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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기행편⑤ 안중근 기념관, 봉수대

풍월 사선암 2010. 8. 3. 19:47

남산 순례자의 단상

역사문화기행편 ⑤ 안중근 기념관, 봉수대

 

'케블카' 타고 서울 귀경하던 시절

그리고 남산관등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은 서울 중구 장충단 공원 동네였다. 그래서 어릴 적 우리 집에 함께 사는 순이 언니의 손에 잡혀 남산에 자주 오르곤 했다. 그때 언니가 "어서 돈을 벌어 고향 부모님 남산 구경 시켜주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머릿속에 잘 잊혀지지 않는다.

 

왜 하필 남산 구경일까? 창경원이나 덕수궁에 갈 수도 있을 텐데. 어린 마음에 내심 생각했지만, 무슨 까닭인지 나는 순이 언니에게 한번도 되묻지 못했다. 정작 왜 고향 부모님들의 서울 구경 제1코스로 남산을 택했는지 깨닫게 된 것은, 순이 언니가 우리 집을 떠나고도 한참이 지난 후, 어른이 되어서 남산 '케블카'를 타던 날이었을 터다.

 

바야흐로 1960년에서 70년대 무렵, 부모님을 시골에 둔 채 혼자 상경하여 살아가는 자식된 도리로는, 한번쯤은 경제출혈을 해서라도 서울 남산 '케블카' 태워드리는 것이 가장 큰 효도처럼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해외로 부모님을 보내드리는 효도관광에 맞먹는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남산에 다시 올라 생각해보면, 순이 언니가 남산을 노래 부른 이유는 '케블카'만이 아니라 다른 데 있었던 것도 같다. 높지도 낮지도 않으면서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보듯 구경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가 남산이라는 사실을 그 역시 남산에 자주 오르면서 깨달았던 게 아닐까 싶다.

 

남산이 효자들의 순례지였던 것은 비단 6,70년대뿐이 아니었다. 고려시대에는 남산관등 놀이가 매우 유명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등에 업고 수백리를 행차하여 남산에 오르는 것이 효도의 한 관례였다. 그것은 남산관등을 해야 극락열반할 것으로 믿었던 풍속 때문이었다. 사내 아이면 거북등, 잉어등, 혹은 북등을, 계집 아이 같으면 알등, 방울등, 그리고 수박등을 들고 남산을 올랐다. 그때 풍경을 잠시 남산 소월로를 걸으면서 떠올려 본다. 남산의 순환도로 이름이 소월로로 바뀐 것은 정말 좋은 일이라는 생각도 덩달아 하면서 말이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산유화>- 김소월

 

청학이 사는 선향에는 시인 묵객들이 많더이다

 

남산의 본래 이름은 목멱. 이는 고어로 마뫼 즉 남산이란 뜻이다. 남산은 인경이나 종남이라 불리기도 했다.

 

남산의 풍수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북악의 산세와 다르게 선이 부드러운 산이다. 남산은 이렇듯 북악산과 정조가 다른 산이다. 그래서일까. 남산 북쪽 기슭의 필동 일대는, 조선시대에 시인 묵객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다. 청학이 사는 선향이라 하여 청학동(淸鶴洞)으로 불리웠으며, 경관 또한 아름다워 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과 더불어 한양 5동(漢陽五洞)으로 손꼽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학자 이덕무는 남산 아래 장흥방에서 살았는데 남산을 자주 오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많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남산골에는 천우각이라는 누각이 있었고 여름철의 피서를 겸한 쉼터로도 유명하였다.

 

한편 호암전집의 저자 문일평의 글에는 다음과 같이 남산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다. "남산이 경성의 전면을 가로막아 비록 좁게 만들었으나, 남산이 없었다면 경성은 그만큼 단조하고 범속하게 되었을 것이다. 시내에서 남산을 바라봄도 가하되, 남산에 올라 남산을 보는 것도 좋고 다시 남산에서 북한을 배경으로 경성시를 부감함도 더욱 좋다. 보기에는 아름답고 오르기에 편하고 또 전 경성을 한눈 아래 거둘 수 있기는 남산이다. 남산이 경성 발전에 저해가 되는 것과 남산이 경성인에게 위안을 주는 것과 어느 것이 클지는 용이하게 단언할 수 없거니와 남산이 저 산악으로 더불어 경성의 자연을 구성한 요소의 하나가 되는 동시에 시민에게 기쁨과 힘을 주는 원천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남산은 높지 않아서 오르기 쉽고 오르면 정말 발 아래 서울을 둘 수 있는 전망이 압권인 장소다.

