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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기행편⑦ 헌인릉ㆍ선정릉

풍월 사선암 2010. 8. 3. 19:57

무덤에 숨겨진 사연을 풀어보다

역사문화기행편⑦ 헌인릉ㆍ선정릉

 

100년전 조선의 최대공사 과정을 상상해보다  

 

1910년에 멸망한 조선시대. 오늘로부터 시간적 거리가 99년이고, 100세를 넘긴 어르신은 그때의 백성으로 태어났다. 그러니 숨차게 외웠던 ‘태정태세문단세……’는 아주 먼 역사가 아니었던 것. 이제는 왕의 이름보다는 실체가 있는 왕릉에서 그때의 삶에 빠져든다. 장편의 소설을 보듯 말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릉의 가치는 후손들이 기억할 때 더욱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정릉과 헌인릉에 묻힌 왕에게 간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소박하고 담백하다. 우리의 음식이 그러하듯 말이다. 하지만 그 시대로 돌아가 보면 왕릉은 엄청난 재정과 인력을 투입한 거대한 공사였다.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만큼 그것이 후대에까지 이어지길 원했을 터. 왕릉은 왕권에 대한 위엄과 그 후손들에 발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장례는 왕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고, 특히 터를 고를 때는 온갖 풍수지리가 동원될 정도였다. 왕릉 터는 왕이 생전에 고르기도 하지만, 대부분 후계왕이 성곽을 중심으로 십리 밖에서 백리 안쪽(41.6km)으로 후보지를 선택했다. 여기에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조건을 붙여서. 지금의 서울과 경기도에 왕릉이 몰려 있는 이유다.

 

우여곡절 끝에 터를 잡고 나면 5개월에 걸쳐, 최소 5,000명, 최대 15,000명 이상이 투입된공사가 진행된다. 이들은 왕릉에 필요한 기본 건물인 왕이 머무는 재실과 음식을 만드는 수라간, 능을 지키는 수복이 거주하는 수복방 외에도 정자각(13), 비석이나 신도비를 보관하는 비각(14) 등을 세운다. 또 궁궐 담을 연상케 하는 곡장(1)을 둘러 그 앞에 수호신인 호석(8), 양석(7) 등을 배치하고, 혼령이 노니는 혼유석(5)과 장명등(9)도 있다. 신하인 무석인(12)과 문석인(10)을 마석(11)과 함께 대기시켰다. 죽은 왕을 지키고 명령을 기다린다는 뜻과 함께. 왕의 관이 들어가는 자리인 현궁은 10자(3m) 깊이로 팠고, 왕기를 받는 깊이라고해서 왕족 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일반인은 3자(90cm)여야 한다. 봉분 둘레에는 병풍석(3)과 난간석(4)을 설치해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했다. 석물들은 장례기간과는 별도로, 3년 이내에만 만들면 되었다. 그 당시 남자 평균키가 150cm라는 걸 감안해보면 왕릉 조성이 고된 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죽은 백성의 혼이 진정으로 능을 지키는 능참봉은 아닐지.

 

사연 없는 무덤이 없다고 왕릉도 마찬가지다. 죽어서도 권력의 이동과 이득에 따라 옮겨지고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는 것이 왕릉이었다. 말 그대로 현재 즉위하고 있는 왕 마음대로인 것. 하지만 원수 같아도 아예 없앤 경우는 없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도둑은 있었을 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후세계에 꼭 필요한 식기, 곡물저장용구 등의 명기를 장례기간 중에 만들었다. 그리고 산 자가 선물하는 의복, 노리개 등을 같이 넣는다. 세조 때부터 장례법이 간소화되면서 석회를 이용했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단단해지는 특성이 왕릉을 지켜주기도 했다. 석회는 단단해지면 파기도 어렵지만, 그에 비해 얻어지는 이득이 적어 임진왜란 때도 선릉 한 곳만 파묘된 것에 그칠 수 있었다.

