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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기행편⑩ 박종화,이광수 고택과 현진건 집터

풍월 사선암 2010. 8. 3. 21:49

평창동에서 부암동까지, 가을 제대로 타기

역사문화기행편⑩ 박종화,이광수 고택과 현진건 집터

 

월탄 박종화의 평창동 고택

 

세상은 변한다. 사람도, 시절도, 그리고 풍경마저도…. 변해가는 세상에서 변함없이 문인들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경복궁역 일대. 월탄 박종화와 춘원 이광수 고택, 빙허 현진건의 집터 등이 자리한 세검정 주변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인들의 자취를 찾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평창동 주민센터 건너편 거리를 따라 10여 분 가량 걷다 보면 풍채 좋은 한옥 한 채가 나타난다. 바로 <금삼의 피>, <세종대왕>,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그리고 TV 드라마 <여인천하>의 원작자인 월탄 박종화(1901∼1981)의 평창동 고택이다. 종로구 충신동에 있던 월탄의 집을 1975년 그대로 옮겨 지은 이 가옥은 1981년 그가 작고할 때까지 실제 거주했던 곳으로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특히 월탄이 숨을 거둘 때까지 8년 동안 <세종대왕>이라는 장편소설 2만여 장을 집필했던 사랑채는 생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해방 전 인근에 거주하던 최남선, 현진건, 이광수 등 쟁쟁한 문인들이 모여드는 사랑방이었다 하니, 문화사적 가치 또한 간과할 수 없겠다. 잘 다듬어진 정원에 ㄱ자형으로 들어앉은 안채와 사랑채 곳곳에서는 아직도 작가들의 담소가 들리는 듯한데, 이제는 개인 소유이기에 붉은 벽돌담 너머로 힐긋 내다보아야함이 아쉬울 따름이다.

 

아름드리 옛 고택을 눈앞에 두고도 맴돌고 있노라니, 월탄의 첫 장편역사소설 <금삼의 피>에서 딸이 마지막 쏟은 피 묻은 옷자락을 들고 어린 연산의 주변을 맴돌던 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진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마지막 단추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법. 이렇게 알게 된 친어머니 죽음의 진실은 어린 연산의 가슴에 분노와 좌절감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고, 훗날 연산이 왕위에 오르자 억눌러 놓았던 상처는 피비린내 나는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월탄 <금삼의 피>가 불러일으킨 역사에 대한 단상과 함께 터벅터벅 세검정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연산군이 경치 좋은 바위위에 세웠다는 연회장소 '탕춘대'가 나온다. 이곳 바위에서 연일 방탕과 주색잡기에 빠져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던 연산, 그리고 예정된 바 진배 없던 폐위. 정작 인간세상의 흥망에 무심하기만 한 탕춘대 바위 앞에서 지난 시간을 굽어보니, 질긴 악연으로부터 놓여나지 못했던 연산이야말로 뒤틀린 역사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싶다.

   

춘원 이광수 홍지동 별장 ‘춘원헌’

 

세검정 앞 상명대 삼거리에서 상명대 쪽으로 향하다보면 중국음식점과 서점 사이로 얼핏 보아도 경사도가 만만찮은 골목길 하나가 나온다. 길이 꽤나 가파르다. 숨을 헐떡거리며 오르니 오른편 언덕배기에 <무정>, <흙>, <단종애사>로 잘 알려진 소설가 춘원 이광수(1892~1950)의 별장 ‘춘원헌’이 나온다. 춘원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이 별장을 짓던 시기는 생애 중 가장 암울한 때로, 이곳에서 홍지출판사를 운영하며 <그 여자의 일생> <이차돈의 사> 등 수많은 작품을 집필하였다. 현재의 집주인이 1972년 퇴락한 한옥을 매입하여 양옥으로 개축하려고 하였으나, 조병화, 박종화, 김광섭 등 문인들의 만류로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춘원에 대한 우리의 닫힌 마음만큼, 꼭꼭 잠긴 대문 사이로 이광수가 예찬하던 오동나무가 여전히 튼실하게 자라고 있음을 확인한다.  

