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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1)] 4개 국어 능통한 설장수, 명나라에 조선을 적극 알리다

풍월 사선암 2012. 1. 8. 11:02

[이한우의 朝鮮이야기(1)] 4개 국어 능통한 설장수, 명나라에 조선을 적극 알리다

 

19958월 중국 고대문화의 보고(寶庫)라는 돈황과 투루판(吐魯番) 일대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특히 타클라마칸 사막과 톈산(天山)산맥 사이에 있는 오아시스의 도시 투루판과 그 일대의 유적지에 대한 기억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그곳이 중국 땅이라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도심 군데군데서 볼 수 있는 淸眞寺(청진사)’라는 한문 간판뿐이었다. 그나마 청진사라는 것도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중국식으로 의역해서 부르는 명칭이었다. 나머지 풍경, 즉 모래바람이 날리는 사막에 직육면체 모양의 흰색 집들, 시장에서 파는 초승달 모양의 단검, 동북아보다는 중동 사람의 외모를 한 위구르인 등은 영락 없는 이슬람 문화권이었다.

 

투루판 고성

 

투루판에서 모래먼지를 가르며 남동쪽으로 한 시간 반 가량을 달려가면 고창고성(高昌故城)이라는, 말 그대로 고색창연한 유적지가 나온다. 640년 당나라에 망한 고창국의 궁정 유적이라고 하는데 황토벽돌로 지은 때문인지 마치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았다가 아무렇게나 뭉개버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창국을 점령한 당나라는 그곳에 서주를 설치했고 식민지를 건설했다. 자치국으로 명맥을 유지해오던 고창국은 결국 1275년 국왕 화적합이가 몽골군에 의해 전사한 후 원나라에 복속되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한 위구르인이 있었다. 위구르를 한자로는 회골(回骨) 혹은 회흘(回紇)이라고도 쓴다. 실록에 나오는 회회인(回回人)도 바로 위구르 사람을 말한다. 이 위구르인은 나라가 망하자 원나라 수도 북경(베이징)으로 이주했다. 그의 증손자 설손은 마침내 원나라 순제 때 고위관직에까지 올랐다.

   

아버지 설손은 공민왕의 친구

 

설손은 당시 북경에 와 있던 고려 왕자(훗날 공민왕)와 가깝게 지냈다. 설손은 황태자의 교육 기관인 단본당(端本堂) 정자(正字)라는 관직을 맡고 있었고 고려 왕자는 황태자의 시종을 맡고 있을 때였다. 세월이 한참 흘러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정세가 불안해지자 설손은 아들 5명을 데리고 공민왕을 찾아 고려로 귀화했다. 그때가 공민왕 7(1358)이다. 공민왕은 옛 친구 설손을 고창백(高昌伯)으로 봉하고 봉토를 하사하는 등 크게 우대했다.

 

조금 길었지만 여기까지가 서론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설장수는 설손의 다섯 아들 중 장남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왔을 때 설장수의 나이는 열일곱 살. 그는 이미 위구르말, 중국말, 몽골말에 능통했다. 어학감각이 뛰어났고 아버지의 학문적 자질까지 이어받은 설장수는 고려에 온 지 불과 4년 만인 1362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쯤엔 고려말도 벌써 정통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외국어의 달인 설장수는 주로 외교 분야에서 활약했다. 당시 대륙은 원에서 명으로 권력이 넘어가던 혼란기였기 때문에 몽골말, 중국말에 두루 능한 설장수에게는 독무대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외교사를 쓴다면 그는 당연히 첫머리를 장식할 인물이다. 통역이 필요 없는 외교관이기도 했다.

 

1387년 고려 우왕 13, 마흔일곱의 문하부 지사 설장수는 사신으로 파견돼 명나라 관복을 습용(襲用)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온다. 지금의 자주(自主)세상에서 보자면 사대(事大)라 하여 무시해버릴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로서 명()의 관복을 습용키로 했다는 것은 명나라의 공식승인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TV 역사드라마를 만들 때 우왕 13년을 기점으로 관복의 색상이나 모양이 달라져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제대로 된 한국 의복사(衣服史)’를 쓴다면 거기서도 설장수라는 이름 석자를 발견하게 되는 게 정상이다.