 

여기서 잠깐! 긴 공사기간 동안 시신은 어떻게 보관했을까? 여름에는 시신 위에 빙반이라는 통을 얹고 얼음을 채워 부패를 방지하는 지혜로움도 있었다. 얼음은 지난해 겨울 강에서 채취해 석빙고에 저장한 것을 사용했다. 왕의 시신은 3일 소렴(小殮)에 19칭(벌과 유사한 뜻), 5일 대렴(大殮)에는 90칭의 옷을 입히고 마지막으로 얼굴부터 발끝까지 묶는다. 간소화되긴 했어도 요즘 장례 방법과 같다고 보면 된다.

 

태종 앞에 석고대죄하고 있을지 모를 순조 … 인릉

 

왕릉이 조성된 사연을 알고 나니 석물 하나, 풀 한 포기도 예사롭지 않다. 그 실체를 보기위해 헌인릉(서초구 내곡동)으로 들어가는 길. 저 멀리 순조의 휴식처인 인릉이 먼저 보인다. 제 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이다. 이곳은 능침에 병풍석도 없고, 두 개 있어야 할 혼유석도 한 개뿐. 세조에 의해 장례절차가 간소화된 탓도 있지만 힘없던 왕권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등극한 순조.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나라의 불행은 시작된다.

 

정순왕후의 권력 앞에 안동 김씨 판이 되고, 이들을 견제할 세력도 없었다. 매관매직, 부정부패, 권력남용이 빈번해져 백성들의 삶의 질은 추락한다. 보다 못한 백성들에 의해 민란이 다섯 차례나 일어나고, 그 중 유명한 ‘홍경래의 난’도 이때였다. 이런 분위기에 한 몫 거든 이가 있었으니 그의 비 순원왕후다. 나라의 안위보다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 몸 바친 그녀다. 죽어서도 합장릉이 돼 순원왕후의 치마폭을 벗어날 수 없는 순조의 운명. 그 운명 앞에 좌절하는 동안, 안동 김씨들의 세도정치는 날개를 달아 60여 년간 조선을 주름잡았다. 순조는 하필 외척세력을 경계한 태종의 능과 같이 있다. 순조의 혼이 태종 앞에 석고대죄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는 왜 조가 아닌 종인가? 태종…헌릉

 

힘없는 순조의 인릉을 지나 숲길을 걸어가면 헌릉이 나온다. 왕릉 중에서도 석물수가 가장 많고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화려한 쌍릉이다. 이 능의 주인은 죽어서도 이름을 떨치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 제3대 태종이다. 태종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형제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지만, 이 왕권에 도전한 2번째 ‘왕자의 난’에서는 셋째형 방간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유배시킨다. 또한 외척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원경왕후의 친정과 아들 세종의 비 친정식구들까지 몰살 시켜 결코 어떤 도전도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서 의문인 것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 또 왕위에 오르기까지 피를 뿌린 태종은 왜 조(祖)가 아니고 종(宗)일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외웠던 ‘태정태세문단세~’는 왕의 이름이 아니라 묘호다. 묘호란 왕의 업적을 기준으로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올리는 칭호였던 것. 왕의 공(功)은 ‘조’로 표시하고, 덕(德)은 ‘종’으로 평가했다. ‘조’는 국가를 창업하거나 중흥시킨 왕, ‘종’은 선대의 정치 노선을 평화적으로 계승한 왕을 말한다. 여기에 더욱 구체적으로 글자를 덧붙임으로써 우리가 외웠던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등으로 불렸다. 그렇다면 태종은 ‘덕’으로 평가해 왕위를 계승했다고 보는 것일까?

