 것을 중책, 사법고시 2차시험만을 다시 실시하는 것을 하책이라고 했다. 상당히 과격한 처방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윤휴의 처방은 채택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상·중·하책’을 바탕으로 한 건의나 지시가 10여차례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처방이 세종 3건, 세조 3건, 성종 1건, 중종 1건, 선조 3건, 숙종 2건, 영조 1건 등으로 비교적 좋은 정치를 펼친 것으로 평가받는 국왕에게서만 나온다. 신하의 바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은 국왕은 3개의 대안 제시법은커녕 1개도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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