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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기행편② 경교장과 이화장

풍월 사선암 2010. 8. 3. 18:59

대한민국 건국역사의 산실, 경교장과 이화장

서울, 한눈에 보기… 역사문화기행편② 경교장과 이화장

 

우리나라 국민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떠올릴 때면 약속이나 한듯 동시에 떠올리는 얼굴이 백범 김구 선생이다. 우남 이승만 대통령과 백범 김구 선생은 낮과 밤처럼 대한민국 건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양대 주역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 4월 18일에 태어났고, 백범 김구 선생은 이듬해인 1876년 7월 11일에 태어났다. 건국역사의 두 주역은 조선의 개항-일본 및 서구 국가들과의 수교-척사위정운동-개화운동-동학운동-청일전쟁-러일전쟁-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까지 격변과 혼란의 시기를 지켜봐야 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애국지사들에 의한 국내외의 항일독립운동과 3ㆍ1운동, 해방 후 3년사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지도자의 위치에서 살아내야 했다.

 

대한민국을 튼튼한 반석 위에 건설하려 한 뜻은 같았지만 가는 길은 달랐던, 백범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이 없는 대한민국 근ㆍ현대사는 떠올릴 수 없다. 그렇기에 '경교장'과 '이화장'은 민족지도자였던 두 지도자의 삶과 죽음의 흔적이 남아있는 대한민국 건국 역사의 산실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이자 백범 암살 현장이었던 '경교장'

 

'경교장(2005년 5월 사적 제 465호 지정)'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27년간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8.15 해방 후 환국해서 마지막으로 사용하던 임정 청사로, 김구 주석이 기거하다 1949년 6월 26일 육군소위이자 미군방첩대 요원인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비운의 현장이다.

 

방바닥에는 저격자의 총을 쏜 위치가 발바닥 모양으로 표시돼 있고, 유리창엔 두 발의 총알자국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종로구 평동 108번지에 위치한 '경교장'은 1938년 금광재벌인 최창학이 지은 건물로,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렸던 것을 김구 선생이 근처에 있던 경구교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했다.

 

이곳에서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를 주재했고, 반탁운동과 자주통일운동도 전개했다. '백범기념실' 벽에는 국권회복운동(1876-1919), 대한민국임시정부활동(199-1945), 자주통일운동(1945-1949)에 앞장섰던 김구 선생의 사진들과 암살 당시의 참혹한 사진들이 영원히 살아남을 증거처럼 걸려있다.

 

그동안 역사의 산실인 '경교장' 건물 중 2층 서쪽의 집무실(약69㎡)만 복원돼 ‘백범기념실’로 운영되고, 나머지는 강북삼성병원으로 쓰이고 있어 찾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하지만 2011년 11월에는 서울시의 경교장 전체복원추진계획으로 제자리를 찾은 경교장의 모습을 국민들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살아생전에는 ‘이승만에 가려진 만년 2인자’로 불렸던 백범 김구 선생이었지만, 사후 50년 후에 있었던 한 방송사의 설문조사 결과 ‘일생을 민족해방과 통일국가건설에 투신해 온 민족지도자 1위(40.7%)’로 선정되기도 했다. '경교장'은 백범 김구 선생의 죽어서도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전하고 있었다.

 

■ 경교장

 

- 관람시간 : 평일: 오전 10시~오후 5시, 토요일: 오전 10시~오전 12시, 무료

- 교통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 버스 서울 역사박물관 앞 하차

- 문의 및 예약 : 02) 2001-2781

 

초대정부의 조각본부와 이승만대통령의 사저였던 '이화장'

 

사전예약을 통해 찾아간 '이화장(종로구 이화동 1번지)'은 울창한 고목들이 자리 잡은 고궁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경교장, 삼청장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활동 3대 명소의 하나로 불리는 이화장의 자리는 예부터 경관이 좋아 조선중기 문신 신광환과 인평대군 등의 저택이 있었던 곳으로, 일대에 배 밭이 많았고 이화정이라는 정자도 있었다고 한다.

 

'1945년 8.15 광복 직후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 대통령이 거처를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겪자, 유지들이 자금을 모아 1837년에 건축된 한옥 기와집을 구입한 뒤 기증했다. '이화장'은 사저와 초대정부의 조각본부, 집무실 등으로 사용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할 때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그리고 이승만대통령 서거 후에는 미망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1992년까지 여생을 보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두루마기를 입은 채 오른손을 들고 바라보는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만날 수 있었다. 언덕 위쪽으로 보이는 작고 하얀 건물이 1948년 7월 24일 초대정부의 내각을 구상하고 조각명단을 발표했던 '조각당' 건물인데, 안에는 ‘남북통일‘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 액자가 걸려 있다.

 

조각당 건물에서 한적한 숲길을 따라 내려서면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살았던 본관이 나온다. 1988년 ‘이승만 전시관’으로 개관된 본관 벽에는 역사적인 사진들이 가득 달려 있고, 내부에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의 유품과 평소 사용했던 가구, 역사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남긴 유품들 중, 여러 번 기워 입은 속옷과 양말, 몽당연필, 깃이 헤어질 정도로 오래 입은 코트 등이 검소함을 평생 실천하며 살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1899년 국가전복혐의로 한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국민계몽을 위해 썼던 ‘독립정신’과 신영한사전의 초고도 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죽은 지도자는 말이 없지만, 지도자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는 지금도 활발히 계속되고 있다. 정부수립 60년을 맞아 서울시 기념물 제 6호인 이화장을 국가사적으로 승격시키는 작업이 현재 추진되고 있다.

 

■ 이화장

 

- 관람시간 : 오전 10시 ~ 오후 5시, 무료

- 문의 및 예약 : 02) 762-3171 (방문 전 예약필수)

- 교통 :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 도보 1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