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내 아내에게 외 2편 - 이원규(李苑圭)

풍월 사선암 2009. 9. 14. 21:42

 

내 아내에게 - 이원규(李苑圭)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수천 번을 말해도 아깝지 않은 내 아내에게

어쩌다가 나는 사랑한단 말 한번 제대로 못하는

멋없는 남편으로 살아왔던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햇살이 고와서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는 내 아내는

그 햇살보다 더 빛나는 미소를 가지고 있다


커피를 마실 때 프림과 설탕을 듬뿍 넣는 그녀지만

가끔은 바싹 말린 장미 꽃잎가루만 넣은 독한 커피를

기꺼이 같이 마셔주는 내 생애 단 하나의 여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변치 말고 헤어지지 말고 살아가자던

젊은 날의 약속은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나 이제 아내에게 고백합니다.

당신 없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살아서든 죽어서든 당신만을 사랑하고 지켜주겠다고

 

 

내 사랑 크리스티나 - 이원규


병들고 가난한 내가

지조 높은 그녀를 사랑해서

나 자신과 그녀에게 죄를 지었다.


꿈길로 이어진 하늘에서 내려와

내 곁에 날개를 접은 천사 같은 그녀는

오늘도 환한 미소로

나의 하루를 밝혀주고 있다.

 

말문이 막히고 숨통이 막히고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는 나는

그녀 앞을 무작정 가로 막고 둥지를 틀어

먹이를 날아오는 어미 새를 대하듯

그녀의 땀방울을 쪼아 먹고 있다.


사랑한다면 진정 사랑한다면

찬란한 비상의 하늘로 훨훨 보내야 한다는데

나는 도리어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녀의 날개에서 깃털을 뽑아내며

오늘도 나 자신과 그녀에게 죄 짓고 있다.

 

굳은 손가락으로 쓰다 - 이원규


추운 겨울, 얼음장 같은 세상살이에

온몸 얼어붙고 가슴 시려서

뜨거운 입김마저 움츠러드는데

세상의 불꽃들은 모두 꺼져버렸는지

찬바람만 매섭게 내 마음의 문풍지를 흔들고 있다.


루게릭병, 죽음보다 깊은 어둠이라고

팔다리는 수수깡처럼 가늘어지고

가슴속은 새까맣게 타버려서

이제는 숨 쉴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데

세상의 불빛들은 모두 잠들었는지

캄캄한 침묵만이 내 마음의 문지방을 넘나들고 있다.


병원건물의 하얀 외벽보다 더 창백한 눈송이들이

지금 내 가슴 위에 쏟아져 내려도 

살아야 한다고 마침내 살아내야 한다고

마지막 남은 체온을 부둥켜안고

새봄이 오고 새날이 밝기를 기다려

굳은 손가락으로 굳세게 쓴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고.

 

 

루게릭병과 싸우는 이원규·이희엽 부부 러브 스토리

 

부부가 사는 아파트는 흑백(黑白) 두 색깔뿐인 것처럼 느껴졌다. 가구가 없어 휑한 느낌이 드는 거실에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1989년 12월23일 결혼 후 대만으로 신혼여행 갔을 때 찍은 것이다. 팔짱 낀 둘은 행복해 보였다.


사진 속 건장한 남자가 안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172㎝라는 키는 오그라져 있었다. 머리는 하중(荷重)을 견디지 못해 자꾸 아래로 처졌다. 몸무게는 40㎏ 남짓, 입에서는 쉼 없이 침이 흘렀다. 다리도 쉼 없이 떨렸다.


남자는 '근위축성측색경화증(筋萎縮性側索硬化症·ALS)', 일명 루게릭병(病)을 앓고 있다. 이 병에 걸리면 운동세포가 굳는다. 말을 할 수 없게 되고 체중이 준다. 호흡이 멈추면 끝이다. 이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된다.


인간을 움직이게 만들던 몸이다. 그런데 지금은 주인을 가두는 '육체의 감옥(監獄)'이다. 정신만은 멀쩡하다. 그게 더 본인과 가족을 미치게 만든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움직일 수 있는 부위는 눈 주변이다.


인구 10만명당 대략 2~3명이 이 병에 걸린다. 세계적으로 10만명이 이 천형(天刑)에 시달리고 있다. 국내에도 1500명 정도가 목숨과 시간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 몇배가 되는 가족들은 인내와 경쟁하고 있을 것이다. 

 

-* [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중에서 *-