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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기행편⑨ 부암동 석파정과 환기미술관

풍월 사선암 2010. 8. 3. 21:40

화무십일홍 …열흘동안 붉은 꽃은 없다

역사문화기행편⑨ 부암동 석파정과 환기미술관

 

뒤틀린 인연은 또 다른 악연을 부르고 … 대원군의 석파정 그리고 석파랑

 

부암동 고갯마루에서 세검정으로 향하다 보면 좌측 산등성이 기암괴석 위에 홀연히 서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石坡亭)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원래 조선조 말 한양 최고의 별장으로 일컬어지던 철종 때의 영의정 김흥근의 삼계동 별장이었다. 서울 성곽의 북쪽 밖에 위치한 세검정 자하문 밖은 수려한 산수와 계곡을 배경으로 거대한 바위와 오래된 소나무들이 많아 한양 도성의 경승지로 꼽혔던 곳이다. 이처럼 수려함을 뽐내던 인왕산 계곡에 마치 넓게 차일을 친 듯한 소나무를 중심으로 안채, 사랑채, 별당 그리고 정자 4개가 펼쳐진 별장의 형세는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고 한다.

 

조선말의 우국지사 황현의 《매천야록》권1에는 석파정의 내력이 적혀 있다. 철종 승하 후 안동김씨의 괄시를 받던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즉위하자 김흥근은 "임금의 아버지가 정사에 참여하면 안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대원군의 숙적이 되고 말았다. 결국 대원군이 권력을 잡자 기세등등하던 안동김씨 세도도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대원군은 미운털이 박힌 김흥근에게 삼계동 정자를 사겠다고 제안하나, 김흥근이 거절하자 꾀를 내어 “그럼 하루만 빌려 달라”고 청한다. 서울의 옛 풍습에 따라 정원을 가진 사람으로서 빌려주지 않을 수 없었던 김흥근이 억지 승낙을 하자, 대원군은 고종에게 그곳으로 행차하도록 권하고 자신도 따라갔다. 왕이 묵은 곳에 신하가 살 수 없는 법. 김흥근은 다시는 그곳에 돌아갈 수 없게 되고, 결국 삼계동 정자는 대원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대원군은 이곳 삼계동 별장에서 바라보는 북악산과 북한산의 바위 모양을 따서 ‘석파정(石波亭)’으로 이름마저 바꾸어 놓는다.

 

하지만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한 때는 권력 다툼의 중심에 놓여 있던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후손인 이희, 이준, 이우의 별장으로 세습되어 오다가, 6·25 전쟁 후에는 천주교가 경영하는 코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지금은 개인소유가 되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도록 막은 철대문 사이로 이름에 걸맞게 ‘돌언덕’이 철벽처럼 버티고 서있다.

 

그러나 사랑채와 삼계동 바위 사이에 위치해 역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건축학적인 의미 또한 큰 별당건물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일본에서 찾아온 이로 잘 알려진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매입해, 1958년 종로구 부암동 고갯마루길과 세검정 사이로 옮겨왔다. 그리하여 한정식집 석파랑의 ‘대원군별장’으로 불리며 내·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을 불러모으고 있다. 이 별채 건물은 흥선대원군이 아끼던 공간으로, 반원형 창과 회색 적벽돌 건물들이 조선말 유입된 청나라식 건축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이 별채건물과 함께 일대의 계곡과 소나무를 중심으로 조성된 정원 또한 전통적인 산수정원에 인공미를 가미한 지난 시절의 흔적들만은 잘 살아 있다.

 

석파랑 정원의 감나무 건너편에 위치한 ‘만세문’은 1898년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황제로 추대된 고종의 황제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경복궁 내에 세운 것이었다. 암수 학 한 쌍이 불로초를 입에 물고 구름 위를 나는 형상이 새겨져 만사형통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만세문을 보고 섰노라니, 문득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10년 이상 가는 권세 없고, 10일 이상 붉은 꽃 없다는데…. 만세문에 만사형통 그리고 무병장수란 너무 큰 욕심이 아니었나 싶어진다.

 

석파정 가는 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방향에서 시내버스 7022, 7018, 1711, 1020, 0212번을 타고 자하문 터널 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횡단보도를 건너면 도착. 부암동사무소 앞으로 돌아 나와서 도로를 따라서 조금 내려가면 자하문 터널 입구 도로 옆에 있다.

 

석파랑(대원군별장) 가는 길

부암동 고갯마루에서 세검정 쪽 상명대삼거리 부침바위 앞 위치.

 

 

레몬향기를 찾던 한 시인은 가고, 또 다른 인연이 시작되고… 환기미술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로 만나 평생 의지가 되고 영혼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동지로 늙어갈 수 있다면 이는 분명 행운이고 축복일 터. 화가 김환기와 수필가이자 그의 예술적 동반자였던 김향안의 애틋한 삶의 궤적을 찾아 환기미술관으로 가는 부암동 언덕길에는 고즈넉한 가을 햇살이 가득하다.

 

사실 수화 김환기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김향안은 천재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의 어린 아내 변동림으로 세상에 먼저 알려졌다. 김환기와의 사랑이 치유와 축복이었다면, 사랑하는 이를 소유하고 싶어하지 않던 이상의 사랑은 그에게 딛고 일어서야 할 아픈 상처가 아니었을까.

 

금홍에 이어 권순희와도 실연하고 난 후 자괴감과 패배감에 젖어 시골로 잠적했던 이상이 술에 절어 '봉별기', '날개', '지주회시' 등 수많은 작품들을 쏟아내던 방황의 시절 1936년. 이상은 단편과 수필을 발표했던 여성문인이자 절친한 친구이자 화가인 구본웅의 이모였던 변동림을 만나게 된다. 이상의 건강 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게다가 구인회마저 해산되기 직전 어려운 상황, 그들에게 생활의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는 등 변동림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타고난 도피벽이 발동해 홀로 동경으로 떠난다. 그리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건강을 간신히 부여잡고「종생기」등을 쓰며 어떻게든 다시 한번 날아보려 하였지만 결국은 “레몬향기를 맡고 싶소”라는 말을 남긴 채 짧은 생의 날개를 접는다.

 

첫 남편이었던 천재작가 이상의 임종을 지키고 동경에서 그 유해를 안고 돌아왔던 스무 살의 당찬 여인 변동림은 8년의 시간이 흐른 후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였던 수화 김환기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평생을 서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헌신으로 바쳤다. 환기미술관 곳곳에 놓인 부부의 그림과 짧은 일기와 편지글 등에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두 예술적 동지의 내면세계에 다가서게 된다.

 

시인의 아내로 4개월, 미술가의 아내로 30년, 한국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과의 사랑을 추억하고 그 예술세계를 기리기 위해 노력하던 그녀는 생을 마치기 전 이렇게 회고했다. "시인 남편은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 …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화가 남편은(의) 지치지 않는 창작열을 가진 예술가의 동반자로 살 수 있었음은 행운이었다." (1986년 <문학사상> 인터뷰)

 

마치 돌고 도는 인간 세계의 질긴 인연을 표현하는 듯한 환기미술관 앞뜰의 둥그런 조각상. 그 위에 부서지는 가을 햇살이 우리에게 삶과 예술, 그리고 인연의 의미를 다시금 반추해보기를 권유하는 듯하다. 아, 우리는 어디서 어떤 모습이 되어 다시 만나랴!

 

환기미술관 가는 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7022, 7018, 1020, 0212번 버스로 부암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하차. 북악스카이웨이 입구에 있는 미술관 이정표를 따라 왼쪽 동네길로 들어와 동양방앗간 쪽으로 내려오면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