 

‘나는 오동에 대하여 퍽 애착심이 강하다. 내가 수목 중에 가장 사랑하는 것이 소나무와 오동이다. (중략) 내가 현재에 들어 사는 집에는 재작년에 오동 한 나무가 안방 서창 밖에 나서 금년에는 기운찬 가지와 걸걸한 잎사귀가 높이 지붕 위에 솟았고, 또 금년에 천만 뜻밖에 사랑 마당에 오동 한 나무가 나서 일척이나 자랐다. 내년 후년에는 내 사랑 마당이 오동 그늘로 가려질 줄 믿는다. 이것으로 보면 나만 오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동도 나를 따르는가 싶다.’ -춘원 이광수 수필 '오동' <인생의 향기> (홍지출판사, 1936)

 

춘원 이광수라고 하면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가 ‘친일파’이지만, 그가 걸었던 친일행각 이면에는 가슴 아린 사랑이 있었다. 봄동산(춘원)이라는 아호와는 달리 고아와 가난이라는 멍에를 쓴 채 외롭게 자랐던 이광수. 19세 때인 1910년 중매로 만난 백혜순과 혼인하지만 날이 갈수록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괴로워하던 춘원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던 중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운명의 여인 허영숙을 만나게 된다.

 

1916년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하며 ‘전 조선 여성의 연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지만 춘원은 궁핍하고 병약했다. 어느 날 각혈로 도쿄여자의전부속병원을 찾았으나 수중에는 단돈 60전뿐. 진찰을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그를 의학도 허영숙이 진찰받도록 해주었다. 진찰 결과는 폐병 2기. 하지만 그는 연재 중이던 <무정>을 중단할 수 없었기에 다시 하숙방으로 돌아가 집필에 몰두해야 했다. 그러던 중, 심한 각혈을 한 채 쓰러진 춘원은 허영숙의 간호를 받고 목숨을 건지고, 생명을 구해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결국 1918년 9월, 춘원은 아내와 이혼에 합의하고 그해 허영숙이 총독부 의사고시를 합격하여 조선 첫 여의사가 되자, 그들은 중국 베이징으로 사랑의 도피여행을 떠나기에 이른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세상의 모든 손가락질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던 젊은 그들. 하지만 사랑 너머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3개월 뒤, 허영숙은 병원을 개업하기 위해 조선으로 돌아갔고, 춘원은 다시 일본으로 가서 2·8독립선언문의 수정에 참여한 뒤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일을 보았다. 이 무렵 춘원은 나라 잃은 민족을 구하고픈 거국적 신념과 사랑과 행복을 지키고픈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정신적 부친이자 스승이던 도산 안창호의 독립정신에 감복하여 조국애를 불태우던 그였기에 갈등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조국이냐, 사랑이냐.’ 결국 춘원은 도산의 충고를 거스르고 사랑을 택하고 말았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자신의 작가적 역량이 민족에 끼치는 정신적 영향을 간과한 채, '팰리스의 사과'를 집어든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춘원이 도산의 권고대로 미국으로 가거나 상하이에 남는 등 방안을 져버린 채 허영숙과 결혼하여 조선에 안착하자, 그의 문장 실력을 잘 아는 일제가 그의 글을 통해 조선인들을 길들이려는 손길을 뻗쳐왔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해 9월 이광수는 사이토 총독을 만났고, 11월 <민족개조론>을 집필, 1922년 5월 잡지 <개벽>에 발표하여 조선민족의 성품을 철저히 깎아내리는 반민족성의 길을 걷고 말았다.

 

만약 춘원이 허영숙과의 사랑 대신 도산이 제시해주었던 구국의 길을 택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아픈 이광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춘원 이광수와 허영숙, 이들 두 사람의 사랑은 과연 그들의 운명이었을까?

 

빙허 현진건의 부암동 집터

 

“거 암것도 없는디를 뭣하러 갈라 그러요?”

현진건 집터를 찾던 중 만난 토박이 동네 아저씨의 조언을 뒤로 하고 부암동 주민센터 뒤 무계정사 골목으로 들어선다. 아니나 다를까.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니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의 별장이었던 무계정사 자리 아래 수풀만 우거진 공터에 '현진건 집터'라는 표지석만이 놓여 있다. 덩그라니 놓인 표지석 앞에선 은행나무도 말이 없었다.