 

그 전망 때문에 생긴 역사적 유물, 봉수대도 남산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다. 조선의 태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했다.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모두 남산 봉수대에 전달되도록 하였는데, 남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남산에 설치된 봉수대는 갑오개혁 다음 해인 1894년까지 거의 50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다. 봉수대의 명칭은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 봉수라고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라고도 불리웠다.

 

봉수란 근대 통신수단이 발달되기 전까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국가적 통신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변방에서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 경우 그 사실을 가까운 관아와 해당 지역에 신속하게 알려 위급한 사태를 긴급하게 대처하기 위한 수단이다.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경계를 침범하면 넷, 경계에서 적과 아군이 접전 중이면 다섯을 올리도록 했다. 남산이 한양의 군사적 요충지가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남산 봉수대는 1993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한양공원 그리고 안중근기념관

 

그러나 남산은 숱한 역사의 왜곡과 파손, 개발과 고립이라는 굴곡을 겪어온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찍이 임진왜란 때부터 남산은 일본군의 주둔지였다. 시민들은 이곳을 왜장터라 불렀고 일본인들은 남산을 자신들의 성역처럼 여겨 아예 1897년에는 그 일대 3,000여 평을 빌려 왜성대공원이라 이름짓기도 했다. 그들은 도로개설과 함께 벚꽃 600그루를 심었으며, 지금의 숭의학원 자리에 대선궁이라는 신사를 세웠다.

 

이렇게 일제에 의해 훼손된 남산이 일반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1910년. 공교롭게도 바로 그 남산 기슭에 위치한 통감관저에서 한일병합 조약이 체결되었던 해다. 당시 이름은 얄궂게도 '한양공원'이었고, 그로부터 일제는 남산에 조선 선신궁이라는 일본신사를 세워놓고 우리민족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며, 이후 서울성곽, 봉수대, 국사당 등이 철거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 당시 고종 임금의 친필 석비는 현재 통일원 청사 옆에 보존되어 있다. 국사당 자리는 남산 정상 팔각광장이, 지금은 인왕산 서쪽 자락 선바위 아래 옮겨져 내려오고 있다.

 

아무래도 남산을 좀더 역사적으로 조명하고 싶다면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안중근 의사 숭모회 기념관부터 방문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1970년에 만들어진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의 일본 감옥에 갇힌 이후 1910년 3월 26일까지 옥중에서 쓴 유묵과 자서전 등 수십 점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유묵은 서체도 뛰어나지만 글에 담긴 의미와 교훈은 오늘날에도 마음 속에 깊이 되새길 만큼 명심보감이라 하겠다. 안 의사와 그 가족이 중국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한 탓에 주요 유품이 해외에 흩어져 있어 아쉬운 점도 없지 않지만, 내년 10월에는 이것들을 확보해 지하 2층, 지상 2층 규모의 새 기념관을 완공한다고 한다.

 

남산 르네상스 그리고 21세기 남산 신(新) 풍속도

 

남산은 모두가 말하듯이 서울의 허파다. 남산의 숲은 더욱 푸르게 되어가고 있다. 남산은 특히 소나무가 많다. 사계절 수목이 푸른 경관이 훌륭하다 하겠다. 수림이 잘 보호되어 꿩을 비롯한 산새·다람쥐 등 산짐승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붉은 꽃 파리해지마 봄은 벌써 가고

산이 깊구나 푸름이 살쪘구나

 

향기로만 가만히 있기 싫어 물따라 나오고

괴상한 바위 밑엔 언제나 기이한 꽃이 피었어라

 

골짜기로 기어드는 연하 은일의 뜻이던가

뒤늦게 피는 탈홍을 못이겨

 

이제부터 능히 정안, 길선하면

하늘이 공력을 어찌 소나무에게만 쏠리리.