 

그 유명한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선릉

 

태종의 묘호에 궁금함을 품고 빌딩숲에 둘러싸인 삼릉공원인 선정릉(강남구 삼성동)으로 향했다. 선릉은 제9대 성종과 왕비 정현왕후, 그리고 아들인 제11대 중종의 휴식처다. 바로 앞에 도로가 있어 편히 쉴 수나 있을까 싶지만, 속세의 눈으로 본다면 후대에 뒤바뀐 명당은 아닐지. 왕릉 터 중에서도 가장 비싼 땅에 묻힌 가족이라는 걸 그들은 알려나? 성종과 정현왕후는 정자각을 같이 사용하면서도 다른 언덕에 각각 묻혀 동원이강릉이라고 한다. 한 집에 살지만 각방을 쓰는 격이라고 할까. 입구에서 보면 선릉엔 성종의 능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선릉은 임진왜란 때 파묘되어 시신은 없고, 버려진 옷가지들을 모아 태운 뒤 관에 넣어 다시 모셨다.

 

성종은 타고난 정치가였다. 조선은 성종에 와서 통치 체제를 완성시키면서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보낸다. 그는 중국어를 배워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고, 사림과 훈구 세력을 맞세워 견제하며 이끈 수완가였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 악학궤범, 경국대전 등을 완성시킨 것도 성종 때다. 하지만 그에게도 단점은 있었으니 12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유흥을 즐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폐비되고, 결국은 계략에 의해 사사되고 만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선릉의 다른 능선에 묻힌 정현왕후도 있었다. 만약 이 사건이 없었다면, 연산군은 아버지인 성종의 대업을 이어갈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초반, 4년의 행적을 보면 말이다.

 

 

나라 안과 밖, 그리고 집안까지 시끄러웠던 중종…정릉

 

성종의 선릉에서 더 깊숙이 들어가면 그 아들인 중종의 휴식처 정릉이 나타난다. 가장 안쪽에 숨어 있는 정릉은 사연 많은 왕릉 중 하나다. 애초에 중종은 장경왕후가 죽자 자신도 묻힐 쌍릉터를 원했고 지금의 헌릉에 묘자리를 정했다. 하지만 장경왕후의 능은 정치적 야욕에 의해 서삼릉인 희릉으로 옮기게 된다. 그로부터 7년 뒤 중종은 바라던 대로 희릉에 같이 묻힌다. 여기에서 그쳤다면 지금의 정릉엔 중종은 없었을 터. 그 이유는 이렇다. 중종의 계비였던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 14년에 갑자기 중종의 능을 천장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선릉 곁에 중종의 능을 옮기고 문정왕후 자신이 죽으면 그 곁에 묻히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종을 천장한 자리가 장마 때면 물이 차올라 보수비용만도 큰 골칫거리였다. 그 탓에 문정왕후 자신은 그곳에 묻히지 못하고 중종과 장경왕후만 떼어놓은 꼴이 되고 말았다.

 

중종이 왕위에 오른 때는 이복형인 연산군의 폭정으로 피폐해졌던 시기였다. 그는 반정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실질적 권한은 없었고 숨죽이다가, 박원종의 죽음으로 반전의 기회를 잡는다. 서서히 연산군 때의 정책을 바꾸고, 자문기관인 홍문관 기능을 강화시켰으며, 경연을 중시하고 유능한 유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해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 안팎으로는 불안한 시기였다. 안으로는 작서의 변(동궁을 저주한 사건), 기묘사화(정치집단인 붕당을 조성,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이유), 밖으로는 일본 거류민이 부산포 등을 공격한 삼포왜란 등으로 시끄러웠다. 어쩌면 지금 홀로 있는 건 쉬고자 하는 그의 바람이 아닐지.

 

왕릉을 통해 바라본 조선왕조는 발전과 후퇴를 거듭해 알면 알수록 아쉬움이 앞선다. 마치 소설의 뒷부분이 궁금한데 천천히 알고 싶은 마음처럼 말이다. 이제 그들은 가고 없지만 왕릉은 우리 곁에 남아 침묵으로 전하고 있다. 그들의 삶은 치열했고, 꿈은 높았으며, 살아있는 능을 통해 조선왕조는 이어져왔음을. 그 가치를 다시 한 번 인정받은 것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삶은 계속되고 우린 누군가의 과거가 될 것이다. 그때의 평가를 우린 두려워하고 있는가. “태정태세문단세~”가 콧노래처럼 흥얼거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