 

한때 1930년대 이곳에 있던 빙허 현진건 고택은 팔작지붕에 겹처마로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뿐만 아니라, 한국대표문학작품 집필 공간이라는 문화사적 가치 또한 충분하였다. 하지만 2003년 11월 포크레인 굉음에 쓸려 작가의 문학적 터전은 사라지고, 이제 그 존재는 모두 과거형이 되고 말았다.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간과한 후손들의 무지인지, 발전 논리로의 귀의인지 알 수 없지만, 순식간에 쓸려나간 작가의 빈자리는 두고두고 많은 이들의 가슴에 뒤늦은 후회를 불러일으킨다.

 

친일행적으로 비난받는 춘원 이광수와 달리 빙허 현진건은 일제에 의해 탄압받은 삶과 문학이 하나로 일치되었던 작가였다. 삶을 통해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기초를 확립한 그는 한 시대의 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하는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희생화>와 <빈처>, <술 권하는 사회> 등 초창기 작품에서 보여주던 지식인의 자기중심적 세계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 소설 <운수 좋은 날>, <고향> 등에 이르면 식민지시대 하위 민중들의 아픔으로 옮아가는 정신적 성숙의 과정을 몸소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제 말기, 일장기말살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투옥되었다가 언론 및 작품 활동 일체를 중단한 채 이곳 부암동 자택에서 양계를 하며 침묵의 세월을 보내다가 해방을 2년 앞둔 시점인 1943년생 장결핵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우리 근대문학사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수많은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였던 곳, 그러나 이제는 스산하기 그지없는 빈 마당에 서자 문득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로 시작되는 소설 <운수좋은 날>이 떠오른다. 비극적 결말을 암시라도 하듯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아픈 아내를 집에 눕혀두고도 ‘오늘은 왜 이렇게 운수가 좋아….’라며 아내가 숨을 거두고 아이가 빈젖을 빨아댈 때까지 끝내 일을 멈추지 못하던 주인공 김첨지의 불안한 모습이 자꾸 아른거리는 것은 왜일까.

 

작가 현진건의 애환과 부침을 함께 했던 은행나무 두 그루는 오늘도 말없이 서서 먼 산만 바라보고 섰다. 변해가는 세상을 한 가득 담고서도 요지부동 흔들리지 않는 그 시선의 끝엔 인왕산 산등성이 능선들이 아슴아슴 펼쳐진다. 마치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가는 한 때에 불과할 뿐이라는 듯…. 무심한 그 눈길을 따라 현대판 김첨지도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불안함과 이제 남아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달픔들을 말없이 흘려보낸다.

 

▶ 평창동 박종화 고택

주소 : 종로구 평창동 128-1번지 (현재 월탄의 손녀딸 박동숙·김윤식 동덕여대 교수 내외가 거주하는 비공개 가옥)

가는 법 : 평창동 주민센터 앞 코스꼬레 마트와 은행 사잇길로 올라가 갤러리까페들을 지나 10여 분 걷다 보면 오른쪽 작은형제회 수도원 옆 한옥

 

▶ 이광수 별장 춘원헌

주소 : 종로구 홍지동 40번지

가는 법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135, 135-1,135-3번 등 평창동행 버스를 타고 상명대학교 정거장 하차 후, 상명대삼거리 높은음자리 분수대에서 상명대 쪽으로 향하다가 중국집 팔선생과 상명서점 사이 골목길 따라 오르면 우측에 위치한 한옥집(지금은 개인소유의 건축물이기에 개방되지 않음)

*평창동 박종화 고택에서 출발할 경우, 홍지문 쪽으로 세검정길을 따라내려가다 상명대삼거리에서 상명대쪽 중국집과 서점 사이 골목길

 

▶ 부암동 현진건 집터

주소: 종로구 부암동 325-2번지

가는 법: 상명대 앞에서 자하문 길로 들어서 부암동주민센터 옆 무계정사1길로 100m쯤 골목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