 

<남산>-정강오

 

남산 오르기도 더욱 쉽게 됐다. 시골 사람 서울 올라와서 김서방 찾듯이, 서울에서 남산을 찾기 위해 헤맬 일도 없을 것이다. 남산 순환 시내버스 이용 등 남산을 오르는 길도 많다. 인터넷에서 남산 지도 역시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아는 길도 물어가라고, 서울 시내지만 남산 지도를 알고 오르는 것도 요령일 터이다. 남대문·퇴계로3가·장충공원·이태원동·후암동 등 여러 곳으로부터 산꼭대기에 이르는 산책로가 있다.

 

남산은 서울의 얼굴이자 서울의 자부심이다. 그 중앙이라는 자부심의 상징처럼 오늘도 서울 N 타워의 첨탑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남산 정상에는 탑골공원의 정자를 본뜬 팔각정과 서울 N타워, 산정상부 일각에는 한국의 경위도 원점이 있다. 서울의 랜드마크로 손꼽히는 N타워는 1972년에 완공된 높이 236.7m의 방송국 종합송신탑으로, 탑 안에는 송신탑 시설 외에 사방 60km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공원 서단부에는 계단으로 이어진 세 개의 광장이 산허리를 타고 펼쳐져 있다. 맨 아래 있는 광장은 약 2,500평 규모의 어린이 놀이터, 그 위에 6,000평 규모의 백범광장이 있고, 북동쪽에는 1969년 8월에 건립한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있다. 남산 분수대를 중심으로 하여 북서쪽에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 그 맞은편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이다.

 

하지만 남산은 또한 서울의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기에 가장 좋은 시적인 분위기의 산책로를 가지고 있다. 서울 N타워로 오르는 돌계단길과 남산 순환로 등을 거닐어 본 이들이라면 아마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해외여행 사진이나 로맨스 영화 속에서 많이 봤던 사랑의 자물쇠가 설치되어 있는 곳을 지나면서 생각한다. 청춘남녀의 아름다운 색깔처럼 색색의 남산 타워 근처에서 만난 사랑의 자물쇠들은, 일편 우리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돈도 명예도 아닌, 바로 사랑이란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남산은 이렇게 세월 따라 효도의 등불을 밝히던 남산관등에서, 훌쩍 뛰어넘어 굴곡 많은 역사를 기록한 현장으로,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청춘남녀의 낭만의 장소로 이어져 가는 듯하다. 그 어떤 것이건 남산에 오르는 자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가실 때에는 부디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한 뒤 걸어 오르시기를 바란다. 실제로 남산은 자동차보다는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오르는 것이 더욱 편리하게 되어 있다. 차를 타고 가는 것은 남산에 대한 예의가 아닐 듯하다.

 

■ 남산 N서울타워 가는 방법 몇 가지

 

☞ 명동에서 가는 방법

그냥 걸어서 올라가거나, 케이블카를 탑승하거나, 순환버스를 이용하면 쉽다. 버스를 이용하여 남산타워에 갈 경우 지하철 명동역 1번 출구 ‘명동입구’ 버스정류장에서 05번 노랑 버스를 타면 된다.

 

☞ 남대문시장에서 가는 방법

한국은행 맞은편 남대문시장 버스 정류장에서 03, 05번 노랑 버스를 타면 된다. 남대문시장 회현역 방향에서 갈 경우 회현역 4번 출구로 나와 263번, 604번 버스를 타고 다음 정류장인 ‘명동입구’에서 하차하여, 05번 노랑 버스를 타면 된다.

 

☞ 충무로에서 가는 방법

충무로역 4번 출구로 나와, '퇴계로 3가(한옥마을, 한국의집)’ 버스정류장에서 02, 05번 노랑 버스를 타면 된다.

 

☞ 서울역에서 가는 방법

‘서울역 환승센터’ 정류장에서 263, 604, 7011번 버스를 타고, ‘명동입구’에서 하차하여, 05번 노랑 순환버스를 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