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우리음악

세상을 바꾼 노래 신중현'아름다운 강산'

풍월 사선암 2011. 9. 11. 13:59

 

세상을 바꾼 노래

 

한국 대중음악사에 뚜렷한 의미를 각인한 노래들을 매주 2회씩 연재한다. 혹자는 '세상을 바꾼 노래'란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신중현과 더 멘 '아름다운 강산' (1972)

신중현의 사이키델릭이 창조해낸 신세계

 

 

일반적으로, 신중현의 최고 작품을 꼽을 땐 신중현과 엽전들의 첫 번째 앨범(1974)과 신중현과 뮤직파워의 첫 번째 앨범(1980)이 거론되곤 한다. 그 앨범들의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신중현의 최고작들은 1970년대 초반에 말 그대로 '쏟아진' 작품들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사이키델릭과 소울에 심취해있던 그가 만든 일련의 작품들, 그러니까 김정미와 김추자 같은 여성 가수들의 앨범부터 더 멘과 같은 밴드 음악까지 그의 창작력과 에너지는 음악 형태를 가리지 않고 이미 어떤 경지에 올라있는 듯했다. 심지어 당시 서유석과 양희은 같은 (신중현의 음악과는 거리가 먼 듯한) 포크 가수들과의 작업에서도 '신중현'이라는 고유명사를 새겨 넣으며 사이키델릭 포크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름다운 강산'은 바로 그때, 신중현의 창작력이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을 때 만들어진 시대의 명곡이다. 이 노래는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이선희의 버전과도 다르고, 신중현과 뮤직파워 버전과도 다르다. 이 노래는 사이키델릭 록이라는 서구의 음악 장르와 신중현이라는 한국의 음악인이 만나서 창조해낸 하나의 신세계였다. 기타와 키보드, 오보에 같은 각각의 소리들을 하나하나 촘촘히 쌓고 거기에 '환각'이라는 요소를 더해 만든 10분간의 이 세계는 일찍이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자기의 소리를 높이는 절정 부분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반복해 말하지만, 당시의 신중현은 최고였고 당대의 해외 음악인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질 것이 없었다. 불운하게도 그가 태어난 곳이 한국이라는 우물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우물은 계속해서 신중현의 발목을 잡았다. '아름다운 강산'의 탄생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그 발목 잡기에서 시작됐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던 신중현에게 박정희 정권은 '박정희 찬가'를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거절의 뜻을 밝힌 신중현에게 정권은 점차 더 센 압력을 넣기 시작했고, 결국 신중현은 단순히 한 인물의 찬가가 아닌 온 국민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신중현 식의 애국가, 혹은 건전가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아름다운 강산'을 만들어냈다. 단순히 창작에서 그치지 않았다. 노래를 처음 선보인 공중파 TV 무대에서 신중현과 더 멘 멤버들은 장발 단속에 항의하는 뜻에서 삭발을 하고, 머리카락이 귀를 덮으면 안 된다는 규정을 조롱하듯 귀만 보이게 핀을 꼽고 나와 20분간의 사이키델릭 쇼를 펼쳐 보이며 음악인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시위를 권력자들에게 보여줬다. 그 뒤의 일은 모두가 알고 있다. 신중현은 요주의 대상으로 찍혔고, 얼마 뒤 그의 활동은 정지'당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어쩌면 신중현과 더 멘이 공중파 TV 무대에서 20분간 사이키델릭 쇼를 펼쳤다는 증언일지 모른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무대들이 주말 황금시간대의 TV를 통해 대중들의 눈과 귀로 전달됐고, 다양한 음악들이 서로 다른 개성으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음악이 음악 그 자체로 대접받던 시대였다. 하지만 '대마초 파동''가요정화운동'은 이 모든 것을 멈추게 했다. 어떤 이들은 상실감에 아예 음악을 그만 뒀고, 어떤 이들은 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한국 록의 아버지'라고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신중현은 당시를 가리켜 "온통 절벽이었다"는 말로 절망감을 표현한 적이 있었다. 그 절벽 가운데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불행은 단순히 그만의 불행이 아니었다. 대중음악 전체의 불행이었다. 그리고, 단절의 시작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노래가 들어있는 앨범의 제목은 [장현 and The Men]이다. 마치 장현이 더 멘의 리더인 것처럼 오해하게끔 표기되어 있지만, 정확히는 장현과 '(신중현과) 더 멘'의 노래가 A면과 B면에 나눠져 있는 일종의 스플릿 앨범이다. 이는 어느 정도 장현의 불순한 '의도'가 들어가 있는 표기였고, 아직까지도 이를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은 걸로 보아 그 의도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신중현과 장현의 음악적-인간적 악연은 그 뒤로도 한동안 계속 해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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