 

조선 초 대명외교의 개척자

 

고려의 외교관으로서 설장수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명나라를 세운 태조 주원장은 한반도의 철령 이북 땅은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기 때문에 자기 나라에 귀속시키겠다는 심사로 병참기지화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주원장의 이 구상을 맨 먼저 알아내 고려 조정에 전한 이가 바로 설장수다. 그 바람에 고려 조정에서는 최영 장군에 의한 요동정벌론이 급속하게 확산되었고 결국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일단 마무리되었다.

 

아마도 이 무렵부터 설장수는 신흥세력의 지도자 이성계와 밀접한 친분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국가건설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이성계라면 설장수 같은 탁월한 외교관의 장래 용도를 생각지 않았을 리 없다.

 

1389년 우왕에 이은 창왕을 내몰기 위해 이성계는 흥국사 회의를 요청했다. 이 비밀회의에는 장차 ‘9공신(功臣)’으로 불리게 되는 9명의 핵심인사가 참여하는데 이성계, 정몽주, 조준, 정도전 등의 이름과 함께 설장수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했다. 더불어 설장수도 문하찬성사로 특진했다. 문하찬성사란 조선시대로 이야기하자면 의정부 찬성으로 3정승 바로 아래의 종1품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그런데 ‘9공신에는 정몽주 같은 고려 혁신론자들과 정도전 같은 새 왕조 창건론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설장수는 정몽주 쪽이었다. 3년 후 정몽주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 의해 피살 당하고 새 왕조 창건론자들이 조선 건국을 추진하면서 설장수는 하루 아침에 역적으로 내몰린다. 역사의 물결에 휘말리고 있었다.

 

정도전과의 갈등

 

51세의 설장수는 생사(生死)의 기로에 섰다. 그에게 삶의 길을 열어준 사람은 이성계였다. 정도전은 평소 감정이 쌓였던 우현보와 설장수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즉위교서에서 명시적으로 우현보, 이색, 설장수는 목숨은 살려두고자 하니 직첩을 회수하고 서인으로 삼아 해상으로 옮겨 종신토록 관직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설장수와 정도전의 악연은 더욱 깊어진다. 유배 5개월 만에 태조 이성계는 설장수 등을 풀어주었고 다시 한 달도 안돼 검교 문하시중으로 관직에 복귀했다. 검교(檢校)란 일종의 명예직이란 뜻이다. 문하시중이 영의정에 해당하는 것이니 명예 영의정이 된 것이다. 그것은 당시 복잡하게 뒤엉켜 돌아가고 있던 대명외교를 푸는 데 설장수만한 인물이 없다는 이성계의 판단 때문이었다. 게다가 설장수는 태조 31119일 오늘날의 동시통역대학원 및 외교안보연구원의 기능을 합친 사역원(司譯院)’ 창설의 총책임자로 사역원의 시험, 선발방법 및 교육방안 등에 관한 마스터플랜을 만들어 올렸다.

 

이후 정도전은 명나라로부터 요동정벌론의 주창자로 의심을 받아 압송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정도전은 한사코 병을 이유로 명나라행을 거부했다. 결국 태조 64월 이성계는 권근과 설장수를 대신 보내 사정을 설명토록 명한다. 설장수가 대성공을 거두고 돌아오자 이성계는 마치 정도전이 들으라는 듯이 설장수에게 이렇게 치하했다. “천자가 진노하였을 때 자청하여 천자의 화를 풀리게 하였으니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직후 명나라에 사정을 설명하고 정종의 즉위를 허락한다는 외교적 승인을 받아온 이도 설장수다. 실록만으로 보면 그는 총 8차례에 걸쳐 명나라를 다녀왔다. 한번 가면 6개월은 족히 걸리던 시절의 이야기다.

 

설장수의 이름을 지금처럼 망각의 강에 내버려두는 것은 조선 건국사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외교사, 의복사, 통역사의 거인을 지워버리는 행위다. 설장수의 이름을 기억하려면 그가 쓴 직해소학(直解小學)’이 조선 초 최고의 중국어 어학교재였다는 사실도 함께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직해소학이란 말 그대로 소학을 당시의 중국어로 알기 쉽게 풀어쓴 책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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